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謠背景函

연락선은 떠난다-장세정///金正喜

bsk5865 2015. 3. 1. 08:27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5.03.01 06:06

 

연락선은 떠난다-장세정///金正喜(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6870 


연락선은 떠난다-장세정


연락선은 떠난다-장세정

작사 박영호 작곡 김송규


쌍 고동 울어 울어 연락선은 떠난다
잘 가소 잘 있소 눈물 젖은 손수건
진정코 당신만을 진정코 당신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눈물을 삼키면서
떠나갑니다 울지를 말아요.


파도는 출렁출렁 연락선은 떠난다
정든 님 껴안고 목을 놓아 웁니다
오로지 그대만을 오로지 그대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한숨을 삼키면서
떠나갑니다 울지를 말아요.


바람은 살랑살랑 연락선은 떠난다
뱃머리 부딪는 안타까운 조각달
언제나 임자만을 언제나 임자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끝 없이 지향 없이
떠나갑니다 잊지를 말아요.


金正喜


생몰년도: 1786년(정조 10)-1856년(철종 7)
자; 원춘(元春)
호; 추사(秋史)/완당(阮堂)/예당(禮堂)/시암(詩庵)/노과(老果) 등 100여 개의 호를 그때그때 사용
활동 분야; 정치,학문,예술


생애와 업적

어려서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기억력이 뛰어났고 일찍 글을 깨우친 김정희는 여섯 살 때 벌써 ‘입춘대길(立春大吉)’이라는 글씨를 써서 대문에 붙일 정도로 글씨에도 재능을 보였다. 당시 북학파의 대가인 박제가가 지나다가 이 글을 보고 그의 부친을 찾아 “이 아이는 앞으로 학문과 예술로 세상에 이름을 날릴 만하니 제가 가르쳐서 성취시키겠습니다 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또한 일곱 살 때 써 붙인 입춘첩을 보고는 채제공이 찾아와“이 아이는 필시 명필로서 이름을 한 세상에 떨칠 것이오. 그러나 만약 글씨를 잘 쓰게 되면 반드시 운명이 기구할 것이니 절대로 붓을 잡게 하지 마시오. 그러나 만약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게 하면 크게 귀하게 되리라”고 했다는 일화도 있다.

김정희는 고조부 김흥경이 영의정까지 지냈고 증조부인 김한선이 영조의 둘째 딸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졌던 명문 집안의 종손인데다 뛰어난 재주로 주변의 기대를 한폼에 받으며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열 살 무렵부터 스무 살 때까지 양아버지와 할아버지,할머니,어머니,부인,그리고 스승인 박제가,양어머니까지 연이은 죽음으로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불교에 심취하기도 했지만,순조의 즉위로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서 그의 집안은 다시 안정을 찾았다. 정순왕후는 김정희의 증대고모뻘 된다.

김정희 개인으로도 재혼과 생원시의 급제를 통해 평정을 찾은 무렵인 1809년 사신으로 청나라에 가는 아버지를 따라 베이징에 다녀올 기회가 생겼다. 스승인 박제가의 영향으로 북학에 눈을 뜬 김정희에게 두 달 남짓했던 베이징에서의 경험은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이곳에서 그는 평생 마음으로 모시는 스승 둘을 만나는데,청나라의 대학자인 옹방강과 완원이 그들이다. 이들의 만남 뒤 ‘조선의 학계는 실사구시의 학문으로 빠른 진전을 보여 500년 내로 보지 못했던 진전을 보게 되었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김정희와 이들의 만남은 조선과 중국의 문화교류에 매우 중요한 획을 그었다.

‘정조문화를 완성하고 선양함에 절대적 공로자이자 제일인자’였다는 평을 받고 있던 완원은 김정희의 총명함과 박식함에 놀라며 여러 금석문을 보여주고,자신의 저서를 선물했을 뿐 아니라 완당이라는 호를 내려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였다. 또한 당시 78세의 노인이었던 당대의 금석학자이며 서예가 옹방강은 25세의 김정희에게 ‘경전• 예술• 문장에서 조선에서 가장 뛰어나다(經術文章 海東第一)"라고 칭찬하며 희귀한 금석문과 진본들이 8만 점에 이른다는 자신의 서재를 두루 보여주고 많은 책과 글씨,그리고 귀중한 탁본(招本)을 선물로 주었다. 이러한 학문적 자극은 김정희를 금석학과 고증학의 최고봉으로 이끌었다. 이들의 만남은 귀국 후에도 편지와 자료 교환으로 계속 이어졌다. 엄청난 양의 책과 탁본,서화가 베이징에서 김정희에게 들어왔고,김정희의 선물과 자료가 베이징으로 보내졌다. 이렇듯 베이징 학계와 교류하며 청나라의 경학과 고증학,금석학을 받아들이는 데서 그치지 않고,김정희는 조선의 금석문을 연구하며 고증학을 발전시켰다• 1816년에는 벗 김경연과 함께 북한산에 올라 그때까지 도선국사(道膳國師)의 비석으로 알려져 있던 오래된 비가 사실은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 라는 사실을 확인했고, 이듬해에는 헌종과 철종 대에 영의정을 지낸 조인영과 함께 다시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찾아 조사했다. 김정희는 북한산순수비의 한 글자 한 글자를 황초령비 그리고《삼국사기》의 기록과 비교해 훗날 장문의 논문을 발표했는데,이 글이 그의 대표작인〈예당금석과안록〉이다. 그는 ‘사실에 의거하여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는 실사구시를 학문의 가장 중요한 도리로 삼고 학문과 예술을 연마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게 자주 인용되던 실사구시 라는 말은 사질 고증학에서 나온 말로 김정희는〈실사구시설〉이라는 글을 통해 자신의 학문적‘지향점을 설명하기도 했다.

