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謠背景函

고향 초-금사향///羅雲奎

bsk5865 2015. 4. 24. 08:22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5.04.24 06:46

 

고향 초-금사향///羅雲奎(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7154 


고향 초-금사향


고향 초-금사향

작사 김다인 작곡 박시춘


남쪽나라 바다 멀리 물새가 날으면
뒷동산에 동백꽃도 곱게 피었네
뽕을 따던 아가씨들 서울로 가네
정든 사람 정든 고향 잊었단 말인가


찔레꽃이 한 잎 두 잎 물위에 내리면
내 고향에 봄은 가고 서리도 차네
이 바닥의 정든 사람들 어디로 가네
전해 오던 흙 냄새를 잊었단 말인가


羅雲奎

생몰년도: 1902년-1937년
호; 춘사(春史)
활동분야: 영화

생애와 업적
여기는 별 곳이 아니라 활동사진을 박이는 곳이란다. 제1회
작품으로 〈바다의 비곡〉을 제작한 조선키네마주식회사란 간
판을 단 곳이다. 오기는 안씨(안종화)의 소개로 왔으나 입사는
표정시험에 합격하여야 되므로 나도 표정시험을 보았단다.
••••3대 1이라는 경쟁률로 나 하나만이 패즈:가 되었단다. 여
러 시험관들은 그전에 경험이 있었느냐고 적이 만족한 빛을
보이는 모양이다…….운규의 이상의 길은 지금부터 열리는
것이다 제2회 작품은 윤백남 씨 각색으로 〈운영전〉이란
시대극인데 배역은 아직도 모르나 나도 출연하게 될 것은 사
실이고 로케이션은 경성이라니 불원간 만나게 될 줄로 안다.


흥분과 감격에 약간 우졸한 기분마저 느껴지는 이 글은 나운규가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연구생으로 뽑힌 뒤 친구에게 쓴 편지이다.사실 나운규를 영화의 길로 이끌었던 안종화나 이경손의 회고에 따르면,외모나 연기력에서 모두 배우 감이 아니라고 판단해 고 개를 가로젓던 영화사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이용해 우격다짐으로 밀어 넣었던 것이라 하는데,본인의 생각은 달랐던 듯하다. 안종화나 이경손의 기록도 각각 자신의 영향력이 었다고 기억하고 있으니 누구의 주장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어쨌든 당시 어느 누구도 나운규가 조선영화계를 이끌어갈 당대의 영웅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 만은 분명하다.

사실 나운규의 용모는 배우로서 그다지 적합하지 않았다. 훗날 나운규와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했던 김태진조차도 그의 배우로서의 조건에 대해 “그 짧고 꼬부장한 각선, 작은 키, 달라붙은 목,깔깔한 목소리 이런 연기형 배우란 엽기적이거나 추적 형상에 적합한 것이어서〈아리랑〉의 광인 역을 제외한 수많은 역은 적역이 아니었다”라고 평할 정도였다.

그러나 나운규는 영화가 자신의 이상을 펼칠 수 있는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라 생각했고,그 시작을 무한히 기뻐했다. 오랜 시간 험한 길을 돌아서 왔지만,어려서부터 신파극단이 마을을 지나면 하룻밤도 거르지 않고 극장 한 모퉁이를 지켰고,토요일이나 일요일 밤이면 아이들을 자기 집 부엌에 모아놓고 연극을 했던 그였다.

약종상을 하던 아버지 밑에서 부족함 없이 자라나던 나운규에게 첫 번째 시련은 첫사랑과 함께 찾아왔다. 첫사랑의 연적이었던 헌병보조원의 농간으로 무기정학을 받은 뒤 좌절감에 고향인 회령을 떠난 그는 간도로 갔다 그곳에서 명동중학교에 입학해 간도지역 애국단체들이 만든 신문을 회령까지 전달하는 일을 하다 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수배를 당해 다시 러시아로 폼을 피해야 했다. 낯선 타국 땅에서 먹고 살기 위해 러시아 백군의 용병으로 들어갔다가 탈출해 북간도로 간 뒤에는 광복군 도판부(圖版部)에 가입해 터널 폭파 임무를 부여 받기도 했다. 결국 계획이 취소되어 청산리로 갔다가 “군대 말고 공부를 해서 나라를 위하라”는 어느 나이 많은 광복군의 충고에 서울 유학 길에 오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도판부 사건이 발각되어 경찰에 체포됐고,결국 2년간 옥살이를 해야 했다.

석방된 뒤 귀향한 그에게 새로운 인생의 전기가 된 것은 회령 땅에 들어온 신극단체 ‘예림회’의 공연이었다. 그는 무조건 극단을 찾아가 배우로 받아줄 것을 간청했고, 그렇게 시작된 극단 대표 안종화와의 만남은 그를 영화계로 이끌었다. 다시 서울에서 우연히 만난 안종화에게 조선키네마에 데려가 달라 떼를 쓰다시피 했던 것이다.

데뷔작〈운영전〉에서 그가 맡았던 역할은 눈에 띄지도 않는 가마 꾼이었다.더구나 〈운영전〉의 실패로 감독을 맡았던 윤백남이 영화사와 결별하면서 그도 윤백남을 따라 영화사를 탈퇴하는 바람에 영화사에 소속돼 있던 시간은 3개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사이 비록 단역이기는 했지만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았고,또한 당대 영화계를 이끌던 여러 인물들과 알게 된 것은 나운규 선화의 발판이 되기에 충분했다.

이후의 행보는 빨랐다.1925년 두 번째 작품〈심청전〉에서 심봉사 역으로 연기력을 인정받았고,1926년〈농중조〉에 출연해 관객들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그리고 〈아리랑〉이다.

