悲しみは女だけに-浅丘ルリ子 作詞 なかにし礼 作曲 三木たかし 編曲 白鳥伍郎
教会の鐘の音が 聞こえるこの部屋で 当てもなく髪を梳く 悲しい女一人 指先でたどるのは 帰らぬ思い出 風のように波のように 消え果てた夢よ
セリフ 悲しみはいつも女だけに付きまとうものでしょうか。 そしてその悲しみを抱いて生きるのが女のさだめなのでしょうか。 私はイヤ、これ以上泣くのはイヤ、ねえ行かないで・・・ 行かないで・・・行かないで
ひび割れた鏡さえ 貴方を映すの 傷ついたこの胸に 渦を巻く涙
セリフ 愛することしか知らない女だと言って笑わないで 私が生きてゆくにはどうしても貴方が必要なのよ。 この指で、この手のひらで、いったい誰を抱けって言うの。
あ-愛にそむくほど私は不実な女じゃないの 貴方にはわからない 別れの痛みさえ いつの日にも悲しみは 女だけのものね
セリフ 行かないで、ねえ貴方行かないで、 行かないで・・・行かないで・・・
孝心이 가득한 華城 華城은 ‘朝鮮 城郭의 꽃’으로 불립니다. 보면 볼수록 感歎詞를 터뜨리게 합니다 朝鮮 正祖 20年(1796)에 完工된 城으로 當代 東西洋 軍事 建築物 中 가장 發達한 形態라는 評價를 받고 있습니다. 華西門 옆 西北空心墩이 좋은 例입니다. 中國과 日本, 유럽 어느 곳에서도 이만큼 獨創的이고 效率的인 望樓 施設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화살과 槍劍, 銃砲 等의 攻擊을 效果的으로 막아낼 수 있는 防禦施設입니다. 外觀도 빼어납니다. 全面部 모서리가 모두 둥글게 曲面 處理돼 마치 굵은 대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듯합니다. 군더더기 없이 매끈한 人相이네요. 또 아래 墩臺를 構成하는 數百 個의 돌들은 藝術性이 뛰어난 뀔트 作品을 聯想시킵니다 全體的으로 軍事防禦施設의 機能性을 極大化하면서 삭막 하고 투박한 雰圍氣는 排除시켰습니다.
西北空心墩에서 보듯 華城은 軍事的, 建築學的으로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이는 어쩌면 華城의 築成이 正祖의 흠잡을 데 없는 孝心을 바탕으로 삼았기에 可能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正祖는 1793年 1月 水原都護府를 華城留守部로 昇格시키고 當時 左議政이었던 蔡濟恭을 華城留守로 任命합니다.
蔡濟恭의 指揮로 幕이 오른 華城 工事는 城壁 基礎를 닦고 望樓를 다 올리기까지 채 3年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奎章閣 出身 實學者인 丁若鏞이 作成한 성화주략(1793)을 指針書로 삼아 工事가 進行됐습니다. 丁若鏞은 石材와 벽돌을 竝用하고, 建築 部材를 規格化했으며 擧重器 等 新技術을 活用해 獨步的인 城郭을 完成시켰습니다.
華城 城壁의 길이는 약 5.7km입니다. 角樓, 砲樓, 雉城, 將臺 等 軍事施設이 城壁을 따라 設置돼 있습니다. 그 中 東北角樓, 卽 訪花隨柳亭은 華城의 4槪 角樓 中 으뜸으로 꼽힙니다. 韓國에서 가장 아름다운 亭子로 알려져 있습니다. 訪花隨柳亭은 버드나무 우거진 연못인 龍淵, 水原川이 지나는 水門인 華虹門과 어 울어져 꽃 피는 봄날이나 가을 달밤에 絶境을 빚어냅니다.
華城의 門은 東西南北 各 方向에 蒼龍門, 華西門, 八達門, 長安門이 자리합니다. 그 中 八達門은 樓閣과 甕城이 가장 크고 華麗합니다. 日帝 强占期에 左右 城郭이 잘려 나갔을 뿐 戰亂과 火魔를 避해 原型을 維持해 오고 있습니다. 올 여름 文化財廳의 構造 安定性 檢討 結果 門樓 2層 들보가 처지고 기둥과 기둥 사이가 벌어지는 現像이 發見돼 現在 解體 復元 作業이 進行 中입니다.
城內 部屬 施設로는 華城 行宮이 代表的입니다. 行宮은 임금이 休養, 陵園 參拜, 戰亂 等의 理由로 宮闕을 떠나 머물던 臨時 居處를 말합니다. 正祖는 華山에 아 버지의 陵園인 顯隆園을 造成한 後 昇遐할 때까지 總 12次에 걸쳐 陵行을 했습니다. 그때마다 華城 行宮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行事를 擧行했습니다. 行宮의 正門인 新豊樓 앞에서 華城府 百姓들에게 쌀을 나누어주고 죽을 끓여 먹인 진흘 行事도 그 中 하나입니다. 勿論, 지금은 觀光客 對象 이벤트가 多樣하게 마련되어 있습니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