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謠背景函

기다리겠어요-남인수///安昌浩

bsk5865 2015. 3. 31. 08:30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5.03.31 06:26

 

기다리겠어요-남인수///安昌浩(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7030 

 

 

 




기다리겠어요-남인수


 


기다리겠어요-남인수

작사 손로원 작곡 박시춘


기다리겠어요 불 꺼진 삘딩 앞에 언제나
외로이 홀로 나 혼자 홀로
남 모르게 흘러 젖는 눈물을 씻으면서
달빛을 안고 별빛을 안고
바람을 가슴에다 안고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그대가 돌아오는 그날까지
낯설은 지붕 밑에서 기다리겠어요


기다리겠어요 내 마음 빈틈없이 언제나
그대를 찾는 그대를 찾는
카나리아 울적마다 노래를 부르면서
사진을 보고 얼굴을 보고
그리운 눈동자를 보고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그대가 웃고 오는 그날까지
꽃다발 손에 들고서 기다리겠어요


安昌浩

생몰년도: 1878년(고종 15)-1938년
호:도산(島山)
활동 분야; 독립운동,교육

생애와 업적

1898년 7월 25일 평양 쾌재정에서 만민공동회가 열렸다. 광두 황제(고종 황제) 탄신일을 기념하고 자주독립과 부정부패 척결을 만민에 호소하기 위해 준비된 자리였다. 이 무렵 만민공동회는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개혁정책을 추진하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견고히 할 것들을 결의하는 등 큰 반햐을 일으키고 있었다.

독립협회 관서지부가 개최한 이날의 행사에 연사로 나온 20세의 청년 안창호는 화려한 말솜씨로 탐관오리의 부정부패를 통쾌하게 고발하고 민중의 각성을 촉구함으로써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쾌재정 쾌재정하기에 무엇이 쾌인가 하였더니 오늘 이 자리야 말러 쾌재를 부를 자리올시다” 하는 말로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그는 참석한 군중들이 옳소! 하고 소리치며 박수를 치도록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비판하고,이제부터 잘 살자면 학문을 배워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의 말에“그 넓은 장내는 흐느낌으로 가득 갔고, 곳곳에서 군중들은 팔 소매로 눈물을 씻고 있었다. 그리고 부인들은 머리에 꽂았던 비녀와 손가락에서 가락지를 빼어서 바쳤고,남자들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내어놓았다. 아마도 학교 기부의 일조가 되라고 그 돈을 내어놓는 것 같았다" 지나다가 잠시 쉬면서 연설을 들었던 유기장사 이승훈은 그의 연설에 감동해 학교를 세울 결심을 했고,이후 오산학교를 세웠다고 전한다.

1878년 대동강 하류의 도롱섬에서 태어난 안창호는 한학을 배우다 1895년 상경 해 언더우드(Undelwood, Horace Grant)가 경영 하는 구세학당에서 신학문과 기독교를 접했다. 청일전쟁 당시 주민들이 피난 가고 명승고적들이 파괴되는 것을 목격한 소년 안창호는 우리민족의 불행은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나라와 민족의 힘을 키우기 위해 일생을 바칠 것을 결심했다고 전한다. 그 뒤 독립협회에 가입해 독립협회 평양지회를 설립하는 데 참여했고,또 만민공동회 관서지부를 조직해 경기도•황해도•평안도를 순회하며 민족 계몽과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독립협회 활동을 통해 안창호는 근대화론 과 민주주의 사상을 접하고 자신의 정치 및 사회사상을 키워나갔다. 이후 서울에 올라와서 이상재•윤치호•이승만 등과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독립협회가 강제로 해산되자,안창호는 1899년 고향으로 내려와 강서 지방 최초의 근대학교인 점진학교를 설립하고 교육구국운동을 시작했다.3년간 점진학교에서 교육사업을 하던 그는 교육구국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는 더 큰 공부가 필요함을 절감하고 교육학을 공부하고자 1902년 미국 유학 길에 오른다. 미국으로 가는 뱃길에서 일몰 중에 망망대해에 우뚝 솟은 하와이 섬의 웅장한 모습을 보고 감격해 스스로 지은호가‘도산(島山)’이다.

