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謠背景函

울며 헤진 부산항-황금심.백설희/// 六堂 崔南善

bsk5865 2015. 4. 20. 15:42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5.04.20 06:17

 

울며 헤진 부산항-황금심.백설희/// 六堂 崔南善(D)|★....演歌 게시판

黃圭源  http://cafe.daum.net/enkamom/KTiH/7128 


울며 헤진 부산항-황금심.백설희


울며 헤진 부산항-황금심.백설희

작사 추미림 작곡 박시춘


울며 헤진 부산항을 돌아다보며
연락선 난간머리 으스름달 빛
이별만은 어렵더라 이별만은 슬프더라
더구나 정들인 사람끼리 사람끼리


등대아래 끼륵끼륵 물새만 날고
부산항 아가씨야 날 보내다오
이별만은 외롭더라 이별만은 바보더라
더구나 외로운 사람끼리 사람끼리


六堂 崔南善

생몰년도: 1890년(고종 27)-1957년
자: 공륙(公六)
호: 육당(六堂)/한샘/남악주인(南嶽主人)/곡교인(曲橋人)
활동분야; 문학,역사학
다른 이름; 창흥(昌興)

생애와 업적

제군! 대동아의 성전(聖戰)은……. 세계 역사의 개조이다. 바
라건대 일본 국민으로서의 충성파 조선 남아의 의기를 발휘하여
한 사람도 빠짐없이 출진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1943년 11월 20일자〈매일신보〉에 실린 최남선의 글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기초했던 사람이 쓴 글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소년》이라는 잡지를 만들어 우리나라 최초의 신체시인〈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는 등 한국 근대문학을 이끌었던 계몽운동가였고,단군조선을 비롯한 민족의 상고사(上古史)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던 근대 사학계의 큰 별, 최남선. 그러나 그의 삶은 “짧은 애국,긴 매국”으로 요약될 수 있다.

관상감 기사로 근무하면서 한약방을 경영했던 최헌규의 3남3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 한글과 한문을 깨쳤으며,1902년 경성학당에 입학해 일본어를 익혔다. 그리고 1904년 황실 유학생으로 뽑혀 일본에 건너가 동경부립 제일중학교에 입학했다가 석 달 만에 자퇴하고 귀국한 뒤 다시 1906년 사비로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몇 개월 안 돼 학교에서 개최한 모의국회에서 경술국치문제를 의제로 내걸자 격분한 다른 유학생들과 함께 자퇴하고 귀국했다.

인쇄기를 구입해 귀국한 뒤,이듬해인 1907년 열여덟의 나이에 출판사인 신문관(新文館)을 창설했다. 신문관을 통해 민중을 계몽 교도하는 내용의 책을 출판하기 시작했고. 1908년 최초의 근대적 종합잡지인《소년》을 창간해 소년들의 개화,계몽하려 했다. 이 《소년》의 창간호에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실렸다. 《소년》이 폐간되자《붉은 저고리》. 《아이들 보이》. 《새별》. 《청춘》 등의 월간지를 계속 발행하며 계몽운동에 힘쓴 최남선은 계몽주의를 추구하던 민족주의자였다. 그런 그의 삶의 방향이 180도 바뀐 것은 3•1운동 직후부터이다.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여 일약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떨친 그는 1921년 10월까지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무시무시한 고문과 죽음에의 공포를 맛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뒤에는 달콤한 회유가 이어졌을 것이다 최남선은 이 유혹을 물리치지 못했다.

가출옥한 직후 그는 일본의 아베라는 자에게 편지를 보낸다. <경성일보〉 사장을 지낸 아베는 해군대장 출신으로 당시 조선 총독으로 있던 사이토의 조언자로 꼽힐 만큼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아베에게 “선생께서 주신 책을 읽고 시대의 추세를 파악하게 되었다”며 “금후에도 선생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면서《동명》이라는 잡지를 창간하고 싶다고 부탁했다.1922년 창간된 주간지《동병》이 친일적인 성격을 띠었음은 물론이다.

최남선이 본격적으로 지탄받기 시작한 것은 1928년 조선총독부의 역사기관인 조선사편수회 편수위원직을 수락하면서부터이다. ‘조선과 일본이 결국은 같은 뿌리이다’ 라는 주장을 하며 조선과 동아시아 역사를 왜곡하던 조선사편수 회에 그가 참여하자,한용운은 살아 있는 최남선의 초상을 치러 그가 정신적으로 죽었음을 선언했고,정인보는 “육당이 죽었다”며 통곡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1938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와 만주의 어용신문이라 할 수 있는〈만몽일보〉의 고문을 거쳐,일본관동군이 만주에 설립한 건국대학 교수로 부임하며 친일 행보를 걷는다. 그뿐 아니라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조선 청년들을 향해 학도병에 지원 입대하라며 참전을 독려하는 연설을 하고 글을 쓴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친일행위이다.

또한 학자로서 최남선은 단군을 연구하며 그 연구로 일제의 ‘내선일체론’ 에 협력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최남선은 자신의 단군 연구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불함문화론〉이 일본과 조선의 정신상의 장기전에 대비하여 국조신앙(國祖信仰)을 우리의 정신적 지주로 확립하려 했던 것이라고 주장하지만,조선과 일본이 비록 혈통적으로는 같지 않으나 문화적으로는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는 이 글은 내선일체와 일선향조에 닿아있다고 비난 받는다.

