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고향-남인수 작사 김다인 작곡 박시춘
一 실버들 늘어지는 새 봄이 돌아오면 내 고향 두메 산골 풀 피리 그리워라 사시나무 고개 아래~ 누렁소 풀을 뜯는 언제나 가고픈 건 흙 냄새 고향이지
二 진달래 꽃을 따서 머리에 꽂아주면 수줍어 돌아서던 순이가 그리워라 은행나무 기대 앉어~ 십오야 달을 보며 달 노래 별 노래를 부르던 고향이지
李仲燮 생몰년도: 1916년-1956년 호; 대향(大鄕) 활동분야: 미술
생애와 업적 분노한 소 그림을 통해 박해 받는 민족의 모습과 자신의 내면세계를 투영했던 화가,이중업.
이중섭은 오산학교 시절부터 소를 열심히 그렸다. 어찌나 소를 열심히 그렸는지 오산 학생들 사이에 이중섭은 소와 같이 산다. 소와 입 맞춘다”하는 이야기!까지 나돌 정도였다 원산에 살 무렵에는 소를 그리기 위해 하루 종일 소를 이라 보고 저리 보다가 소에 받치기도 하고 소 주인에게 도둑으로 의심받아 잡혀가기도 했다 제주도 피난 시절에도 이웃에 살던‘이쁜이’라는 소가 하도 예뻐서 날마다 그 집을 찾아가 유심히 관찰하곤 했는데,그 때문에 소 주인 내외가 이중섭을 소도둑으로 의심했다고 한다. 이중섭은 ‘제주도에서 본 소들은 전쟁 전 소처럼 안정감이 있고 눈빛도 순수해서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내 소 그림은 제주도에서 큰 틀이 이루어졌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그러나 6. 25전쟁 전까지 그렸던 무수한 소 그림 가운데 현재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어 안타깝다.
1916년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이희주와 안악 이씨 사이의 2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난 이중섭은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렸을 때,그는 공부하는 것보다 놀이와 운동 그리고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다.사과를 나누어주면 다른 아이들은 재빨리 먹어버렸지만 그는 혼자 방해 받지 않을 곳으로 가서 연필로 사과를 그려본 뒤에 먹었다고 외사촌들은 회상하고 있다. 평양에서 종로공립보통학교에 다닐 때부터 학교에서‘그림’ 하면 첫손가락에 꼽혔다.
초등 과정 내내 한 반 친구였던 김병기의 아버지 김찬영은 그에게 가장 처음으로 영향을 준 미술가였다. 일본 도쿄 미술학교 서양화 선과에 입학해 화가의 길을 걸었던 김찬영의 집에 있던 각종 화구와 미술서적들은 이중섭을 열광케 했다.
초등 과정을 마치고 진학한 오산고등보통학교는 이중섭의 인생과 예술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다. 그곳에서 그는 조선 사람으로서의 민족적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고 또한 임용련이라는 좋은 미술교사를 만나 본격적으로 화가의 꿈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오산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일본 유학 길에 올라 데이고쿠〔帝國〕미술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조선에는 미술 전문 교육기관이 없었다. 이중섭은 일본에 가서 공부하다가 기회를 보아 프랑스로 가려고 틈틈이 프랑스어 공부도 했지만,프랑스 유학은 성사되지 못했다. 그러나 데이고쿠 미술학교는 이중섭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그는 자유로운 분위기에 개성을 존중하는 학풍으로 알려진 분카〔文化〕학원 서양학과에 다시 입학했다.
이 무렵 이중섭은 외투의 아래자락을 무릎 위까지 짧게 자르고,잘라낸 조각으로 큼직하고 네모진 호주머니를 만들어 붙인 특이한 복장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방학 때 집에 머물다가 일본으로 갈때 집에서 고급양복을 10여 벌 맞춰 가방 가득 넣어주어도, 다시 방학이 되어 돌아 올 때는 마치 주유소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아래위가 붙어 있는 작업복 같은 것을 걸치고 나타났다.
가지고 간 옷은 모두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자신은 적당하다 싶은 것을 고쳐서 입었던 것이다. 이렇듯 옷이나 생활도구 등을 자신의 취향에 맞추어 새롭게 만들곤 했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개성 있으면서도 인간적인 체취를 흠빽 풍겼다.