나운규가 원작 • 각색 • 감독(일본인이 감독이었다는 주장도 있다)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이며, 전설이고 신화이다.(아리랑〉은 이전의 어느 작품도 거둔 적이 없었던 성공을 거두었다. 이 영회는 민족의 비애와 불타오르는 민족정신을 형상화한 민족영화였으며,한국 영화를 비로소 예술적 수준에 올려놓았다는 평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극적 긴장감,구경거리적 재미를 더함으로써 관객들로부터 열띤 호응을 받았다. 이 영화로 나운규는 한국 영화의 중심에 선다.

그리고 다음 작품〈풍운아〉에서 역시 원작 • 각색 • 감독 • 주연을 맡아,영화적 수준에서는〈아리랑〉을 넘어서지 못했지만,대중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으며,그때까지 한국 영화계에서 누구도 가져보지 못했던 인기와 명성 그리고 재능을 과시하는 스타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이후 원작 • 각색 • 주연을 맡은 〈야서〉와 감독 • 주연을 맡았던〈금붕어〉의 연이은 실패,단원들과의 갈등,영화사와의 불편한 관계는 나운규를 위협하고,그는 결국 독립하여 영화사 ‘나운규프로덕션’을 창립한다.이후〈옥녀).(사나이).(사랑을 찾아서).(벙어리 삼룡〉등을 만들며 몇몇 작품을 통해 대중적 인기를 다시 확인하기도 했지만,기생 출신 여배우 유진방과의 연애와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성격 때문에 영화사는 결국 해체되고 만다. 그 뒤 다른 영화사를 통해〈아리랑 후편〉등을 만들며 재기를 모색했으나,출세만큼이나 몰락도 가팔랐다. 생활을 위해 악극단 무대에 출연해야 할 정도였다.

〈아리랑〉 이후 새로운 이정표가 된 이규환 감독의 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에서 인상 갚은 연기를 보여 오랜만에 호평을 받으며 옛날의 명성을 어느 정도 회복한 것도 잠시,실패는 계속되었다.

그 어렵던 시기 그를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몸을 파고드는 병마였다. 한번 일에 빠지면 밤을 새다시피 몰두하다 보니 누적된 피로와 하루에 두세 갑을 피워대는 담배가 원인이었던 듯하다. 병이 깊어질수록 작품에 대한 열정은 더욱 뜨거워졌다. 그때의 안타까운 심정을 나운규는 “이대로 죽어버리면 무엇을 남겨놓는가.10년 싸워서 남긴 것이라고는 한데 모아놓고 불질러버리고 싶은 작품 몇 개가 굴러다닐 뿐이다”라고 기록했다.

그런 그가 병마와 싸우며 자신의 마지막 심혈을 기울여 만든 영화가〈오몽녀〉였다. 지친 폼을 가누지 못해 촬영 현장에서 쓰러져 가며 만든 이 영화는 나운규의 역작”이라는 평가에서부터 “조선영화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나운규의 천재성이〈아리랑〉에서 다한 것이 아님을 증명해 보였다

그려나 이 작품 뒤 그의 건강은 급속히 악화되었다. 다음 영화〈황무지〉의 집필을 마치고 쓰러진 그는 끝내 서른여섯 살의 젊은 눈을 뜨지 못했다. 그의 장례는 최초의 영화인장으로 치러졌고 화장되어 홍제동에 영안 되었던 그의 유해는 사망 30주기를 맞아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93년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어 대전 국립묘지 독립유공자 묘역으로 옮겨졌다.


평 가

“한국 영화사상 나운규 만큼 자주 떠올리는 이름도 없다. 고난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면 그의 이름은 개척자가 되고, 민족정신을 떠 올릴 때면 독립과 자유를 위해 폼 바친 투사가 된다. 그가 만든 영화들은 천재의 영감과 불 같은 신념,시대를 관통하는 영화정신을 담은 걸작으로 불린다. 그 중에서도〈아리랑〉은 대표적이다. 한국 영화는 그에게서 시작해 그에 의해 완성된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한다. 신화이자 전설이다"

영화평론가 조희문은 나운퓨 평전을 쓰면서 이렇게 글을 시작했다.

한편, 당시 카프의 회원으로 나운규를 ‘의식 없는 영화인’으로 몰아붙였던 서광제는 나운규의 장례식에서 조사를 통해 “〈아리랑〉에서 얻은 그의 명성은 그것을 여러 번 되풀이해먹기 때문에 나중에는 태작이 연발하였다. 그의 개인 생활이 여유치 못한 점에도 있겠지만 내 생각 같아서는 자기 재주만 믿고 좀 더 영화예술이라는 것을 연구해나가지 않은 데서 후기의 그의 작품이 태작이 많았던 원인이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며 날카롭게 비난하는 한편,“조선 영화계 초기의 개척자며 선각자인 나운규 군의 요절이야말로 전체 조선 영화계의 크나큰 일대 손실”이라고 애도하고,“그대의 생애는 너무나 비참하였고 그대의 예술적 활동은 너무나 짧았다. 그러나 남기고 간 예술은 길이길이 있을 것이다”라고 비감한 심정을 표현했다.


카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기동맹.3.1운동 이후 일제의 식민지정책이 문화정치로 전환하고,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사장이 광범위하게 확산되면서 새롭게 등장한 프롤레타리아 문예운동단체이자 한국 최초의 전국적인 문학예술가조직이다.

박영희(朴英熙),안석영(安夕影),김기진(金基鎭) 등이 주요 인물들이었다. 1925년 8월 결성되어 1935년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