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謠背景函

동숙의 노래-문주란///金弘道와 申潤福

bsk5865 2015. 2. 26. 08:44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5.02.26 07:28

 

동숙의 노래-문주란///金弘道와 申潤福(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6849 


동숙의 노래-문주란


동숙의 노래-문주란

작사 한산도 작곡 백영호


너무나도 그 님을 사랑했기에
그리움이 변해서 사모친 미움
원한 맺힌 마음에 잘못 생각에
돌이킬 수 없는 죄 저질러 놓고
흐느끼면서 울어도 때는 늦으리
음~ 때는 늦으리


님을 따라 가고픈 마음이건만
그대 따라 못가는 서러운 미움
저주받은 운명이 끝나는 순간
님의 품에 안기운 짧은 행복에
참을 수 없이 흐르는 뜨거운 눈물
음~ 뜨거운 눈물


金弘道와 申潤福

서민들의 생생한 삶과 음지의 여성들을 화폭에 담은 풍속화의 양대 거장

金弘道

생몰년도: 1745년(영조 21)-?
자: 사능(士能)
호; 단원(檀園)/단구(丹邱)/서호(西湖)/고면거사(高眼居士)/취화사(醉畵士)/첩취옹(輒醉翁)
활동분야:미술

申潤福

생몰년도: 1758년(영조 34)-?
자: 입부(笠父)
호: 혜원(蕙園)
활동분야• 미술

김홍도와 신윤복은 조선 후기 풍속화를 대표하는 화가들이다.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화폭에 담는 풍속화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구려 벽화까지 언급할 수 있겠지만. 18세기와 19세기 김홍도와 신윤복에 이르러 그 절정을 꽃피웠다고 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살았고,당시 사람들의 살아 있는 삶을 표현한다는 비슷한 주제 의식을 갖고 그림을 그렸으며 현재에는 조선 후기 회화의 ‘양대 거장으로 손꼽히지만,두 사람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엇갈렸다. 김홍도는 도화서에 들어가 영조와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한 시대 최고의 화가로 이름을 높였던 반면,신윤복은 기록이 거의 전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주류사회에서 밀려나있었던 듯하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신윤복도 도화서 화원이었으나 쫓겨났다고 한다. 왕의 초상화를 그린 화가와 도화서에서 쫓겨난 화가 이들이 생존 시에 처했던 상황이다.

김홍도는 1745년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가 만호를 역임했다는 사실만 전해질 뿐 어떠한 집안의 자손으로 태어났는지 일절 전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원래 무반이었다가 중인으로 전락한 집안에서 태어난 듯하다. 그림과 아무 연관 없는 집안에서 태어난 김홍도가 당대의 화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강세황이라는 훌륭한 스승을 만난 덕분이었다.

뛰어난 문인화가였고 최고의 평론가였던 강세황의 집에 "젖니를 갈 나이부터 드니 들며” 그림을 배웠는데, 강세황은 김홍도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그림 그리는 사람은 대체로 천과 종이에 그려진 것을 보고 배우고 익혀서 공력을 쌓아야 비로소 비슷하게 할 수 있는 데, 단원은 독창적으로 스스로 알아내어 교묘하게 자연의 조화를 빼앗을 수 있는 데까지 이르렀으니,이는 천부적인 소질이 보통사람보다 훨씬 뛰어나지 않고서는 펼 수 없는 일이다”라고 칭찬했다. 이후 강세황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김홍도의 지지자이자 예술적 동반자가 되어주었다. 김홍도가 스무 살의 나이에 도화서의 화원으로 들어간 것도 강세황의 추천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라 추정된다• 1765년 도화서의 화원이 된 김홍도는 영조의 재위 40년 축하잔치를 기념하는 병풍 그림을 그린다. 스물한 살의 어린 나이에 임금의 큰 잔치 그림을 홀로 그렸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능력 있는 화원으로 인정받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1773년 스물아홉 살의 김홍도는 영조의 어진과 왕세자의 초상을 그리며 그의 그림 인생에 중요한 인연을 또 한 사람 만난다. 뒷날 정조가 되는 왕세자는 당시 김홍도의 솜씨가 마음에 들었던 듯하다. “김홍도는 그림에 공교로운 자로서 그 이름을 안 지가 오래이다. 30년 전에 초상화를 그렸는데 이때부터 무릇 화사(畵事)에 속한 일은 김홍도로 하여금 주관하게 했다”는 글을 남긴 바 있듯이 이후 정조는 김홍도가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도와주는 후원자가 된다.

30대에 김홍도는 이미 그림으로 높은 이름을 얻고 있었다. “그림을 구하는 자가 날마다 무리를 지으니 비단이 더미를 이루고 찾아오는 사람이 문을 가득 메워 잠자고 먹을 시간도 없을 지경이었다” 이 무렵 김홍도는 주로 〈군선도> . <해상군선도> . <챔동취적〉등의 신선도와 〈서원아집도> . <모당 홍이상의 평생도〉등의 인물화,그리고〈서당> . <씨름> . <타작> . <우물가〉 등의 풍속화를 많이 그렸다.