또한 이중섭은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데다 운동도 잘하고 노래도 잘 불러 여학생들한테 인기가 높았다. 평생 그토록 애절하고 사랑이 넘치는 편지를 썼던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를 만난 것도 분카 시절이다. 분카 2년 후배였던 그녀와 사랑에 빠진 이중섭은 1940년 말부터 관제엽서의 한쪽 면에 그림을 그려 그녀에게 보내기 시작하는데,1943년까지 그렇게 보낸 엽서는 100여 점에 이른다. 월남하기 이전의 작품이 거의 남아 있는 않은 상태에서 이 엽서들은 이중섭의 초창기 화풍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38년 스물세 살의 이중섭은 지유비주쓰카교카이〔自由美術家協會〕가 실시한 공모전에 처음으로 출품해 입선에 들고,협회상을 수상했다. 그에게 “환각적인 신화를 묘사하고 있다" “대단히 작은 화면에 가득 찬 영웅적이고 모뉴벤탈한 구도는 대개의 큰 전람회가 대작주의인 데 대한 당당한 항의다 같은 호평들이 쏟아졌다.
1942년에는 이 모임의 정식 회원이 되었는데,이는 한 사람의 화가로 대외적으로 인정받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듬해 다시 출품해〈망월〉이라는 작품으로 태양상을 수상했다.
1941년부터는 일본에 있던 우리 젊은 미술가들과 함께 조선신미술가협회를 조직해 활동하기도 하다가 1943년 서울에서 조선신미술가협회전이 열릴 무렵 조선으로 돌아왔다. 독일에 점령당한 프랑스로 유학 갈 수도 없고,일본도 여러 가지로 위험한 상황이었다.
원산의 집으로 돌아온 그는 1945년 일본에 대한 공습이 심해지자 애인 마사코를 조선으로 불러들여 결혼식을 올렸다.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조선에 온 마사코는 이남덕으로 이름을 바꾸고 전통혼례를 올렸다.
그러나 북한 땅이 공산치하가 되자 이중섭은 당국으로부터 비판을 받는 등 자유로운 창작 활동에 제한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 안있어 일어난 6 •25전쟁으로 원산에 대한 폭격이 심해지자 그는 부인과 아들 둘,그리고 큰조카를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했다. 그곳에서 일찍이 겪어본 적 없는 어려움에 직면해야 했다. 갑자기 닥친 생활고에 부두에서 짐 부리는 일을 하기도 하고 얼마 되지 않는 배급을 타기도 했지만,여전히 가족들의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 이중섭은 가족을 데리고 제주도로 들어가 밭에 나가 채소를 캐어 먹고 바다에 나가 게를 잡거나 해초를 뜯어 먹으며 버텼다. 통조림 깡통으로 모자라는 그릇을 대신하고 재료가 부족해 대용물감을 쓰면서 도 서귀포에 1년 가까이 머물면서 상당히 많은 그림을 그렸다.
전세가 안정되어가자 그는 부산으로 다시 나왔다. 상황이 좋아지면 고향에 빨리 돌아갈 생각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참담한 생활고로 인해 아이들은 모두 영양실조 상태에 빠졌고, 아내의 건강도 나빠져 결핵으로 각혈을 하기에 이르렀다. 아내와 아이들은 일본인 수용소에 들어갔다가 결국 일본 행 배를 타고 만다
1952년 아내와 두 아들이 떠난 뒤 이중섭의 생활은 더욱 비참해 졌다. 우동과 간장으로 하루에 한 끼를 간신히 때우며 냉방에서 새우잠을 갔다.그러면서 건강은 급속히 나빠졌다 이중섭은 가족과 헤어진 뒤 아내와 두 아들에게 편지를 쓰고 그림을 그려 보내면서 가족간의 유대를 이어갔다.그는 조금만 더 참으면 사랑하는 가족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
“헤어졌던 가족을 한번 만나보기라도 했으면 그것만으로도 한이 없겠다”는 얘기를 하며 애를 태우던 그는 드디어 헤어진 지 1년 만에 일본에 가서 가족을 만나지만 일주일 안에 출국해야 하는 조건이었다. 일단 돌아갔다가 제대로 된 여권을 마련해서 정식으로 입국해 미술 활동을 한다는 약속을 하고 6일 만에 헤어져야 했다. 그러나 그것이 이중섭과 가족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뒤 이중엽은 “그림을 열심히 그리자. 그림만 열심히 하면 산다”라는 말을 반복하며 엄청난 정열로 그림을 그려댔다. 그림을 그려 성공하고 가족을 만나야겠다는 목표가 그에게 큰 동력이 된 것이다• 1954년 대한미술협회와 국방부가 공통으로 주최하는 미술전에〈닭> . <소> . <달과 까마귀〉를 출품해 큰 호응을 얻었다. 그는 아내에게 “기어코 승리를 할 테니까 기대하고 그때까지 안정에 유의하고 하루 빨리 기운을 내어주시오”라며 희망찬 편지를 써서 보냈다.