미국에 도착한 뒤 그는 공부를 하는 한편 비참한 한인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한국인 친목회를 조직하고,이를 기반으로 미주한인 최초의 민족운동단체인 대한인 공립협회를 설립했다. 이 모임을 통해 야학을 개설해 회원들을 교육시키고 《공립신보》를 발행하는 등 교포들의 생활향상 및 의식계몽에 힘썼다.

그러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소식을 들은 안창호와 공립협회 회원들은 일제의 침략행위를 규탄하고 을사5조약을 거부하는 결의문을 배포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또한 국내의 민족운동 계와 각 지역에서 형성된 한인 사회를 기반으로 해외 모든 지역의 독립운동을 연합해 독립전쟁을 수행한다는 원대한 구상을 하고,안창호는 국내에서의 구국운동을 위해 귀국했다. 한편,안창호는 1907년 1월 미국의 리버사이드 시에서 이강•임준기 등과 함께 대한신민회를 발기하고 국내외 모든 한국인을 통일,연합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이 조직은 국내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의 모체라 할 수 있다.

귀국 후 그는 이갑•양기탁•신채호 등과 함께 접촉하며 국내 최대의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를 결성했다. 신민회는“봉건적 구사회사상과 관습을 혁신하고 국민을 유신케 하며,국권을 회복하여 근대적 자유문명국가를 건설함을 목적”으로 다양한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신민회 활동을 펴는 한편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해 독립 애국청년을 양성하고 평양과 대구에 출판기관인 태극회관을,평양에 도자기회사를 설립해 독립운동의 재정적 기초를 마련했다.

그의 여러 활동이 알려지면서 안창호는 당시 민중들에게 큰지지와 존경을 받았다. 당시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이를 이용해 안창호에게 은밀히 청년내각의 조각을 제의하기도 했다.

1909년에는 박중화•최남선•김좌진•이동녕 등과 함께 청년학우회를 조직했다. 안창호는 청년학우회를 통해 무실•역행•자강•충실•근면•정제•용감을 기본 정신으로 하여 한 가지 전문학술이나 기예를 반드시 학습해 직업인으로서 자격을 구비하고,매일 덕•체•지의 수양을 한 가지씩 수련해 민족계몽운동과 구국운동을 이끌어갈 지도자를 양성하고자 했다. 한편 그 해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과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3개월간 복역했다 풀려 나왔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신민회 회원들과 안창호는 망명을 결심했다. 소금 배를 이용해 중국으로 탈출한 그는 칭다오로 갔고,칭다오에 모인 애국지사들은 이른바 칭다오회담 을 통해 독립운동 방침을 논의한 뒤,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그곳에서 러시아 여러 지사들과 국민회 지회 및 학교설립을 의논하고,국권회복을 다짐하는 연설을 통해 동포들의 애국심을 호소했다.

이후 미국으로 다시 돌아간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를 조직하고 《신한민보》를 창간했다. 그리고 1913년 흥사단을 창립했다.

그러던 중 3-1운동 소식을 들은 안창호는 미주 지역을 대표하여 동포들이 모금한 독립자금을 가지고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직을 맡고, 연통제를 수립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무엇보다 그는 상하이와 한성,러시아에 각각 수립된 세 곳의 임시정부를 통합하는 작업을 추진했다. 안창호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세력이 총 단결하고 외국과 동맹을 맺어 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러나 1920년 이후 독립운동 세력의 노선갈등이 복잡해지면서 이들 간의 통합은 더욱 어려워졌다. 안창호의 준비론,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이동휘의 무장독립론으로 나뉘어 있던 임시정부는 끝내 분열되고,1922년 국민대표대회가 개최되었지 만 이 또한 곧 결렬되었다.

1924년 안창호는 중국난정에 동명학원을 설립해 해외에서 유학하려고 하는 학생들에게 준비교육과 민족 관을 가르쳤으며,그 해 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각지를 돌며 미주 흥사단과 대한인 국민회 조직을 지도하고 미주 한인들의 자금을 모금해 상하이로 돌아왔다. 상하이로 돌아온 뒤 북중국과 만주 일대를 둘러보며 이상 촌 후보지를 마련하고,남•북 만주에 흩어진 군사 활동을 통일하여 그것을 중심으로 단결된 혁명 세력인 대독립 당을 결성하고자 했다. 이를 시작으로 민족유일당을 건설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지만,민족운동의 노선이 통일되지 못한 채 이 또한 실패로 돌아갔고,그는 이동녕 •김구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개체는 전체를 위하여,전체는 개체를 위하여’라는 대공주의(大公主義)를 제창했다.

