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그림자-남인수 작사 손로원 작곡 박시춘
一 찾아갈 곳은 못되더라 내 고향 버리고 떠난 고향이길래 주막 등 흐려진 선창가 전봇대에 기대서서 울적에 똑딱선 프로펠러 소리가 이 밤도 처량하게 드린다 물위에 복사꽃 그림자 같이 내 고향 꿈에 어린다
二 찾아갈 곳은 못되더라 내 고향 첫 사랑 버린 고향이길래 종달새 외로 히 떠있는 영도다리 난간잡고 울적에 술 취한 외항선원 담배불 연기가 내 가슴에 날린다 연분홍 비단실 꽃구름 같이 내 고향 꿈이 어린다
池錫永 생몰년도: 1855년(절종 6)-1935년 자;공윤(公胤) 호: 송촌(松村) 활동분야: 의학,학문
생애와 업적 1879년(고종 16) 12월 하순,지석영은 장인에게 종두(種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두 살 된 어린 처남에게 시술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종두를 일본인이 조선 사람을 죽이기 위해 만든 위험한 약이라고 알고 있었던 장인은 그런 독약을 어찌 어린 처남에게 놓느냐”며 반대했다. 그러고는 지석영을 미친 사람 취급하며 다시는 종두에 대한 설명을 들으려고 조차하지 않았다. 지석영이 “장인이 닫지 못하는 미친 사위가 어찌 처가에 머무를 수 있겠냐”며 돌아가려하자 비로소 장인은 처남을 데려와 종두를 시술하게 했다.
초조하고 불안한 3일이 흘렀다.3일이 지나 두포(痘)가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의 기쁨을 지석영은 나의 평생을 통해 볼 때 과거에 합격했을 때와 귀양살이에서 풀려났을 때가 큰 기쁨이었는데 그 기쁨도 이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회고했다. 이때 처가가 있던 충주군 덕산면에서 처남에 이어 친척들과 이웃사람 40여 명에게 실시한 종두가 지석영의 손으로 우리나라 사람에게 실시한 최초의 천연두 예방접종이다.
두창 • 마마라고도 불리던 천연두는 염병이라 불렸던 장티푸스와 함께 가장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천연두에 대해서는 정약용이 《마과회통》을 통해 그 처방법을 정리하는 등한의학의 다양한 처방법들이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는 있었지만,당시까지 예방법은 불완전했다. 그러다 1790년 박제가가 베이징에 다녀오면서 천연두에 걸린 사람에게서 채취한 고름으로 접종하는 인두법(人痘法)을 처음 소개했다 그러나 이 방법은 때로 병독을 확산시킬 우려가 있었다.
1855년 서울 낙원동에서 중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지석영이 종두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은 제너(Jenner,Edward)의《종두법》이라는 책을 접하면서부터이다. 개화시장가인 강위 밑에서 유길준과 함께 공부했던 지석영은 중국의 서양의학 번역서들을 많이 읽었는데,그 가운데 제너가 발견한 우두종두법(牛痘動痘法)이 여러 생명을 구했다는 사질에 주목했다. 우두종두법이란 천연두에 걸린 송아지에서 채취한 고름으로 접종하는 방법을 말한다.
그러던 중 1876년 수신사가 일본에 갈 때 수행원 자격으로 따라간 박영선이 도쿄 순천당의원 의사에게 우두종두법을 배우고 일본인이 쓴《종두귀감》이라는 책 한 권을 갖고 돌아왔다. 박영선은 그가 배운 종두법과 그 책을 제자들에게 강의했는데,지석영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책을 읽고 강의를 들었지만,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런 지석영의 귀에 당시 부산에서 일본 거류민의 치료를 위해 의료행위를 하고 있던 제생의원 원장과 해군 군의관이 종두법을 알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들을 찾아가 2개월간 종두법을 배우고,거기서 두묘와 종두침(種痘針)까지 얻은 뒤에야 비로소 자신감이 생겼다.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들른 처가에서 첫 종두를 실시한 것은 이러한 자신감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실시하기 위해서는 두묘의 제조법을 배워야 했다• 1880년 2차 수신사 길에 수행원으로 직접 따라나선 지석영은 외무성의 주선으로 우두묘의 제조법 등 모든 방법을 완전히 습득하고,서울로 돌아와 이를 시술하면서 서양의술까지 배웠다.