그리고 이듬해 서울 미도파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많은 신문이 전시 평을 실었고, 개인전은 성공한 듯이 보였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그의 그림에 대해‘지대착오적”이며 “낡은 표현주의에 의존한 희화의 세계에 불과”하고 새로운 시야를 여는 전위적인 야심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여기에 개인전 도중 은박지 그림 일부가 춘화라며 철거당하는 일이 일어났고,전시회 때 그림을 사간 사람들이 그림 값을 떼어먹는 일이 지나치게 많이 발생했다. 결국 오랫동안 준비했던 개인전이 강제 철거의 충격과 함께 빈털터리로 끝나고 말았다.
같은 해 대구에서 열린 개인전도 실패하자 이중엽의 붐은 지쳐갔고 신경질은 늘었다. 이때부터 이중섭이 미쳤다고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가까이 지내던 시인 구상이 입원시켜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했지만,그는 입원해 있는 동안 음식을 거부하는 등 모든 것을 자포자기한 듯 보였다. 그는 그 무렵 ‘내가 그림을 그린 답시고 세상을 속였다. 놀면서 공 밥을 얻어먹고 다니며 뒷날 무엇이 될 것처럼 사기를 쳤다”고하며 이제부터는 남과 세상에 봉사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신경정신과 치료를 위해 감금과 전기쇼크 요법까지 받았던 이중섭이지만,이중섭이 실제 앓았던 것은 간 질환이었다는 견해도 적지 않다. 자신이 정신이상일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이중섭이 완강히 자신의 본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생하던 그는 서대문적십자 병원에서 돌보는 이 하나 없는 가운데 자신의 작품 이름처럼 ‘돌아오지 않는 강’ 을 건녔다. 당시 그의 나이 마흔하나였다.
이중섭의 사망 소식을 듣지 못한 채 병원에 들렀던 친구 김병기가 소식을 알려 100여 명의 지인들이 모여들자 놀란 병원 측에서 “이렇게 유명한 분이 왜 그토록 쓸쓸하게 죽어야 했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는 얘기가 전한다.
평 가 이중섭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던 친구 김병기는 이중섭 사후 10년이 좀 안 되어 그에 대한 글을 발표하며 “한국의 서양화 도입기에 있어서 가장 먼저 후진성을 탈피한 근대화의 선구자로서,비록 서구적인 자료로 그림을 그렸을망정 그것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한 개성적이고 향토적인 작가였다”고 했다.
이중섭에 대한평가가 급속히 확산된 것은1970년대 들어서였다.
1972년 15주기를 기념하는 전시회가 열리면서 널리 알려져 이후 이중섭에 관한 여러 연구 논문들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1973년 시인 고은이 평전을 출판하면서 이중섭의 삶은 이후 영화와 연극으로도 만들어지는 등 대중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또한1978년에는 건국 30주년을 기념하여 정부에서 문화훈장이 수여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지나친 평가와 우상화라는 견해도 있고,1979년 《계간미술》에서 우리 미술가에 대한 평가가 전반적으로 과대평가되었다고 진단하면서 그 대표적인 인물로 이중섭을 꼽기도 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미술가로 그의 이름은 김홍도와 백남준을 앞질러 1위를 지키고 있으며,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위작논쟁에서 보듯이 그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언제나 뜨겁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