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집힌 풋사랑-김용임 작사 조명암 작곡 박시춘
一 발길로 차려무나 꼬집어 뜯어라 애당초 잘못 맺은 애당초 잘못 맺은 아 ~~꼬집힌 풋사랑
二 마음껏 울려다오 마음 껏 때려라 가슴이 찢어진들 가슴이 찢어진들 아 ~~못 이겨 갈 소냐
(대사) 발길로 차라구요 꼬집어 뜯으라구요 마음껏 차고 싶고 꼬집어 뜯고 싶어요 누가 당신을 가라고 했소 싫다고 했소 밤거리 사랑이란 담뱃불 사랑 마음대로 피우다가 버리는 사랑 하지만 당신만은 당신 은 아 ~
三 뿌리친 옷자락에 눈물이 젖는다 속아서 맺은 사랑 속아서 맺은 사랑 아 ~~골수에 사무쳐
申采浩 생몰년: 1880년(고종 17)-1936년 호; 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단재(丹齊) 활동 분; 학문 언론 독립운동 다른 이름; 유맹원(劉孟源)/금협산인(金頰山人)/무애생(無涯生) 등
생애와 업적 “역사란 무엇인가?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으로 발전하고 공간으로 확대되는 심적 활동 상태의 기록이니,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가 그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요,조선사라 하면 조선 민족이 이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다"
1931년〈조선일보〉에 연재된 뒤 1948년 단행본으로 출간된 단재 신채호의《조선상고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는 이 책에서 역사의 구성요소를 시(時). 공(空). 인(人)의 세 가지로 파악하고 실증주의적 입장에 서서,과거의 사대주의적 역사관과 일제의 식민사학을 비판했다. 그리고 그 비판 위에서 단군조선 • 부여 • 고구려 중심의 새로운 역사인식체계를 수립했다. 한일합방과 침략을 정당화 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던 일제의 식민사학에 맞서 민족의 혼과 정신을 일깨우려 민족주의 사학의 토대를 세웠다.
《조선상고사》외에도《조선상고문화사》. <독사신론>. <조선역사상 일천 년이래 제일대사건>. <전후 삼한이고〉등을 통해 한국 근대사 학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뛰어난 역사학자였을 뿐 아니라 한 시대의 여론을 주도했던 언론인,그라고 마지막까지 일제와 타협하지 않았던 투철한 독립운동가였다.
신채호는 1880년 11월 7일 충청도에서 몰락 양반의 아들로 태어났다. 여덟 살 때부터 서당훈장이신 할아버지 밑에서 교육을 받았는데,아홉 살 때《자치통감》 전체를 해독했고,열두세 살 때는 사서삼경에도 통달하는 등 공부를 매우 잘하여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1898년 가을,다양한 책들을 빌려주며 근대학문으로 이끌어주던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한 그는 그 해 독립협회에 가입해 활동하다 체포되기도 하는 등 성큼성큼 역사의 급류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에는 고향으로 내려가 신규식 등과 함께 문동학원과 산동학원을 설립해 신학문을 가르치고 한글을 보급하는 등 교육운동에 뛰어들었다.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되었지만 거절하고,1904년 작성했던 항일성토문을 계기로〈황성신문〉사에 논설위원으로 입사해 언론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날을 목놓아통곡한다〉는 장지연의 논설이 문제가 되어 곧〈황성신문〉이 무기정간 되자 이듬해〈대한매일신보〉로 자리를 옮겨 언론 활동을 계속 했다. <일본의 삼대 충노). <친구에게 주는 절교서).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등의 글을 통해 친일 매국노들의 반민족행위와,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일본 제국주의의 원조를 받을 수도 있다는 근대화 지상주의자들의 주장을 부정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할 것을 주장했다.
그 무렵 신채호는《이태리 건국 삼걸전》을 번역하고,《을지문덕》.《이순신전》.《최도통전》 등의 책을 집필하여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민족의 영웅이 출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바라는 영웅은 민족의식과 애국사상으로 철저하게 무장한 인물이었다.
그 외에도 대한협회 • 신민회 • 국채보상운동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다,1910년 “한국이 비록 약하나 일본의 노예로 오래 살지는 않을 것이며,일본의 무력이 아무리 혁혁해도 한인의 마음속에는 일본을 무시해 대항할 마음은 있으되 굴종할 뜻은 없으므로 하늘이 문어지고 땅이 갈라져도 일본에 대한 감정은 갈아 없어지지 않는다’는 〈한일합방논자들에게 고함〉이라는 글을 마지막으로 신문에 실은 뒤 신민회 간부들과 함께 중국 망명길에 오른다. 어려워진 국내에서의 독립활동을 접고 국외로 나가 독립운동의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서였다. 칭다오회담에 참가한 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간 그 는〈해조신문> . <청구신문> . <권업신문> . <대양보〉 등의 발행에 참여하며 항일운동을 계속해나갔다.
