お島千太郎旅唄-伊藤久男.二葉あき子 作詞 西條八十 作曲 奥山貞吉
一 春の嵐に 散り行く花か 風にまかせた 身は旅役者 更けて流しの 三味の音聞けば 捨てた故郷に 捨てた故郷に また涙
二 雁が啼く啼く 旅空夜空 お島痛かろ わらじの紐が 今日も吹くかよ 男体嵐(オロシ) つなぐ手と手が つなぐ手と手が また冷める
三 清い心で 旅するからは 何の辛かろ 野末の仮寝 里で夜明けの 峠で暮れて 月に夫婦の 月に夫婦の 旅姿
退溪 李滉과 妓生 杜香과의 사랑 退溪 李滉은 梅花를 끔직히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梅花를 노래한 詩가 1百首가 넘는 다네요. 이렇게 놀랄 만큼 큰 執念으로 梅花를 사랑한 데는 理由가 있었습니다. 바로 丹陽郡守 時節에 만났던 官妓 杜香 때문이었습니다.退溪가 丹陽郡守로 赴任한 것은 48歲 때였습니다. 그리고 杜香의 나이는 18歲였습니다.
杜香은 첫눈에 退溪에 반했지만 處身이 풀 먹인 安東布처럼 빳빳했던 退溪. 그러나 當時 夫人과 아들을 잇달아 잃었던 退溪는 그 빈 가슴에 한 떨기 雪中梅와 같았던 杜香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杜香은 詩와 書와 伽倻琴에 能했고 特히 梅花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깊은 사랑은 겨우 9個月 만에 끝나게 되었습니다. 退溪가 慶尙道 豊基郡守로 옮겨가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杜香으로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變故였습니다. 짧은 因緣 뒤에 찾아온 갑작스런 離別은 杜香이에겐 견딜 수 없는 衝激이었습니다.
離別을 앞둔 마지막 날 밤, 밤은 깊었으나 두 사람은 말이 없었습니다. 退溪가 무겁게 입을 열었습니다.
"來日이면 떠난다. 期約이 없으니 두려울 뿐이다."
杜香이가 말없이 먹을 갈고 붓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詩 한 首를 썼습니다.
"離別이 하도 설워 잔 들고 슬피 울며 어느 듯 술 다 하고 님 마저 가는 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이날 밤의 離別은 結局 너무나 긴 離別로 이어졌습니다. 두 사람은 1570年 退溪가 69歲의 나이로, 世上을 떠날 때까지 21年 동안 한번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退溪를 떠나 보낸 뒤 杜香은 懇曲한 請으로 官妓에서 빠져 나와 退溪와 자주 갔던 南漢江가에 움막을 치고 平生 先生을 그리며 살았습니다.
退溪가 丹陽을 떠날 때 그의 짐 속엔 杜香이가 준 壽石 2個와 梅花 花盆 하나가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退溪는 平生을 이 梅花를 가까이 두고 사랑을 쏟았습니다. 退溪는 杜香을 보듯 梅花를 愛之重之했습니다. 先生이 나이가 들어 모습이 초췌해지자 梅花에게 그 모습을 보일 수 없다면서 梅花 花盆을 다른 房으로 옮기라고 했습니다.
退溪先生은 그 뒤 副提學, 工曹判書, 禮曹判書 等을 歷任했고, 末年엔 安東에 서 隱居했습니다. 그리고 世上을 떠날 때 退溪의 마지막 한 마디는 이것이었습니다.
"梅花에 물을 주어라." 先生의 그 말속에는 先生의 가슴에도 杜香이가 가득했다는 證據였습니다.
"내 前生은 밝은 달이었지. 몇 生涯나 닦아야 梅花가 될까"
前身應是明月幾生修到梅花
退溪先生의 詩 한 篇입니다.
退溪先生의 訃音을 들은 杜香은 4日間을 걸어서 安東을 찾았습니다. 한 사람이 죽어서야 두 사람은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다시 丹陽으로 돌아온 杜香은 結局 南漢江에 몸을 던져 生을 마감했습니다. 杜香의 사랑은 한 사람을 죽기까지 사랑한 切迫하고 峻嚴한 사랑이었습니다.
그 때 杜香이가 退溪에게 주었던 梅花는 그 代를 잇고 이어, 지금 安東의 陶山書院 入口에서 그대로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