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謠背景函

연락선은 떠난다-장세정///崔濟愚(D

bsk5865 2015. 3. 22. 08:01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5.03.22 06:31

 

연락선은 떠난다-장세정///崔濟愚(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6982 


연락선은 떠난다-장세정


연락선은 떠난다-장세정

작사 박영호 작곡 김송규


쌍 고동 울어 울어 연락선은 떠난다
잘 가소 잘 있소 눈물 젖은 손수건
진정코 당신만을 진정코 당신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눈물을 삼키면서
떠나갑니다 울지를 말아요.


파도는 출렁출렁 연락선은 떠난다
정든 님 껴안고 목을 놓아 웁니다
오로지 그대만을 오로지 그대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한숨을 삼키면서
떠나갑니다 울지를 말아요.


바람은 살랑살랑 연락선은 떠난다
뱃머리 부딪는 안타까운 조각달
언제나 임자만을 언제나 임자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끝 없이 지향 없이
떠나갑니다 잊지를 말아요


崔濟愚

생몰년도: 1824년(순조 24)-1864년(고종 1)
자: 성묵(性默)
호: 수운(水雲)/수운재(水雲齊)
활동분야; 종교
다른 이름; 최복술(崔福述),최제선(崔齊宣)

생애와 업적

스물한 살부터 서른한 살까지 10년에 걸쳐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던 최제우의 눈에 비친 세상은“유불천도 수천 년의 운이 다한”모습이었다. 권세를 틀어쥔 고관들은 지방 수령들과 짜고 온갖 수탈행위를 가리지 않아 백성들의 삶은 어려워졌고,나라 밖에서는 “요망한 서양 세력이 중국을 침범해” 강제로 문을 열게했으니 조선 땅에도 언제 그들의 손길이 뻗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온 세상이 병들어 기존의 삶의 틀이 소생할 길이 막혔다고 판단한 최제우는 이름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가르침을 얻어보기도 했으나 신통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1854년(철종 5) 봄,그는 자신이 직접 그 해답을 얻어내기로 결심하고 고향집으로 돌아가 구도의 사색에 빠진다. 몰락 양반 출신이었던 그의 집안은 아버지를 여읜 뒤 급격히 가세가 기울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일찍부터 학문을 익혔던 그였지만 생계를 위해 장사꾼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세상은 그가 천명을 찾기 위한 구도의 길로 가도록 이끌었다.

반년 뒤,부인의 고향인 울산으로 거처를 옮겨 농사를 지으며 사색했으나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 1855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온 노 스님으로부터 책 한 권을 받은 뒤 수행 방법을 바꾸었다. 사색에 한계를 느끼고 종교적인 수행 방법으로 돌아선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쉽지 않았다. 입산 기도를 드리기도 하고 동굴에서 49일간의 기도를 마치기도 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그 와중에 송사에 휘말려 집도 빼앗기고 가세는 더 기울었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이라도 있는 고향 용담으로 돌아가는 길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고향에 돌아온 최제우는“도를 얻을 때까지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으리라”는 시를 한 수 써서 벽에다 붙이는 등 구도의 의지를 새롭게 다졌다. 그런 뒤 1860년 음력 4월, 마침내 종교 체험을 한다. 별안간 몸이 떨리고 정신이 혼미해져 간신히 자리를 펴고 눕자 공중에서 신선의 말씀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상제(上帝)라 하거늘 너는 상제를 알아보지 못하느냐”고 물은 뒤 ‘내 너를 세상에 내려 사람들에게 이 도법을 가르치려 하니 의심하지 말라”고 했다. 그가 “서도(西道)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옵니까 하고 묻자 아니다, 내게 영부가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仙藥)이요 그 형상은 태극(太極)이요 다른 형상은 궁궁(弓弓)이니라. 이 영부를 받아 사람들을 구하고 병을 고치며 천하에 덕을 펴라” 했다.

6년간의 수행 끝에 마침내 종교 체험을 한 최제우는 그 뒤 1년간 자신의 신념 체계를 다듬어나갔다. 주문과 심고법을 만들고 수행하는 방법을 정했으며 교리 체계를 세웠다. 그렇게 민족종교 동학이 창건되었다.