광복 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마포형무소에 수감된 최남선은 일종의 자백서라 할 수 있는〈자열서 自列書〉를 통해 자신의 행위를 변호했다• <자열서〉에서 최남선은 자신의 행위는 변절이 아니라 단순한 ‘방향전환’ 에 지나지 않았고 그 이유가 단지 ‘돈’ 때문이었다고 변명한다.

또한 자신의 죄과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며 무죄를 주장한 뒤 “나는 분명히 한평생 한 일을 한마음으로 매진했다고 자신한다. 조선사 편수회 위원,중추원 참의,만주괴뢰국 건국대학 교수,이것저것 구중중한 옷을 연방 갈아입었으나 나는 언제나 시종일관하게 민족정신의 검토,조국역사의 건설,그것 밖으로 벗어난 일이 없다”며 자신의 행위를 옹호했고,나는 의사(義士)가 되기보다 학자가 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학자보다 의사가 되라는 일반의 기대를 저버렸다”고 주장했다.

사실 학자로서 그는 문학과 역사학 양쪽에서 매우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먼저 문학에서 그는 이광수와 함께 신문학의 선구자이자 계몽주의 문학의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데,《소년》.《청춘》 등을 통해 서양의 고전이나 시를 소개하여 한국 근대문학에 새로운 방향을 제공한 점,그리고 여러 논문과 한국 문학사상 최초의 창작 시조집인 《백팔번뇌》를 펴내는 등 시조의 현대적 계승과 발전에 힘쓴 점,〈백두산근참기) . <금강예찬〉 등 기행수필을 통해 조선의 자연과 조선정신을 드러낸 수필문학분야에 공적을 남긴 점, 한문투나 문어체를 우리말투로 바꾸는 문체변혁을 시도한 점 등이 그의 업적으로 꼽힌다.

또한 역사학에서는 우리 역사의 시작을 단군신화에서 찾고,마운령 진흥왕 순수비를 발견해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등 실증적으로 고대사를 연구한 점,《동국세시기》.《열하일기》.《삼국사기》.《춘향전》.《사씨남정기》 등의 옛 문헌이나 고전문학 작품을 출판해 널리 보급시킨 점 등을 들 수 있다.

최남선은 병 보석으로 출감한 뒤 다시 동명사를 설립해 책을 펴내고 서울시사편찬위원회 고문을 역임하는 등 활동하다가 1957년 필생의 사업인《조선역사사전》을 집필하던 중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평 가

시인 • 수필가로서의 문학적 업적과 계몽주의와 민족주의를 견지한 사상가 • 출판인으로서의 공헌,조선의 상고사를 재건하려는 역사학자로서의 노력 등 다방면에 걸쳐 뚜렷한 자취를 남긴 것은 분명하나 이굉수와 더불어 대표적인 친일파로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되어왔다.

독립운동가인 김창숙이 대구 감옥에서 수감 생활을 하던 당시 일본인 간수가 읽어보라며 최남선의 《일선융화론》을 건네주자 “이런 흉서가 있는가’라며 책을 마루에 내던지고, “기미독립선언서가 최남선의 손에서 나오지 않았던가. 이런 자가 도리어 일본에 붙은 역적이 되다니 만 번 죽어도 그 지은 죄는 남을 것이다”라며 울분을 토했다는 이야기는, 한용운과 정인보가 “육당이 죽었다”고 선언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당시 최남선이 어떻게 평가되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신체시

한국 근대시의 초기 형태를 말한다. 그전의 창가와 이후의 자유시 사이에 위치하는 것으로,시조나 가사와는 달리 당대의 속어를 사용하고,서유럽의 근대시나 일본신체시의 영향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최초의 신체시로 1908년 11월《소년》창간호에 실린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꼽으나,이에 앞서 1905년 무렵 작자미상의 신체시 〈아양구첩> . <원백설> . <충흔소한〉 이 발표되었고,1896년 이승만이 《협성회보》에 〈고목가〉라는 신체시를 발표했다는 주장도 있다.


반민족행위 처벌 법

일제강점기 동안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했거나,독립운동가 또는 그 가족을 살상 • 박해하는 등 반민족행위로 민족에게 해를 끼친 자를 처벌하기 위해 1948년 9월 22일 공표한 전문 32조의 법률을 말한다. 이 법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일합병에 적극협력한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하고,그 재산의 일부 또는 전부를 몰수한다. 일본정부로부터 작위를 받았거나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거나 독립운동기를 살상 • 박해한 자는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고 재산의 일부 또는 전부를 몰수한다. 이밖에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한자는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거나15년 이하 동안 공민권을 제한하고 재산의 일부 또는 전부를 몰수한다.

이 법안이 공포됨에 따라 특별조사위원회가 설치되어 조사에 착수했으나,친일 세력의 노골적인 방해와 정부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조사활동이 극히 제한을 받았다. 또한 1949년 6월 6일 경찰의 습격으로 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이후 재판을 받아 실형을 선고 받고 복역한 사람은10여명에 불과했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