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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야 새야 파랑새야-한국민요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 밭에 앉지 마라 녹두 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 밭에 앉지 마라 녹두 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全琫準 생몰년도: 1855년(절종 6)-1895년(고종 32) 자:명숙(明淑) 호;해몽(海夢) 활동 분야: 정치,사회 다른 이름; 녹두장군
생애와 업적 1894년(고종31) 1월 10일 저녁,전라도 정읍 말목장터에서 울리는 때아닌 풍물소리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수천을 헤아리는 군중들이 모이자 그들 앞에 5척 단신의 사내 하나가 섰다. 키는 작았지만,담력은 산같이‘컸고 눈은 셋 별같이 빛났다던 그가 바로 전봉준이다.
“우리가 피땀 흘려 지은 곡식이 우리 손에 들어오지 않고 저 악랄한 지주나 관료 손에 들어간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중앙의 대소 신료들은 자기 잇속 채우기에만 정신이 빠져 있습니다. 여기에 조병갑이마저 다시 부임해와 어제의 행패를 오늘 또 하고자 합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후회할 것입니다. 부디 저 탐관오리들을 물리치고 이 나라를 바로잡는 대열에 앞장섭시다. 자,날이 밝기 전에 곧바로 고부 관아로 쳐들어갑시다"
듣고 있던 군중들은 한 맺힌 함성을 토해냈고,전봉준은 이들을 두 패로 나누어 고부 관아로 향했다. 세도가 풍양 조씨 처족이었던 조병갑이 고부 군수로 부임해온 뒤 벌인 온갖 노략질에 쌓였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참고 참다 자짓들의 억울한 사정을 항의한적도 있었지만,조병갑은 이들을 난민으로 몰아 엄한 형벌로 다스렸을 뿐이었다.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도 이 일에 앞장섰다가 체포되어 매 맞아 죽었다. 이후에도 백성들은 몇 번에 걸쳐 관아에 몰려가 호소했으나 욕심에 눈이 먼 조병갑은 이들을 옥에 가두고 몽둥이로 다스렸다.
마침내 1893년 11월 전봉준을 주축으로 20명이 모여 고부 관아를 부수고 군수 조병갑의 목을 벤 뒤 전주감영을 함락할 것 등을 결의하고 사발통문을 작성했으나,조병갑이 익산 군수로 전임발령이 나 계획이 그대로 무산되는 듯했다. 그러다 1894년 1월 9일 조병갑이 공작을 벌여 다시 고부 군수로 부임해오자 백성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고, 이 분노가 하나의 힘으로 뭉친 것이다. 조병갑이 이미 달아난 고부관아는 군중들의 함성 소리에 파묻혔고,관아를 점령한 백성들은 억울하게 옥에 갇힌 사람들을 풀어주고 무기고를 부수어 무기를 나누어 가졌다 또 곡식 창고를 열어 어려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고부에서 농민들이 봉기했다는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조병갑의 후임으로 박원명을 고부 봉기를 진압하고 조사할 안핵사(按覈使)로 이용태를 임명하여 내려 보냈다. 신임 군수 박원명은 난을 일으킨 백성들에게 술과 고기를 먹이면서 지난 죄를 모두 용서할 테니 각자 돌아가 생업에 종사하라고 타일렀다. 그 말에 많은 농민군이 해산했고 전봉준도 고부를 떠났다.
그러나 농민군이 해산한 뒤 고부에 들어온 안핵사 이용태는 봉기 참가자와 주모자를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백성들을 줄줄이 잡아가고 폭행했다. 특히 농민들이 주축이었던 민란의 책임을 동학교도에게 전가시키며 동학을 탄압했다.
전봉준은 손화중• 김개남 등 동학 접 주들과 손을 잡고 보국안민을 위해 일제히 궐기하자는 통문을 띄웠다. 이에 각지에서 수천 명의 농민과 동학교도가 고부군 백산면으로 모여들었다.
