織部川恋歌-真咲よう子 作詩 伊藤節子 作曲 井川裕多加 編曲 水谷高志
一 忘れられない 一輪ざしが せともの祭りの 想い出か 風の音さえ 淋しげに あなた恋しい 織部川 瀬戸は日暮れて 恋唄つづり
二 流れる霧が ふもとの窯を そっとつつんで 明日を待つ あれがやさしい あなたなら 早く来てよと 織部川 瀬戸はたそがれ 恋唄模様
三 赤津のふところ 振り向くたびに 想い出いくつも 遠ざかる はぐれ女の 淋しさを 忘れさせてと 織部川 瀬戸はしぐれて 恋唄つづり
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離別한 님 梨花雨 흩날릴제 울며 잡고 離別한 님 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는가 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朝鮮 時代 代表的 女流詩人 重에 閨秀詩人으로는 許蘭雪軒을 이야기하며 妓女詩人으로는 黃眞伊와 梅窓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李梅窓이 漢陽에서 扶安에 놀러 왔던 선비와 눈이 맞아 죽을 때까지 몸과 마음을 바쳐 서로를 사랑했던 戀人 劉希慶을 그리워하며 읊은 代表的인 作品으로 이때 一般人들은 想像하기조차 하지 못 할 28歲나 差異가 나는 사랑이었습니다.
유화홍염잠시춘(柳花紅艶暫時春) 버들꽃 붉은 몸매도 잠시동안 봄이라서 달수난의옥협빈(撻髓難醫玉頰嚬) 고운 얼굴에 주름지면 고치기 어렵다오 신여하감고냉 (神女下堪孤冷) 선녀인들 독수공방 어찌 참으리 무산운우하래빈(巫山雲雨下來頻) 무산에 운우지정 자주 내리세
멋드러진 이 글은 村隱 劉希慶이 邊山 3節로 꼽히는 扶安의 名妓 李梅窓과 한창 깨가 쏟아지는 好時節에 眞情한 사랑을 실어 지어준 노래입니다.
李梅窓은 邊山의 絶景인 彩石江과 이 고장詩人 辛夕汀(1907~1974)과 더불어 扶安 3節로 자랑하는 代表的인 女流 詩人입니다 開城의 名妓하면 黃眞伊를 말하고 扶安에 名妓하면 李梅窓을 말합니다. 李梅窓은 妓生으로서 文筆家로서 한 時代를 風靡했던 女人으로 朝鮮 宣祖6年에 官衙의 衙前인 李湯從이라는 사람의 딸로 태어났는데 癸酉年에 태어났다고 하여 癸生 癸浪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나 妓生이 되면서 雅號를 蟾初(섬초)라 했다가 스스로 梅窓이라 바꾸어 부르게 되었습니다.
梅窓이 成長하여 姿態와 몸매가 남다르게 아름다운데다 詩를 잘 짓고 노래를 잘하자 所聞을 듣던 고을의 太守 徐進士라는 사람이 太守의 權力을 앞세워 梅窓의 貞操를 빼앗은 다음 곁에 두고 喜喜樂樂 거리다가 서울로 發令이 나자 마지못하여 梅窓도 서울로 함께 따라 갔으나 무엇이 如意치 않았는지 얼마 되지 않아 扶安으로 다시 내려와 이때부터 妓生으로 變身합니다.
梅窓이 黃眞伊처럼 風流를 잘하게 된 動機는 書堂 개 三 年이면 風月을 읊는다는 俗談처럼 집안이 가난하여 아버지가 生計를 維持하기 爲해 訓長 노릇을 할 때 이곳 저곳 書堂을 따라 다니면서 귀동냥으로 배웠다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살은 물이 되고 뼈는 흙이 되며 性質은 불이 되고 意識은 바람이 되고 結局 남는 것은 因緣과 價値뿐이라는데 道德이 무엇이고 墮落이 무엇인지 모든 罪惡은 所有하고자 하는 欲心 때문입니다 아무렴 東西古今을 通하여 色慾이라는 欲心은 欲心이라기보다 하나의 本能이라고 보아야 옳을 것 같습니다.
梅窓이 劉希慶과 헤어져 扶安에서 시름할 때 當代의 風雲兒 許筠이 목주 牧使職을 罷職 當하고 朝廷에 對한 鬱憤을 삭이며 扶安에 내려옵니다. 그때 扶安의 名妓 李梅窓과 精神的인 사랑을 즐겼으나 함께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行跡으로 보아 정말로 그랬을까 하는 마음이 든다고 歷史는 記錄하지만 아무튼 許筠은 李梅窓과는 精神的인 사랑을 나누면서 우리나라 最初의 한글 小說이요 民衆小說인 洪吉童傳을 執筆하였습니다.
梅窓은 賤待받는 妓生의 身分이었지만 物質의 豊饒보다 精神的 價値를 貴重하게 여긴 詩人으로 言行이 操身하고 淨潔했으며 貞節이 굳은 模範的인 女性이었으나 38歲의 젊은 나이에 病들어 죽었는데 病席에 누워 있을 때도 許筠이 몸조리 잘하라는 慰安의 便紙를 보내는 等 恪別하게 보살펴 준 사람으로 後世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널리 알려져 있는 人物은 아니나 黃眞伊와 버금가는 女流詩人임에는 틀림없습니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