그러다 1932년 윤봉길의 상하이의거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울로 송환된 뒤 1935년 출옥하였다가 1937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와 관련되어 다시 투옥되었다. 그 해 12월 병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다음 해 3월 세상을 떠났다. 망우리에 안장되었다가 1973년 도산공원으로 이장됐다.


평 가

민족의 지도자로,교육자로,독립운동가로 큰 삶을 산 안창호에 대한 연구는 다른 인물들보다 활발히 진행되고 있지만,지금까지 그에 대한 평가는 긍정과 부정으로 갈렸다. 안창호 라는 인간에 대한 접근이나 교육적 측면에서의 접근은 대부분 긍정적이지만,독립운동에 대한 평가는‘지방색과 분파주의의 우두머리”이며 ‘저구문명지상주의 • 비투쟁무저항의 입장에서 실력 양성을 주창하며 치욕의 삶을 살다간 사람”으로 민족운동사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극단의 평가가 내려지기도 했다. 안창호가 주장한 온건한 준비론•실력양성 론이 무장항쟁 론과 대립•갈등했다는 설이 사실처럼 굳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부정적 인식들은 일제의 관헌 자료들에서 시작되었다. 이 자료들은 안창호가 준비론에만 치중하고 독립운동에 전혀 기여하지 않았으며,일제의 식민통치를 인정했고,심지어 독립전쟁을 방해한 개량주의자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들은 안창호가 다양한 노선 사이의 사상적•방법론적 갈등을 극복하고,각 노선 간에 조화롭게 역할 분담을 할 것과 주어진 상황에 맞게 대처할 것을 시종일관 주창했으며,각운동 단체가 갈등을 일으킬 때 노선 간의 갈등을 조정하며 다원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 때문에 극우 극좌주의자들 모두에게 비판 받았지만,그는 사상과 노선을 초월한 대동단결을 끊임없이 추구했다. 또한 안창호는 우리가 직면한 혁명은‘민족 혁명,민중적 혁명’이라고 규정하고,이것의 최종 목표는 일본 제국주의 타도이며 궁극적으로 민족국가건설을 준비해야 함을 분명히 천명한 사람이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이승훈

1864(고종 1)~1930. 독립운동가•교육가. 가난한 서민 집안에서 태어나 학업을 중단하고 유기상점의 점원으로 일하다가 유기공장을 세웠다.1907년 평양에서 안창호의‘교육진흥론’ 강연을 듣고 난 뒤 개인의 영달보다는 민족을 구해야겠다고 결심,신민회에 가담했다. 평양에서 신식교육을 가르치기 위한 강명의숙을 설립하고,이어서 오산학교를 개교하여 교장이 되었다.1911년 105인 사건이 일어나자 주모자로 인정되어 징역 10년을 선고 받고 1915년 가출옥했다. 3. 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다. 1924년 〈동아일보〉사 사장을 지냈으며 다시 오산학교로 돌아와 학교운영에 심혈을 기울이다 세상을 떠났다.


언더우드

미국인 선교사,교육자. 1885년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Gerhard) 목사와 함께 한국에 왔다. 서울 새문안교회를 설립했으며,기독청년회(YMCA)를 조직했다. 1915년 경신학교에 대학부를 개설,연희전문학교로 발전시켰다.1916년 병으로 귀국,애틀랜티시티에서 죽었다.


흥사단

1913년 5월 13일 안창호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한 민족 운동단체. 흥사단의 궁극적인 목표는 민족부흥을 위한 민족의 힘을 기르는 데 있고,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덕(德). 체(體). 지(知)의 3육(三育)을 함께 수련해야 하며,국민모두가 민족사회에 대한 주인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또 국민 개개인이 건전한 인격자가 되기 위해 무실•충의•용감•역행의 4대 정신으로 무장할 것을 주장한다.

흥사단은 독립운동에 직간접으로 참여했으며,1949년 본부를 국내로 이전하고,지금까지 사회교육 등 국민정신과 민족혼을 불러일으키는 일에 전념해 오고 있다.


수양동우회

계몽운동 단체로 1926년 1월에 설립되었다. 표면상으로는 도산 안창호의 사상을 따르는 수양단체였으나 실제는 독립운동단체였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