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謠背景函

고향의 그림자-남인수///韓龍雲

bsk5865 2015. 4. 21. 08:27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5.04.21 06:39

 

고향의 그림자-남인수///韓龍雲(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7132 


고향의 그림자-남인수


고향의 그림자-남인수

작사 손로원 작곡 박시춘


찾아갈 곳은 못되더라 내 고향
버리고 떠난 고향이길래
주막 등 흐려진 선창가
전봇대에 기대서서 울적에
똑딱선 프로펠러 소리가
이 밤도 처량하게 드린다
물위에 복사꽃 그림자 같이
내 고향 꿈에 어린다


찾아갈 곳은 못되더라 내 고향
첫 사랑 버린 고향이길래
종달새 외로 히 떠있는
영도다리 난간잡고 울적에
술 취한 외항선원 담배불
연기가 내 가슴에 날린다
연분홍 비단실 꽃구름 같이
내 고향 꿈이 어린다


韓龍雲

생몰년도: 1879년(고종 16)-1944년
호; 만해(萬海)/만해(卍海)
활동 분야: 종교,문학,독립운동
다른 이름: 한정옥(韓貞玉)/한유천(韓裕天)

생애와 업적

만해는 중이냐?
중이 아니다.
만해는 시인이냐?
시인도 아니다.
만해는 한국 사람이다. 뚜렷한 배달민족이다.
독립지사다. 항일투사다.
강철 같은 의지로 불덩이 같은 정열로 대쪽 같은 절조로
고고한 자세로 서릿발 갚은 기상으로
최후일각까지 몸뚱이로 부딪쳤다.
마지막 숨 거들 때까지 굳세게 결투했다…….


한용운을 추모하며 쓴 시인 조종현의 시는 그의 삶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민족운동가,불교사상가,시인의 삶을 살았던 한용운은 조선의 국운이 기울어가던 1879년 8월 29일 충청도 흥주에서 한응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이름은 유천(裕天)이었다. 성장기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 없으나 어렸을 때부터 한학을 공부했는데,신동이라 인근에까지 칭찬이 높았다고 한다. 장가를 들고 서당의 훈장을 하며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당시의 격변하는 세상은 남보다 피가 뜨거운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이 일어난 1894년 그는 집을 떠나 입산한다.

처음부터 출가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지금 이렇게 산골에 파묻힐 때가 아니구나 하는 결심을 품고 어떤 날 아침 담뱃대 하나만 들고 서울 길에 오르기 시작했다”라는 그의 회고담에서 알 수 있듯이 처음엔 서울이 목적지였다. 그러다 “에라,인생이란 무엇인지 그것부터 알고 일하자 는 결론을 얻고 서울 가던 길을 버리고 강원도 오대산의 백담사에 이름 높은 도사가 있다는 말을 듣고 여러 날 동안 산골 길을 따라 그곳으로 갔었다”라고 그는 회고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설악산에서 불교 승려로 변신,불교 공부를 시작했다. 두 번째 목적지였던 백담사도 아닌 오세암에서 불목하니 노된 그의 학문은 산중에서 아무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다. 그의 학문적 정열은 불교를 넘어서 서양의 종교철학과 세계지리에까지 닿았고,비록 몸집은 작으나 어릴 때부터 담력이 크고 모험심이 강했던 그는 조선 이외의 넓은 천지 땅을 직접 밟아보고자 세계일주 여행길에 오른다.

그러나 블라디보스토크 항에 도착하자마자 일진회 회원으로 오인되어 죽을 고비를 넘긴 뒤 귀국해야 했다. 세계여행을 포기하고 서울로 와 일본여행을 시도해봤지만 이도 여가 치 않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시 입산한 한용운은 1905년 백담사에서 정식으로 불교에 입문한다.

1908년 한용운에게 다시 한번 일본여행의 기회가 왔다. 약 반년 동안 일본 불교계와 사회를 둘러보며 견문을 넓히고 일본의 승가대학 조동종대학에서 당시 일본의 지식인 들을 휩쓸었던 서양철학을 청강하기도 하고 불교강의도 들었다. 조동종은 한국의 승려에게 자신들의 정신을 주입하고 조선불교를 조동종에 편입시키려 했지만,한용운은 이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일본에서 만난 최린과의 교우는 그를 3 •1운동으로 이끌었다. 일본에서 돌아오는 한용운의 짐에는 측량기계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조선 땅으로 들어오는 일본인들의 손에 하나같이 들려 있던 이 측량기계가 토지수탈의 도구가 되는 것을 보고 측량기계를 하나 사서 돌아온 뒤 측량강습소를 개설하고 사찰이나 개인 소유의 토지를 수호하는 데 앞장섰다는 일화가 전한다.