그 무렵 지석영은 개화당의 일원이 되어 있었다. 그는 우두의 실시만 주장한 것이 아니라 나라의 외교는 만국 공법에 따르고 미국• 일본 • 청나라와 폭넓게 교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개화당의 일원이자 일본 의사와 접촉하며 종두법을 수입한 그에게 체포령이 내려졌다. 다행히 몸은 피신했지만 종두장(種痘場)이 군인들의 손에 완전히 불타버렸다. 정국이 안정되자 지석영은 다시 서울에 돌아와 종두장을 부활시켜 계속 종두를 보급했고,전라도와 충청도에도 우두국을 설치해 종두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1885년에는 종두술에 대한 지식을 종합해《우두선설》을 저술했다.
그뒤 갑신정변이 일어나 그의 협조자들이 조정에서 내몰리면서 그의 신변도 위태로워졌다. 그런 가운데 1887년 사헌부의 장령으로 있던 그가 조세 등 국정의 잘못에 대해 신랄하게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자 “박영효가 흉한 음모를 꾸밀 적에 남 몰래 간계를 도운 자이며 우두 기술을 가르친다고 핑계 대고 도당들을 끌어 모았다”는 탄핵을 받아 강진 신지도에서 5년간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그는 다시 교동에 우두보양당을 설립하고 어린이들에게 우두를 실시했다.
정세는 다시 바뀌어 김홍집의 친일개화 정권이 수립되면서 그는 형조참의에 기용되었다.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일본군들이 상륙하던 무렵,그는 다시 대구 감영의 판관으로 임명되었다. 일본어를 잘하는 지석영은 일본군을 인도하여 통역을 맡기도 하고 길 안내를 맡기도 하며 동학농민운동의 토벌에 크게 활약했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동래 부사가 되었다가 동래부 관찰사가 되지만,동학농민운동 토벌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던 그의 행적은 이후 오점으로 남는다.
한편 지석영은 1890년대 후반 독립협회의 주요회원으로 활약하면서, 밀 재배의 경제성을 설파하고 주시경과 함께 한글 가로쓰기를 주장한 선각자 이기도 하다. 한글에 조예가 깊었던 스승 강위의 영향으로 일찍이 한글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국문학교의 설립에 크게 기여했으며,의학교 학생 모집 때에도 국문을 시험과목으로 채택했다. 또한 〈신정국문> 6개조를 상소해 학부 안에 국문연구소를 설치하게 하고 연구위원이 되었으며, 한자를 한글로 해석한《자전석요》를 짓고 정약용의 저술인《아학편》을 한글과 함께 영어로 풀이하여 어린이 교육에도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그 외 국채보상연합회 부소장,대한자강회 평의원,기호흥학회 부회장 등으로 활발한 사회활동도 펼쳤다.
1899년 지석영의 청원에 따라 최초의 관립의학교가 설립되었고 그는 이 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모태라 할 수 있는 의학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설립된 공식적인 서양의학 교육기관이다.1907년 의학교가 대한의원 의육부로 개편되면서 학감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910년 사직했다.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뒤 그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은둔의 삶을 살다 여든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총독부에서 협력을 부탁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고,3'1운동 등 독립운동에도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않았다.
평 가 개화기에 근대화를 위해 헌신한 학자요,종두법을 보급하는 등 각종 전염병 퇴치에 앞장선 예방의학자이자 의학교육자였던 그의 업적은 역사에 오래도록 남아 기억될 것이다. 물론 그 가운데에서도 우두의 보급으로 무수한 사람의 생명을 살린 공이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고종은 그의 공을 인정하여 태극장 팔패장을 내렸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