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謠背景函

배신자-배호///金玉均(D

bsk5865 2015. 3. 23. 08:29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5.03.23 06:28

 

배신자-배호///金玉均(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6987 


배신자-배호


배신자-배호

작사 이인섭 작곡 김광빈


얄밉게 떠난 님아 얄밉게 떠난 님아
내 청춘 내 순정을 뺏어버리고 얄밉게 떠난 님아
더벅머리 사나이에 상처를 주고
너 혼자 미련 없이 떠날 수가 있을까
배신자여 배신자여 사랑의 배신자여


얄밉게 떠난 님아 얄밉게 떠난 님아
내 청춘 내 행복을 짓밟아 놓고 얄밉게 떠난 님아
더벅머리 사나이에 상처를 주고
너 혼자 미련 없이 돌아서 가는가
배신자여 배신자여 사랑의 배신자여


金玉均

생몰년도: 1851년(철종 2)-1894년(고종 31)
자;백온(伯溫)
호: 고균(古筠)/고우(古愚)
시호: 충달(忠達)
활동분야 :정치

생애와 업적

1884년 10월 17일 저녁,우정국에서 낙성식 연회가 개최되었다. 술이 몇 순배 돌자 개화파의 맏형 격인 김옥균이 일본서기관 시마무라에게 물었다.

“그대는 하늘 천(天)을 아시오?"
시마무라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요로시(좋소) ."
오늘 거사가 있을 것을 알리는 암호였다.

연회가 거의 끝날 무렵 우정국 북쪽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가장 먼저 우정국을 뛰어나간 것은 명성황후의 조카인 민영익이었다. 그러나 민영익은 곧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왔고 연회장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른바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시작이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은 급히 빠져 나와 서재필 휘하 사관생도들을 경우궁(지금의 서울 계동 현대 사옥 뒷자리)으로 이동시키고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일본 공사관으로 가서 일본군의 출동을 확인한 뒤 대궐로 향했다. 고종을 만난 이들은 우정국에서 변란이 일어났음을 알리고 형세가 위급하니 경우궁으로 피할 것을 요청했다. 김옥균의 지시에 따라 발생한 폭발음에 놀란 고종과 명성황후는 급히 경우궁으로 몸을 피했다. 곧 일본군이 경우궁 외곽을 에워쌌다 그 뒤 이들은 왕명으로 윤태준• 조영하• 민태호• 이조연 등수구파들을 불러들여 살해했다.

그렇게 수구파 수뇌들을 제거한 개화파는 날이 밝자 대내외에 새 정부의 발족을 알렸다. 고종의 사촌 형 이재원을 영의정에 앉히고 홍영식은 좌의정에,박영효는 전후영사, 서재필은 병조참판,김옥균은 호조참판을 맡는 등 국가 중추기관을 장악한 뒤 혁신적인 새 정책을 발표했다.

청나라에 잡혀간 흥선대원군을 즉시 돌아오게 하고 이제까지 청나라에 행했던 조공을 폐지하는 등 완전한 자주 독립 국가를 지향했으며,문벌을 폐지하고,조세제도를 개혁하는등 강력한 개혁 의지를 천명했다.

그러나 매우 진취적이고 혁신적이었던 이 정책들은 3일 만에 폐기되고 만다. 예상외로 청군이 신속하게 개입하면서 사태가 급변했던 것이다. 당시 청군을 이끌던 원세개는 일본과의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었던 반면,전쟁 준비가 미처 되어 있지 않았던 일본은 한발 물러섰다. 수구파와 합세한 청군이 고종의 일행이 환궁한 창덕궁에 진입하자 일본 공사 다케조에는 그간의 약속을 저버리고 철수하려 했다. 개화파가 지휘하는 군대가 청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역부족이었다.

근대국기를 지향하던 그들의 정변은 실패로 끝났다. 온건파인 홍영식 등은 왕에게 투항하고,김옥균과 박영효 등은 재기를 꾀하기 위해 일본군을 따라 인천으로 향했다. 원세개와의 친분 등을 믿고 고종을 따랐던 홍영식 일행은 청군에게 잡히자 그 자리에서 참혹하게 죽었고,다케조에를 따랐던 김옥균 등은 때마침 인천항에 입항해 있던 일본 배에 올라탈 수는 있었지만 배 안에서 또 한번 죽음의 위기를 맞는다. 정권을 장악한 수구파가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 인물들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인천에 머물고 있던 다케조에에게 그들의 신병 인도를 요구한 것이다. 배에서 내려달라는 다케조에의 요구에 차라리 자결하자 결심하고 있을 때 그들을 구한 건 배의 선장이었다. 인도적 입장에서 도저히 이들을 보낼 수 없다고 판단한 선장은 선창의 식당 마루 밑에 이들을 숨기고 “그런 사람들은 타지 않았다”고 버렸다. 차마 일본 배를 공격하지 못한 청군이 물러갔고 배는 인천항을 출발했다.

“어떻게 하면 구조선을 파괴하고 신조선을 건설할꼬?"라며 늘고민하던 김옥균의 혁명적 시도는 그렇게 좌절되었다. 1851년(철종2) 충청남도 공주군 정안면에서 김병태의 장남으로 출생한 김옥균이 개화사상을 접한 것은 1870년을 전후한 시기 유대치와 만나면서부터이다. 한의원이었던 유대치는 중인 신분이었지만 일찍이 역관 오경석• 승려 이동인 같은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하고 선진 문물들을 소개한 책들을 탐독하여 개화의 중요성에 눈뜨고 있었다.