나라를 빼앗기는 아픔을 겪으면서 울분을 토하던 한용운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조선의 불교를 개혁하는 데 있다고 판단,《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한다. 불교 중흥에 대한 그의 이론과 실천을 망라한 이 책은 염불당(念佛當) 타파,승려의 결혼 합법화 등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는 부분도 있지만,종단행정의 단일화,승려 자질의 향상, 국역의 중요성 등을 강조한 부분 등은 오늘날에도 귀감이 될 만한 역작이다. 이 책은 또한 그 당시 불교계가 보여주던 종교적 친일행위에 대한 반발과도 연결된다. 당시 해인사 주지로 있던 이회광은 일본 조동종과 연합맹약을 체결하고 한국 불교를 일본 불교의 지배 아래 둘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이에 한용운은 1911년 승려대회를 주도하여 종문난적(宗門亂賊)으로 이회광을 몰아내는 데 앞장섰으며,한일불교동맹조약을 분쇄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런 뒤 범어사에 임제종(臨濟宗) 종무원을 설치하여 33세의 젊은 나이에 임제종 관장서리에 취임했다. 그러나 총독부가,모든 사찰의 주지와 재산에 관한 권한은 총독이 가진다는 ‘조선사찰령’을 반포하자 망국의 비애를 안고 만주로 발길을 돌린다. 만주에서 그는 이시영 • 김동삼 • 박은식 • 이동녕 등을 방문하고 이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고국으로 돌아온 한용운은 불교 대중화를 위해 양산 통도사에서 그 방대한 팔만대장경(영인본)을 모두 열람하며《불교대전》을 편찬했다. 이 책은 재래식 장경 위주의 편찬 방법에서 벗어나 주제별로 엮어진 최초의 책이다. 또한 조선총독부의 무단정치로 눈과 귀가 막힌 민중들을 위해《유심》이라는 불교 잡지를 창간하여 청년들에게 용기와 신념을 잃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러던 중 미국 대통령 윌슨(Wilson,T. Woodrow)의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자 그의 가슴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3 • 1운동에 참가하여,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에 마지막 행동강령인 공약 3장을 넣고, “이제 우리는 조선의 독립을 선언했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 는 축사와 대한독립 만세 세번을 선창한 뒤 마포경찰서로 잡혀갔다 3,1운동을 전후해서 보여준 그의 열정과 의지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었으며,그런 의미에서 3 •1운동은 한용운을 가장 한용운 스럽게 만들어준 사건이었다. 이상재와 손병희를 설득하고,가짜 육혈포를 꺼내 들며 운동자금을 확보하는 등 여러 사람들에게 혹시 일제의 밀정이 아닌가 의심받을 만큼 정열적으로 활동했다.

그의 이러한 의지는 옥중에서 더욱 빛났다.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조선총독부가 극형으로 엄벌할 것 이리는 풍문이 떠돌자 다른 민족대표가 “이렇게 갇혀 있다가 그대로 죽는 것은 아닐까” 염려했다. 그러자 갑자기 한용운이 그에게 감방 안의 똥통을 들어서 퍼부으며 외쳤다. “이 비겁한 인간들아. 울기는 왜 울고 뉘우치기는 왜 뉘우치느냐. 이것이 이른바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했다는 민족대표란 말이냐! 이따위 추태를 부리려거든 당장에 취소해버려라'" 또한 자신은 변호사를 대지 않고,사식을 받지 않으며,보석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옥중투쟁 3대원칙을 정하고는 몸소 실천에 옮겼다.

취조를 당할 때에도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하루는 재판장이 피고는 왜 말이 없냐고 다그치자 조선인이 조선민족을 위하여 스스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백 번 마땅한 노릇인데 일본인이 어찌 감히 재판하려 하느냐 고 호령하며 피고는 금후에도 조선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육신이 다하면 정신만이라도 남아독립운동을 할 것이다’라고 당당히 대답했다. 또한 그는 할 말이 많으니 종이와 펜을 달라고 하여 그 유명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라는 제목으로 조선독립 이유서를 써 내려갔다. 이 글에서 그는 탁월한 식견과 정연한 논리로 조선독립의 목적을 주장하면서 일본 군국주의를 준엄하게 꾸짖고 일본도 독일처럼 반드시 패망의 쓴 잔을 마실 날이 올 것이라고 확언했다. “능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천하를 뒤흔들고 있다”는 칭송을 들었던 그는 당시 최고형 이던 3년 징역의 유죄 선고를 받고 복역 중 1년 6개월 만에 풀려 나왔다. 출감 이후 그는 비록 일제에게는 시찰대상의 정치범이었지만,우리 민족에게는 민족주체의 확인 자’가 되어 있었다.그는 이후 많은 강연을 하며 자유 • 평등 • 독립 사상을 고취시켰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활동에 많은 제의ε을 받게 되자 다시 설악산 오세암으로 돌아가 책 속에 파묻혀 지내던 중 우리의 모국어로 깨달음의 경지를 노래한 것이 시집 《님의 침묵》이다. 이 시집에 대해 서울대학교 송욱 교수는 “신문학은 한문과 작별하여 모국어로써 표현된 것이 특정이다. 그러나 신문학은 한문과 함께 사상까지 작별하고 말았다. 신문학사 전체를 통해서 오직 하나의 예외는 시집 《님의 침묵》이 있을 뿐이다”라는 극찬을 한바 있다.