1913년 신규식의 초청으로 상하이에 가서는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해 활동하고 박달학원을 세워 재중 동포 자녀들에게 독립의식을 키워주었으며 1915년 다시 베이징으로 옮겨 신한 혁명단에 참가했다. 이 무렵〈꿈 하늘〉이라는 소설을 통해 “외교를 의뢰하여 국민의 사상을 약하게 하는 놈들은 댕댕이 지옥에 두어야 하며,의병도 아니요 암살도 아니요 오직 할 일은 교육이나 실업 같은 것으로 차차 백성을 깨우자 하여 점점 더운 피를 차게 하고 산 넋을 죽게 하는 놈들은 어둥 지옥에 가야 한다면서 외교독립론과 실력양성론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이듬해 고조선 • 고구려 • 발해의 옛 땅인 남만주 일대와 백두산,광개토대왕릉 등을 답사한 것을 기반으로《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등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당시까지 신채호의 민족주의는 힘에 의한 독립을 모색했으며,독립을 넘어 강자인 한국을 추구했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그의 사상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한다는 생각을 부정하고, 모든 민족과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공존하는 대등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 아래 민족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방향으로 변화한다. 이동휘 • 이상룡 • 이승만 • 박은식 • 신규식 등과 함께 1919년 2월 서명하고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에서 그 변화는 확연히 들어난다.
이렇듯 적자생존과 의f육강식이 주장하는 힘의 논리를 부정하면서 신채호는 점차 무정부주의로 기울어갔다. 3•1운동 과정에서 민중들의 폭발적인 힘을 확인한 뒤 영웅주의적이던 사관을 버리고 민중을 민족해방운동의 주체로 인식하기 시작했으며,임시정부에 실망하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무정부주의를 수용했다. 그는 이승만의 외교 노선이나 안창호의 준비론을 대체할 새로운 방법으로 무정부주의에 입각한 민족해방운동론을 폈다.1920년대 이후 신채호에게는 민족해방운동이 곧 민중해방운동이고‘무정부주의 운동이었다. 즉 그가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한 것은 민중을 일제의 강압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었지,민중을 수탈하는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1922년 의열단 선언인〈조선혁명선언〉을 통해 그는 테러 활동이 매국노나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복수의 감정으로 처단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해방운동의 주요한 방법론임을 천명했고,폭력에 의한 민중직접혁명을 주장했다.
무정부주의동방연맹대회에 참여한 뒤 한국인 아나키스트 대회를 개최하면서 그는 베이징 교외에 폭탄과 총기 공장을 건설하고 적의 기관을 파괴할 것을 결의했다. 또 선전기관을 설치하고 선전문을 인쇄해 세계 각국에 발송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기관지를 발행할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외국 돈을 위조하다가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10년형을 선고 받았다. 뤼순 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신채호는 고문과 오랜 감옥 생활로 악화된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1936년 2월 21일 옥중에서 삶을 마감했다.
평 가 1936년 순국한 이후 신채호의 이론과 학설에 대한 평가가 시작되었다. 그 해 2월〈조선역사학의 선구자인 신단재학설의 비판〉이라는 글이〈조선일보〉에 연재되었으며,4월〈조선사학의 선구자신단재학설 사관〉이라는 논문이《조광》이라는 잡지에 게재되었다. 그 뒤 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광복이라는 급류로 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광복 이후 북한에서는 선채호를 “부르주아적 애국계몽가이며 역사가 , ‘자대주의적 역사관을 반대하여 투쟁한 계몽사가 등으로 평가하는 연구논문들이 발표된 반면,남한에서는 신채호와 정적 관계였던 이승만이 대통령의 자리에 있는 동안에는 그에 관한 연구와 추모사업이 어려웠다.
처음 발표할 당시 일제의 식민사학지들에게 황당무계하고 비과학적인 주관론일 뿐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그의 연구 결과들은 광복후에 새로 발견된 유적과 금석문을 토대로 한 연구에서 비로소 그 정확성과 선견지명,정당성을 인정받았다. 반면,지나치게 민족주의적으로 접근한 탓에 그의 역사이론 및 고대사 인식에서 독단적이며 교조적인 면을 배제할 수 없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민족주의자로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로,일제의 지배에 평생 온몸으로 저항하다가 마침내 일제의 박해 속에 옥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민족사관을 수립,한국 근대사학의 기초를 확립한 그는 이론과 실천면에서 모두 투철했던 혁명가이다.
장지연 1864~1920 언론인 1901년〈황성신문〉사 사장이 되었고,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 신문에〈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사설을 썼다. 이로 인해 3개월간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이후에도 대학자강회 등을 조직해 구국운동을 벌였으나,한일합방 후에는 변절하여 친일의 길을 걸은 것으로 최근 밝혀졌다.
동제사 1912년 중국 상하이에서 신규식 등이 국권회복운동을 위해 조직한 단체를 말하며,재상해한인공제회(在上海韓人共濟會)라고도 한다 이사장에 신규식,총재에 박은식,그밖에 김규식 • 신채호 • 조소앙 • 홍명희 • 문일평 • 윤보선 • 여운형 등이 관여했으며,회원은 300여 명에 달했다. 1922년 신규식의 죽음을 전후한 시기에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