손화중 • 김개남은 동학의 포주들로,각기 거느리는 교도들이 많아 인근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손화중이 고창 선운사 도솔암의 석불 배꼽에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비결을 꺼냈다는 소문이 퍼지자 손화중의 포에 몰려드는 사람들의 행렬이 끝도 보이지 않았다는 말이 전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손화중은 당시 30대 초반이었는데도 호남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접주로 떠오르고 있었다. 한편 남접의 실력자인 김개남은 동학농민운동 초기에 1,300여 명을 거느리고 남원을 점거하는 등 전봉준을 능가하는 위세를 떨치며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사실 동학농민운동이 전개되면서 이들은 연합작전을 펴지 못하고 개별적인 작전을 전개함으로써 전력을 극대화시키지 못했다. 특히 군사력이라든가 용병술에서 결코 전봉준에게 뒤떨어지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는 김개남이 전봉준과 힘을 합치지 못했다는 사실은 동학농민운동이 실패한 결정적 이유로 꼽히기도 한다.
어찌됐건,1894년 5월 4일 백산에 모인 인원은 약 1만 3,000여 명이었다. 전봉준이 총대장으로 추대되고 손화중 • 김개남이 총관령을 맡았다. 이로써 처음에 농민들이 주축이 되었던 민란은 동학농민운동으로 확대된다. 이 무렵 동학은 온건 노선을 주장하는 북접과 개혁적인 행동노선을 지지하는 남접으로 나뉘어 있었는데,5월의 1차 기병 당시 남접만 가담하고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을 따르는 북접은 기병에 반대했다.
전봉준은 “우리가 의를 들어 이에 이르니 그 본의가 단연코 다른데 있지 아니하고 백성들을 도탄 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기 위함인데,안으로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몰아내고자 한다”며 봉기의 취지를 밝히고 네 가지 행동 강령을 제시했다. 이 행동 강령 가운데에 “일본 오랑캐를 내쫓아 성도를 깨끗이 할 것”과 “한성까지 진격해 권귀(權貴)를 진멸(盡減)할 것”이라는 내용이 눈길을 끈다.
이들은 금구 원평으로 나와 관아를 습격해 무기를 빼앗고,부안을 공격했다.전라 감영은 소속 관군과,농민 봉기로 장사에 지장을 받아 불만이 많았던 보부상 연합군을 동원해 토벌 작전에 나섰다. 농민군은 이들을 황토현 고개로 유인해 격파했다. 첫 전투의 승리로 사기가 절정에 달한 농민군은 정읍• 흥덕• 고창• 무장•영광• 함평• 무안• 나주까지 들어가,봉기 한 달 만에 호남 일대를 장악했다.그 무렵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조정에서 내려온 초토사 홍계훈이 전주에 도착했다. 농민군의 위세에 눌린 홍계훈은 정부에 증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청나라 군사를 불러들이도록 건의 했다. 그 사이 홍계훈의 움직 임을 파악하고 있던 전봉준은 황룡강 전투를 승리로 이끈 뒤 ‘호남제일성’이라 불리는 전주성을 점령했다. 그러나 뒤따라온 진압군이 성을 포위하고 서울과 호남의 군사들이 원병으로 몰려들어 농민군은 성에 고립되었다. 또한 정부의 원병 요청에 청나라 군대가 상륙했고,청의 출병을 구실로 일본군도 인천에 상륙했다.
뜻밖의 국면에 전봉준은 정전(停戰)의 조건을 내걸었다. 제시한 개혁안을 수용한다면 전주성에서 물러날 뜻을 밝혔다. 관군도 더 이상 전쟁이 지속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5월 7일 전봉준은 관군과 화약(和約)을 맺고 다음날 농민군은 전주성을 나와 해산했다. 이렇게 성립된 것에 전주화약이다.
이 화약대로 전봉준은 각 지방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고 폐정개혁(弊政改革)을 실시했다. 본래는 관과 민이 협력해 개혁 작업을 진행한다는 취지였지만,실제 고을의 벼슬아치들이 거의 도망가고 없는 상태에서 집강소는 농민들의 자치에 의해 운영되었다. 이것은 우리 역사상 처음 있는 농민 자치였다. 비록 호남 지방과 일부 인근 지방에 한정되기는 했지만, 농민이 자치를 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역사적 사건이다.
