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자에 문풍(文風)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박지원의 죄다,《열하일기》를 내 이미 익히 보았거늘 어찌 속이거나 감출 수 있겠느냐?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된 후로 문체가 이같이 되었거늘 본시 결자해지인 법이니 속히 순수하고 바른 글을 한 부 올려 《열하일기》로 인한 죄를 씻는다면 음직으로 문임 벼슬을 준들 무엇이 아깝겠느냐?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무거운 벌을 내릴 것이다"
1792년 정조는 당시 경박한 문체를 추종하는 사조의 책임을 박지원에게 돌렸다,(열하일기》가 도대체 어떤 책이길래 그 책으로 인해 경박한 문체가 유행했다는 것일까? 그리고 박지원이 누구길래 순수하고 바른 글 한 편에 문임의 벼슬을 줄 수도 무거운 벌을 내릴 수도 있다고 한 것일까?
박지원은 노론 계열인 潘南 朴氏 집안으로 1737년(영조 13) 한성반송 방 야동에서 박사유의 2남 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까지 역임했지만 청렴했고,아버지는 벼슬길에 나가지 못한 채 일찍 죽어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열여섯 살 되던 해 전주 이씨 가문에 장가를 들었는데 박지원이 그때까지 제대로 된 글공부를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안 장인은 직접《맹자》를 가르쳤고,이후 자신의 동생인 홍문관 교리 이양천에게 가르침을 받게 했다. 이때부터 처남인 이재성과 평생의 글벗으로 지내며 스무 살 무렵까지 학문에 몰두했다.
늦게 시작한 글공부였지만 20대 초반 당시 뛰어난 문장가이자 대제학이었던 황경원이 그의 글을 보고 훗날 내 자리에 앉을 사람은 틀림없이 자넬 걸세!’ 라고 칭찬할 정도로 글재주가 뛰어났다. <양반전> . <광문자전> . <예덕선생전〉등 세태를 풍자하는 아홉편의 글을 지은 것도 스무살 무렵의 일이다. 서른 살 즈음에는 오늘날의 탑골 공원인 백탑 근처로 이사하면서 이웃에 사는 유득공•박제가•이서구 등과 갚은 학문적 교류를 나누는데,이들의 만남은 북학파 형성의 계기가 된다. 특히 홍대용 과의 교류를 통해 박지원은 청나라의 문명을 접하고 신학문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선진 문화 수용론을 주장한 이들은 상업과 대외무역을 중시하고 수레•벽돌의 이용 등 새로운 기술을 도입할 것을 주장했다.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는 이 시기에도 박지원의 생활은 이서구가 눈물로 한탄할 만큼 비참했다.
그러던 중 정조가 즉위하면서 홍국영이 득세하자 박지원은 가족을 데리고 한성을 빠져 나와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황해도 금천의 연임골짜기에서 숨어 살기까지 했다. 홍국영의 세도에 노론 벽파였던 박지원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것이다. 이곳에서의 인연으로 박지원은 자신의 호를 연암이라 했다.
1780년 그에게 베이징 여행의 길이 열렸다. 간절히 바랐지만 감히 엄두 내지 못했던, 신학문을 직접 접할 수 있는 기회였다. 1780년 친척 형이었던 박명원이 청 황제의 칠순 잔치를 축하하는 사절로 베이징에 갈 때 수행원으로 따라가게 된 것이다.
《열하일기》는 이때 보rh들은 것을 정리한 책이다. 그러나 박지원은 이 책에서 단순히 중국여행에서 얻은 새로운 문물의 소개와 감상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에 걸쳐 당시의 사회 문제를 신랄하게 풍자해 조선 후기 문학과 사상을 대표하는 걸작을 만들어냈다. 박지원 스스로 “애초 후세에 전하려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고 밝히고는 있지만, “그런데 누가 알았겠느냐? 책을 절반도 집필하기 전에 벌써 남들이 그걸 돌려가며 베껴 책이 세상에 널리 유포될 줄을”이라고 했듯이 이 책은 곧 사람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갈렸다. 청의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는 혁신적 사상과,옛 문체를 벗어 던지고 일상 생활용어를 그대로 사용한 신선한 문체에 열렬한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 극도의 반감을 표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육경(六經)에 나오는 옛 글귀를 그대로 인용하는,실제 현실에서 쓰는 언어와 동떨어진 난해한 문체를 사용하고 있었다. 문장은 중국 한나라의 방식을, 시는 당나라의 사조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지원은 “글이란 자기 의사를 표현하기 만하면 된다”며,비어•속어•방언 등을 사용하고 사실적인 묘사를 자유분방하게 구사했다. 그러면서 ‘설사 반고나 사마천이 다시 살아온다 하더라도 과거의 자신들을 따르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열하일기》 이후 박지원은 유명 인사가 되었고,그의 파격적인 사상과 문체에 심취한 진보적 선비들은 유행처럼 그를 본받았다. 이러한 흐름에 대한 정치적 반감의 표출이 바로 정조의 ‘문체반정’이다. 당시 노론은 서학을 이유로 남인을 공격하고 있었다. 문체반정은 이런 노론을 견제하기 위해 정조가 선택한 정치적 행동이었다. 박지원을 비롯해 그를 따르는 북학파 학자들이 대부분 노론핵심 가문의 자제들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 정치 공세인 것이다. 또한 그러면서 박지원을 개혁주의자들의 막후 실력자로 인정하고 그를 자신의 정치 세력으로 끌어들이려는 포석이기도 했다.