동학사상의 중심은 시천주(챔돗主) 개념에 있다.‘네 몸 안에 한울님이 모셔 있다”는 시천주의 개념은,사람은 모두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므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인간 존중과 만민 평등의 사상으로 이어진다. 여기에는 종래의 유교적 윤리와 퇴폐한 양반 사회의 질서를 부정하는 반봉건적이며 혁명적인 성격이 내포되어 있다.

한편, 동학의 한울님은 천주교의 하나님 개념에서 중요한 시사를 받았지만,최제우는 나는 동쪽에서 나서 동쪽에서 도(道)를 받았으므로,도는 비록 천도(天道)지만 학(學)은 동학이다. 내 도는 이 땅에서 받았으며 또 이 땅에서 펼 것이니,어찌 서학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라며 서학과 반대편에 섰음을 분명히 했다.

구체적인 실행 방안으로는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라는 13자의 주문과 지기금지 원위대강(至氣今至 願爲大降)이라는 8자 주문을 외면서 칼춤을 추고 영부를 불에 태워 그 재를 물에 타서 마시면 빈곤에서 해방되고,병자는 병이 나아 영세무궁(永世無窮)하다고 했다.

1861년 6월부터 포덕을 시작하니,곧 많은 사람들이 동학의 가르침을 따르기 시작했다. 동학이 갑작스레 세력을 얻자 기존 유림 층에서 비난의 소리가 높아졌다. 천주교를 신봉한다는 지목까지 받았다. 당시 정부가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고 있던 터라 최제우는 호남과 남원으로 피신 생활을 하면서 동학사상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여〈논학문> . <안섬가> . <교훈가> . <도수사〉 등을 지었다.

다시 경주에 돌아와 포교하자 교세가 또다시 크게 확장되었다. 그러다 사술로 백성들을 현혹시킨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가 수백 명의 제자들이 몰려와 최제우의 가르침이 민속을 해치지 않았다고 증언하면서 석방을 청원해 무죄 방면되었다. 나라에서 무죄를 인정했다는 사실이 동학의 정당성을 인정받은 것으로 해석되어 이후 신도 수는 더욱 급증했다.

신도가 늘자 최제우는 각진에 접을 두고 접주가 관내의 신도를 다스리는 접주제(接主制)를 만들어 1863년에는 신도가 3,000여 명 접소가 13개에 이르렀다.

그러나 동학의 교세 확장에 두려움을 느낀 조정에서는 동학에 대한 탄압을 결정하고, 이를 예감한 최제우는 제자 최시형을 후계자로 지목해 도통을 전수한 뒤 1864년 11월 제자 20여 명과 함께 체포되어 이듬해 마흔한 살의 나이로 효수형에 처해졌다.

이후 동학은 2대 교주 최시형의 노력으로 암흑기를 뚫고 교세를 강화해 동학농민운동으로 연결되었고,3대 교주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했다.시천교(侍天敎)도 동학에서 분리된 교파이다.


평 가

최제우는 우리나라 사상사에서 근대적 인권사상의 선각자라 평가된다. 그의 중심사상이었던 '지천주’는 각 개인이 인격적 존엄성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로,나중에 손병희의‘인내천’사상으로 이어 진다.

순교한 뒤 최제우의 사상은 탄압과 박해 속에서도 나날이 발전했으며,동학교리를 담은《동경대전》은 오늘날까지 천도교의 경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최시형

1827 ~ 1898. 동학의 2대 교주. 1861년(철종 12) 통학에 입문,1863년 최제우에 이어 2대 교주가 되었다.1864년(고종 1) 최제우가 처형되자 태백산에 은신,관헌의 감시를 피해 안동 • 울진 등지에서 포교에 힘썼다. 그 후 《동경대전》.《용담유시》 등 주요 경전을 발간, 교의(敎義)를 체계화했다.1892년 교조의 신원,포교의 자유,탐관오리의 숙청을 충청도 관찰사에게 요구했다.1893년 2월 제2차로 각 도의 동학 대표 40여 명을 모아 왕에게 직접 상소,대궐 앞에서 사흘 밤낮을 통곡하게 했으며 보은에서 제3차 신원운동을 벌였다. 동학농민운동이 끝난 뒤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처형되었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