그 가운데서도 풍속화는 인물의 생동감 있는 묘사와 각 장면의 극적인 구성이 보는 이들을 매료시켰다. 그의 풍속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일하는 백성들이다. 대장간에서 연장을 만들거나 집을 짓는 장인들,밭을 갈고 꼴을 베는 사람,물을 걷고 빨래하는 사람,장사하는 상인들의 모습 등 서민들의 정서와 삶에 밀착된 그림들을 역동적으로 그려냈다. 이러한 풍속화들은 왕도 즐기게 되어 화원 시험의 한 과목이 되었다. 이렇듯 김홍도의 이름을 있게 한 것은 풍속화였지만,산수화•화조화•미인도 등에서도 김홍도는 빼어난 작품을 남겼다.

김홍도는 서른일곱 살이던 1781년 정조의 초상을 그리고,그 상으로 경상도 안동의 안기찰방(安奇察謗) 벼슬을 받았다. 그에 대해 강세황은 “나라에서 기술자(중인)를 등용한 것이 본시 여간 해서 없던 일이며 단원은 서민으로서 최고의 영광을 누린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비록 종6품의 말직이기는 했지만,화원으로서 누리기 어려운 영광이었다.

벼슬살이를 하고 돌아온 40대의 김홍도는 화조화 기록화 등을 주로 그렸다. 1788년에는 정조의 명으로 김응환과 함께 금강산 등 영동 일대를 기행하며 그곳의 명승지를 그렸고,그 이듬해 사선을 따라 중국 베이징에 갔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화성으로 모시며 현륭원을 건설할 때 현륭원의 원찰인용주사의 후불탱화 제작에 참여해,조선 후기 불화의 명작 중 하나를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1791년, 다시 정조의 초상을 그리는 작업에 참여해, 그 상으로 충청도 연풍현감에 제수되었다. 중인 신분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 직책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만 3년 뒤 “남의 중매나 일삼으면서 백성을 학대했다”는 충청 위유사(慰諭使) 홍대협의 보고로 연풍 현감 자리를 내주고 돌아온 김홍도는 다시 그림에 전념해 산수• 화조• 인물화 등에서 명작들을 쏟아냈다. 이렇듯 많은 그림을 그렸고 당대 최고의 화가로 이름이 높았지만,그의 삶은 항시 어려웠고,건강이 좋지 않았다. 병고와 생활고에 시달리다 각 여생을 마친 김홍도가 환갑(1805년)까지 그림을 그렸음은 알 수 있지만 정확히 몇 년에 사망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신윤복의 삶은 김홍도의 삶만큼도 알려져 있지 않다. 김홍도가 일찍부터 이름을 얻고 화원에 소속돼 있다가 벼슬살이도 했던 반면,신윤복은 양반 사회와 단절된 공간에서 활동했는지 그림 이외에 남아 있는 문헌자료가 거의 없다. 1759년 도화서의 유명한 화판인 신한평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 정도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신한평은 영조• 정조 • 순조 초년까지 궁중의 화원으로 활동했으며 초상화와 속화에 빼어났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로,김홍도가 영조와 정조의 초상을 그릴 때 함께 작업했던 사람이다. 한편 신윤복이 너무 비속한 그림을 그렸다는 이유로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말이 전하기도 하는데,그럴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대대로 도화서 출신이었던 가문에서 태어난 만큼 신윤복이 그림을 시작한 것은 매우 자연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윤복은 김홍도의 그늘 때문인지 아버지의 그늘 때문인지 모르나 당시 별다른 명성을 얻지 못했다. 권력이나 조정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서민들 속에 살며 자유롭게 그림을 그렸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기존의 화풍과 다른 독창적인 화풍을 창조 할 수 있었다.

산수화도 그렸지만 신윤복이 주로 그린 것은 풍속화였다. 전통적인 조선 여인의 모습을 그런 <여인도>, 단옷날 물가에서 목욕하는 여인들과 이를 훔쳐보는 남자들을 그린 <단오풍정>, 주모와 얘기를 나누는 남정네들을 그린〈주막〉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비록 당시에는 인정받지 못했지만,독창적인 그의 작품은 후대에 그 가치를 인정받아, 풍속화하면 김홍도와 함께 누구나 그의 이름을 떠 올린다.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도가 쌍벽을 이룬다지만,이들의 그림은 두 사람의 삶만큼이나 달랐다.

우선 김홍도가 서민의 생활을 묘사했다면,신윤복은 양반과 기녀를 중심으로 남녀 간의 애정을 다룬 소재를 많이 선택했다. 일하는 백성의 모습을 그려도 김홍도는 주로 일하는 남성들을 그리고 여자를 그려도 대개 시골 여성이었는데 반해 신윤복은 도시 여성을 그린 것이 많고,대개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음지의 여성들을 그렸다. 양반의 첩 하녀,기녀,주모 등이 신윤복의 그림에는 자주 등장한다. 그때까지 여느 화가들의 눈길이 닿지 않던 곳이다.

또한 표현 기법을 살펴보면,김홍도의 필치는 매우 강하고 빠르지만 신윤복의 인물은 여리고 부드럽다. 화면 구성에서 김홍도는 배경을 생략한 반면,신윤복은 반대로 주변 배경을 치밀하게 묘사했다.

이렇듯 서로 개성이 뚜렷한 그림을 그렸지만,김홍도와 신윤복으로 인해 조선시대 그림은 백성들의 일상생활을 본격적으로 담아내기 시작했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