그 무렵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의 사랑방은 개화사상을 가진 청년들이 모여 민족과 국가의 장래에 대해 토론하며 개화사상을 배우는 장소였다. 1872년(고종 9) 스물두 살의 나이로 알성시 문과에 장원 급제한 김옥균은 이 사랑방의 주요 멤버로 젊은 개화사상가들을 이끌었다.

그리고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전후로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새로운 조선을 건설해나갈 것을 계획했다. 이 후 개화에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의 모임을 만들어 자주조선의 장래를 토론했고,김홍집• 이동인• 박영효• 김윤식• 유길준 등을 해외로 시찰 보내 개혁에 동참하도록 적극 유도했다. 또한 승정원 우부승지,참의교섭통상사무,이조참의,호조참판,외아문협판 의 요직을 거치면서 나라의 자주근대화 및 개화파의 세력 확대에 힘썼다.

1882년에는 서광범과 함께 직접 일본 시찰을 떠나 당시 일본 재야 정객들과 면담하기도 했으며,같은 해 제물포조약에 따라 일본에 파견되는 수신사의 고문 자격으로 다시 일본에 가서 신 문물을 접했다. 그러나 귀국해보니 임오군란 뒤 정권을 잡은 수구파와 이들 뒤에 있는 청나라의 압력에 개화파가 점점 내몰리고 있었다. 또 한 청나라에서 추천한 재정 고문 묄렌도르프는 사사건건 김옥균과 대립했다. 특히 파탄 상태에 이른 국가 재정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 이 논의될 때 묄렌도르프는 당오전의 주조를 주장했던 반면 김옥균은 백성들의 고통을 가중시킨다며 이에 반대하고 일본에서 외채를 빌려오겠다고 했다. 고종으로부터 위임장까지 받아 일본에 갔지만 묄렌도르프와 수구파의 음모로 차관 교섭은 실패로 돌아갔고 개화파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그 무렵 일본은 자주성이 강한 개화파와 손을 잡는 것보다 그 비용으로 군비를 확장해 청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을 했던 듯하다. 외채 도입 실패를 추궁하는 수구파의 압력에 신변의 위협까지 느낀 개화파들이 선택한 길은 급진적인 개혁이었다.

마침 프랑스와 전쟁 중이던 청이 병력을 빼가 조선에 주둔하던 청군의 병력은 반으로 줄어 있었고,전국 각지에서 농민들의 저 이 일어나 수구파 정권을 흔들어댔다. 개화파 내부에서 동원할 수 있는 인원도 적지 않았다. 문제는 아직 1,500명이나 남아있는 청군이었다. 청군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일본군의 협조가 필요했다. 개화파를 부추겨 청과 연결된 수구파 정권을 약화시키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던 일본은 적극협조를 약속했다.

김옥균은 거사 5일 전 고종과 독대(獨對)하며 “국가의 명운이 위급할 때,모든 조처를 경의 재모(智謨)에 맡기겠다”는 밀지까지 받았다. 고종의 동의를 얻었다고 판단한 김옥균의 행보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농민들과 상인들의 힘을 조직할 줄 몰랐고,단지 왕권에 의지해 위로부터 개혁을 시도했으며,일본의 침략적 본질을 보지 못한 채 일본군의 힘에 의존했다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인해 무너지고 말았다. 이들의 실패는 이후 조선에 대한 일본의 개입을 강화해주는 계기로 작용했고,이는 이들에게 친일 매국노라는 오명을 씌웠다.

선창 밑에 숨은 지 3일 만에 나가사키에 도착한 김옥균 일행은 일본에서 고단한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조선 정부는 끊임없이 그 들을 죽이려고 했고,이용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일본도 그를 홀대 해 오카사와라 섬에 강제 연금을 시키기도 했다. 연금에서 풀려난 김옥균은 마지막 승부수로 당시 청나라를 이끌고 있던 이홍장 과의 담판을 위해 청으로 건너갔다가 조선에서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되었다. 청국 정부에 의해 조선에 넘겨진 김옥균의 시체는 양화진에서 능지처참되었으나,이듬해 반역죄가 사면되고 1910년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 되었다.


평 가

서재필은 《회고 갑신정변》에서 김옥균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상당한 학자였을 뿐만 아니라,그 외에도 다재 다예한 인물이였고, (개화파 가운데) 나이도 제일 많았다. 그는 정적들에게 허다한 비방을 듣긴 하였으나 나는 그가 대인격자였고,또 처음부터 끝까지 진정한 애국자였음을 확신한다 그는 시대의 추이를 통찰하고,조선도 힘 있는 현대적 국가로 만들려고 절실히 바랐다"

‘애국적 개화사상가 와 ‘친일 매국노’ 라는 극단의 평가는 아직도 김옥균의 이름 앞에 상존하고 있다. 백성들의 힘을 이용하지 못했고,일본의 침략적 본질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치명적 잘못 앞에 무너져 내리면서 결과적으로 일본의 침략을 용이하게 해준 결과를 낳았지만,김옥균이 진보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고 조국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려 했다는 사실이 부정될 수는 없을 것이다.


강화도 조약

1876년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조약 공식 명칭은 조일수호조약 이며,병자수호조약이라고도 한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 일본은 유신과정에서 생겨난 불만을 밖으로 돌릴 필요가 있었고 또 서양 열강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만회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다른 나라 문호를 개방시키려 했다 그리고 조선을 그 대상으로 삼았다 일본은 강화도에서 운요 호 사건을 유발함으로써 1876년 2월 27일 12개조로 된 강화도조약을 체결시켰다. 조약 체결로 조선은 일본에 부산• 원산• 인천의 3개 항구를 개방하고,치외법권을 인정했으며,일본 화폐의 통용과 무관세 무역을 인정했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