정조의 뜻을 이해한 박지원은 옛 문체를 사용해 농업 관계서인《진과농소초문》을 지어 바치고, 정조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문제는 해결되었다.
그 무렵 박지원은 경상남도 안의 현감으로 벼슬길에 올라 있었다. 과거에 뜻이 없었던 박지원은 젊은 시절 초중장에서 모두 장원을 하고도 최종시험에 답안지를 내지 않고 나오는 등 벼슬길을 경계했다. 그러다 50세가 되어서야 음직으로 종9품에 해당하는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이라는 관직에 나아갔다. 당시 정조의 신임을 받던 규장각이 박지원을 영수로 하는 북학파 인물들로 거의 채워져 있었으니,박지원을 조정으로 끌어들이려는 움직임이 어느 때보다 강하기도 했지만, 스스로도 자신의 학문적 이념을 국가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고 판단했던 듯하다.
이후 그는 사복시 주부,사헌부 감찰,제능령,한성부 판관을 거쳐 안의 현감으로 나아갔고,그 곳에서 선정을 베풀어 정조에게 “다스림에 있어 지극히 선량하다”는 치하를 받기도 했다. 안의 현감의 임기를 마치고 잠시 쉬었다가 예순에 면천 관수에 임명되고,이듬해 양양 부사가 되었지만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 뒤 늙고 병들었음을 이유로 사직하고 한성으로 돌아왔다. 관직에 머물 당시 정조의 명으로《과농소초.《한민명전의》등을 지었다. 이후 중풍으로 고생하다 1805년 10월 20일 예순아흡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평 가
박지원은 생전에 공식적인 인정을 받지는 못했다. 높은 식견과 뛰어난 문학성을 높이 평가한 사람들이 있던 반면 강한 기상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성품 때문에 오해와 비난도 많이 받았다.
그의 문집이 처음으로 간행된 것은 사후 100년이 지난 1900년이었다. 손자 박딱수가 우의정을 지내면서도 발간하지 못할 만큼 그의 사상은 급진적이었고 따라서 위험했다.
명나라에 대한 의리론 과 청나라에 대한 북벌론이 지배적인 시대 상황에서 그는 청나라의 기술 문명을 과감하게 수용하자고 주장했다. 그리고 농업 중심의 사회에서 상업과 대외무역을 중시하며 새로운 기술 도입을 외쳤다. 또한 당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던 대지주의 토지 집중화 현상을 막기 위해 일종의 토지 소유 상한제인 한전법 (限田法)을 주장했다.
그가 일궈놓은 북학사상은 19세기 김정희에 의해 학문적으로 성숙되고. 19세기 후반 개화기에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정신문명은 기존의 조선의 것을 지키되 물질문명은 서양의 것을 수용하자는 논리) 형성의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구한말 문장가 김윤식은 “그의 문장은 천마가 하늘을 나는 것 같아 굴레를 씌우지 않았건만 자연스럽게 법도에 다 들어맞는다. 그러므로 그의 문장은 문장가운데 으뜸이라 할만하며,후생이 배워서 이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극찬했다.
홍국영
1748~1781. 1771년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 부정자를 거쳐 시강원 사서가 되면서 당시 세손이던 정조와 인연을 맺었다. 그 무렵 세손은 정적들에 둘러싸여 위태로운 처지였다. 정조가 즉위한 홍국영은 병권을 장악했을 뿐 아니라 도승지까지 맡아 국정을 좌우했다. 약 3년간 홍국영의 세도정치를 묵인하던 정조는 홍국영이 왕위계승까지 좌지우지하려 하자 축출했고,홍국영은 화병을 얻어 죽었다.
육 경
《시경》.《서경》.《예기.《악기》.《역경》.《춘추》의 여섯 가지 경서.《장자》의 천운편(天運篇)에 공자가 노자(老子)에게 한 말 가운데 공자가 육경을 공부한 유래가 적혀 있다. 육경의 명칭이 보이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공자시대에는 《시경》.《서경》. 《예기》.《악기》가 사대부의 교양을 위해 필수적인 학습내용이었으나,후세에《역경》.《춘추》가 추가되어 육경이 된듯하다.
북학파
영•정조 때 청나라의 학술과 문물을 배우려 한 학자들의 학문 경향을 말한다. 병자호란 후 조선에서는 오랑캐 청에 대해 복수하고l자 ‘북벌’ 을 주장하고 청의 문물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그러나 영•정조대 일부 학자들은,청나라의 문물이 선진 문화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자는 ‘북학’ 의 주장을 폈다. 이들을 북학파라 한다. 홍대용•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청나라의 문물과 학술을 배우자는 북학론의 대표 저서로는 홍대용의《의산문답》,박지원의 《열하일기》,박제가의《북학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