그런데 조선에 상륙한 일본은 경복궁을 침범하여 친일개화파 정부를 출범시키고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한편 친일개화파 정부는 농민군이 내건 개혁안의 일부를 반영해 갑오개혁(甲午改革)을 실시하는 등 정국은 급류를 타고 있었다.9월 초 전봉준은 삼례에 직속 부대를 집결시켰다. 이렇게 모인 농민군4,000여 명은 스스로 의병이라 칭했다.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어났다는 의미였다. 전봉준은 다시 일어날것을 촉구하는 통문을 각지방에 보냈다. 이렇게 일어난 각지의 농민군은 다시 전봉준을 대장으로 받들고 손화중과 김덕명에게 총지휘 임무를 맡겼다. 이것을 동학농민운동의 ‘제2차 기병’ 이라고 한다. 이 2차 기병에서는 북접계도 합류해 그 세가 더욱 커졌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군의 화력은 농민군이 넘기에 높은 산이었다. 공주를 공격했다가 몇 차례의 전투를 거쳐 우금치 싸움에서 대패했고,나머지 농민군도 금구 싸움을 마지막으로 진압되기에 이른다.
농민군의 기세가 꺾이자 일본군과 관군은 농민군을 진압한다는 구실로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급격히 위축된 농민군으로는 더 이상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전봉준은 일단 농민군을 해산시킨 뒤 재기병의 가능성을 타진하고자 호남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김개남을 찾아가기로 했다. 가는 길목에 옛 부하 김경천을 만나 반가운 마음에 하룻밤을 머물렀는데 현상금에 현혹된 김경천과 그의 이웃들은 잠든 전봉준을 몽둥이로 쓰러뜨리고 밀고했다.
12월 2일 체포된 전봉준은 일본군에게 넘겨졌다. 체포된 몸일 때에도 그의 태도는 조금도 굽힘이 없어 지방 관리들에게 모두 ‘너’라고 상대했으며,만약 조금이라도 자신의 뜻에 거슬리면 엄하게 꾸짖었다. 또한 살려달라고 하면 일본으로 데려가 원하는 일은 무엇이라도 들어주겠다는 일본군의 제의를 뿌리치고 다섯 차례의 심문 끝에 사형을 선고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고부민란을 주도하기 전까지 지 전봉준의 삶에 대해서는 1855년 전창혁(전기창이라고도 함)과 언양 김씨 사이에서 태어나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하고 한약방을 차려 한의사로 살기도 했다는 것, 등학의 교조신원 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 정도만 알려져 있다. 그가 태어난 곳이 어디이며 그의 출신이 어떠하며 과연 동학교도였는가 또 학교도 였다면 언제 입교했는가,그리고 흥선대원군과 밀약을 맺었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학계에서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만큼 그의 개인적 삶은 어둠 속에 놓여 있다.
평 가 전봉준이 교수형을 당하던 당시 집행총순(執行總巡)이었던 자는 뒷날“나는 전봉준이 처음 잡혀오던 날부터 끝내 형을 받던 날까지 그의 전후 행동을 잘 살펴보았다 그는 세상을 한번 놀래킬 단 한 대위인,대 영걸이었다. 과연 그는 평지돌출로 일어서서 조선의 민중 운동을 대규모적으로 대 창작으로 한 자이니 그는 죽을 때 까지 라도 그의 뜻을 굴치 아니하고 본심 그대로 태연히 간 자이다”라고 회고했다.
개인적 야망이 아니라 “민중을 위해” 일어서 죽음을 앞둔 순간 목숨을 담보로 한 유혹마저 거부한 채 투쟁한 그의 삶은 “민중을 반 침략• 반봉건의 방향으로 각성시킴으로써 이후의 사회변혁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진전에 원동력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매우 앞서 있었던 그의 개혁안은 갑오개혁에 부분적으로 수용되었고,그가 보여준 무장항거정신은 항일의병전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에게 걸었던 백성들의 염원과 기대,안타까움은 한 줄기 노랫가락이 되어 지금까지도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새야 새야 파랑 새야 녹두 밭에 앉지 마라 녹두 꽃이 떨어 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