한용운은 그후 다시 서울로 돌아와 집필 활동,강연과 불교운동으로 분주했지만,여전히 정치 활동의 자유는 박탈당한 채였다. 그런데도 신간회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60세 때 그가 직접 지도해오던 불교 계통의 민족투쟁비밀결사단체인 만당 사건(卍黨事件)이 일어나 여러 후배,동지들과 함께 고초를 겪기도 했다.

한편《불교》라는 잡지를 인수하여 고루한 전통에 안주하는 당시의 불교계를 통렬히 비판하고,승려의 자질향상,기강확립,생활불교 등을 제창했으며,신문에 장편소설을 연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다 1944년 5월 9일 말년에 마련한 거처 성북동 심우장에서 중풍으로 눈을 감았다.


평 가

《조선불교유신론》의 문장을 보고 한말의 학자인 김윤식은 “문체로 보나 사상으로 보나 근세에 짝을 찾기 어려운 글”이라고 극찬했으며,정인보는 “인도에는 간디가 있고, 조선에는 만해가 있다. 청년들은 만해 선생을 본받아야 한다”고 했다. 또한 벽초 홍명희는 ‘7,000 승려를 합하여도 만해 한 사람을 당하지 못한다. 만해 한 사람을 아는 것이 다른 사람 만 명 아는 것보다 낫다”고 평하며 존경의 마음을 표시했다.

반면,《한용운 평전》의 저자 고은은,부모님의 뜻에 따라 일쩍 결혼한 뒤 얻은 처와 아들을 평생 돌보지 않았던 것이며,그의 곁을 보필했던 한 여인과의 인연,그리고 불교 교단의 계율을 무시하던 행동들,또한 최남선을 질투하던 모습들을 묘사하며 그가 ‘너무 우발적이었으며 너무 헤프게 움직였”고, “입산과 하산의 되풀이로 살아온 기인”이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렇다 해도 그가 3• 1운동과 투옥 생활에서 보여준 열정과 의기는 “한용운의 삶이 가질 영원한 긍지”이며, 한용운은 “근대 한국 최대의 전인적 규모의 사상가 • 예술가 • 실천가’였다고 인정했다.


민족대표 33인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서른세 명의 종교지도자들을 일 걷는다. 천도교 측으로는 손병희,권통진(權東鎭),오세창,임예환(林禮煥),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박준승(朴準承), 양한묵(梁漢默),권병덕(權秉悳),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煥),이종훈(李鍾勳),홍병기(洪秉箕),이종일,최린(崔麟) 등 15명이 선정되었고,기독교 측에서는 이승훈,박희도(朴熙道) ,이갑성(李甲成),오화영(吳華英),최성모(崔聖模),이필주(李弼柱),김창준(金昌俊),신석구(申錫九) ,박동완(朴東完),신홍식(申洪植),양전백(梁甸伯),이명룡(李明龍),길선주(吉善宙),유여대(劉如大),김병조(金秉祚),정춘수(鄭春洙) 등 16명이 선정되었다. 불교 측 대표로는 한용운과 백용성(白龍城)이 서명했다. 이들은 3월 1일 거사 당일 독립선언식의 거행장소였던 탑골 공원이 아니라 종로에 있던 태화관이라는 요리 집에 모여(33명 가운데 29명 만 모였다),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학생 대표가 찾아와 만세시위를 직접 주도할 것을 청했지만,우발적인 폭력시위가 일어날 것을 우려하며 거절했다. 이어 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독립을 선언한 사실을 고하고 지수한 뒤 모두 잡혀갔다. 뒷날 이들 가운데 최린,박희도,이갑성,정춘수 등은 변절했대;


이상재

1850~1927. 한말의 정치가 • 사회운동가.1881년 박정양이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갈 때 그의 수행원이 되어 함께 일본에 갔다. 그때 동행했던 홍영식 • 김옥균 등과 깊이 사귀었다 1887년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에 임명되자 그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1등 서기관으로 근무했으며,갑오개혁 후 의정부 총무국장이 되었다. 서재필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부회장이 되어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다. 1902년 개혁당 사건으로 3년 동안 복역하면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헤이그 특사 사건에 관련되어 관직에서 물러났으며,3 . 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교섭을 받았으나 참가를 거부했다• 1923년 소년연합척후대 초대 총재가 되고,1927년 신간회 초대 회장에 추대되었으나 병으로 사망했다.


신간회

1927년 2월 ‘민족 유일당 민족협동전선’ 이라는 표어 아래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제휴하여 창립한민족운동단체이다.

신간회는 민족적 • 정치적 • 경제적 예속의 탈피,언론 • 집회 • 결사 • 출판의 자유의 쟁취,청소년 • 여성의 평형운동 지원,파벌주의 • 족보주의의 배격,동양척식주식회사반대,근검절약운동전개 등을 활동목표로 삼아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1930년에는 전국에 140여 개의 지회 와 3만 9,0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했다.그러나 일제의 탄압과 내부좌우익의 갈등으로 4년 만에 해산되었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