김정희의 천재성은 그림과 글씨에서도 두드러졌다. 그림에서는 문인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으며,글씨에서는 추사체라는 글씨를 창안할 만큼 독보적인 존재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가슴속에 만권의 책이 들어 있어야 그것이 흘러 넘쳐서 그림과 글씨가 된다고 말했다. 글씨를 쓰는 사람의 문자향이나 서권기가 없으면,제대로 된 글씨를 쓸 수 없다고 강조했다.

베이징에서 배운 신학문에 몰두하던 김정희는 서른네 살에 비로 소문과에 급제하고 그 이듬해 한림 소시에 합격해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가문의 후광에 자신의 재능이 보태져,규장각 대교,충청우도 암행어사를 거쳐 의정부 검상,예조참의,규장각 대교,동부승지에 이르는 벼슬길은 순탄했다.그의 아버지 김노경도 20여 년의 세월 동안 요직을 두루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1840년 조정을 손에 넣은 안동 김씨에 의해 10년 전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를 가 8년이나 어려운 시절을 지내야 했으며, 유배에서 풀려난 뒤 3년이 지난 1851년 다시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유배 생활 중에도 학문과 서예에 정진했으며,먼 길까지 찾아온 제지들을 가르쳤다. 특히 제주도 유배 시절 제자인 이상적에게 그려준 〈세한도〉는 김정희 예술의 최고명작이자우리나라문인화의 최고봉으로 손꼽힌다.

유배에서 돌아온 김정희는 부친의 묘소가 있는 과천의 관악산 기슭에 초당을 짓고 살다가 경기도 광주 봉은사에 가서 불가에 귀의한 뒤 일흔하나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다.


평 가

“선생은 천도(天道)와 인도(人道)를 닦아 여러 학문을 체득하시고,글씨 또한 조화를 이루어 왕희지• 왕헌지의 필법을 능가하고,시문에 뛰어나 세월의 영화를 휩쓸고,금석에서는 작은 것과 큰 것을 모두 규명하여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치셨나 이다 도에 대한 담론을 할 제면 그대는 마치 폭우나 우레처럼 당당했고,정담을 나눌 제면 그대는 실로 봄바람이나 따스한 햇볕 같았지요"

김정희의 죽음을 애도하는 초의(草衣) 스님의 글이다. 초의 스님 외에도 조희룡• 이상적 • 권돈인• 허련• 흥선대원군 등 많은 지인들과 제자들이 그의 죽음 뒤 통곡하며 추모의 글들을 남겼다.

또한《철종실록》은 ‘총명하고 기억력이 투철하여 여러 가지 책을 널리 읽었으며,금석문과그림과 역사에 깊이 통달했고 초서 해서 전서 예서에서 참다운 경지를 신기하게 깨달았다, …… 젊어서부터 영특한 이름을 드날렸으나 중도에 가회를 만나 남쪽으로 귀양 가고 북쪽으로 유배 가며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며,혹은 세상의 쓰임을 당하고 혹은 세상의 버림을 받으며 나아가기도 하고 또는 물러가기도 했으니 세상에선 (그를) 송나라의 소동파에 비교하기도 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글씨,그리고 “금석학과 고증학에서 당대 최고의 석학”이라는 학문적 평가가 그의 이름 옆에 뒤따르지만,한편에서는 보수적인 환경을 벗어나지 못한 채 현실에 안주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문인화

문인• 학자 등 사대부들이 취미로 그린 그림. 심성을 기르고 교양을 위해 그림을 그렸다. 대표적인 문인화가로는 강희안(姜希顔). 이정(李霆). 윤두서(尹斗緖). 정선(鄭敾). 심사정(沈師正). 강세황(姜世晃). 김정희 등을 들 수 있다.


초의

1786~1866 조선 후기의 승려 정약용,허련,그리고 평생의 친구인 김정희 등과 폭넓게 교류했다. 다도(茶道)를 정립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허련

1809~1892,조선 말기의 화가. 호는 소치(小痴). 노치(老痴). 석치(石痴). 김정희의 제자이다. 초의의 소개로 김정희에게 본격적으로 서화를 배웠다. 특히 산수화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산수도첩>,<오백장군암도>,〈방예찬죽수계정도>,<방석도산수도>, <선면산수도), <누각산수도), <김정희초상〉 등의 작품을 남겼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