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아 도는 내력-남배송 작사 손로원 작곡 이재호
一 벼슬도 좋다 만은 명예도 싫어 정든땅 언덕 위에 초가 집 짓고 낮이면 밭에 나가 길 삼을 메고 밤이면 사랑방에 새끼 꼬면서 물방아 도는 내력 알아보련다
二 서울이 좋다지만 나는야 싫어 흐르는 시냇가에 다리를 놓고 고향을 잃은 길손 건너게 하며 봄이면 버들 피리 꺾어 불면서 물방아 도는 내력 알아보련다
呂運亨 생몰년도: 1886년(고종 23)-1947년 호: 몽양(夢陽) 활동 분; 독립운동 정치
생애와 업적 1919년 11월 당시 서른네 살의 여운형은 일본 방문길에 올랐다. 그 무렵 3•1운동에 당황한 일제는 이전의 헌병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전환하며,총독부에 매수된 친일지식인들을 동원해 자치론 을 주장하기 시작했다.즉시독립이 불가능한 시점에서 무모하게 독립을 주장하기보다 자치권을 확보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그 주장을 좀더 효과적으로 펴기 위해 이광수를 비롯한 조선의 대표적인 지식인들이 매수됐다. 또한 일제는 임시정부의 핵심적 인사를 회유해 임정을 내부로부터 무너뜨리기 위한 공작을 폈는데,이때 일제가 주목한 인물이 여운형이었다. 상하이 교민단장을 비롯해 신한청년당 총무,상하이 임시정부 외무부차장 등을 지낸 여운형을 회유시키기 위해 일제는 그를 일본으로 초청했다.
“일제에 매수되어 친일파로 전락했다”는 비난도 있었지만,깊은 고민 끝에 여운형은 일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3주간 도쿄에 머물며 여러 차례의 회담을 통해 일본의 자치제 제안을 격렬히 반박하고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 일제의 주요 각료들이 10여 차례 이상 그를 만나 자치운동을 권하면서 정치적 지위보상을 약속했고,재정적 지원을 아끼기 않겠다고 미끼를 던졌으며,신변위협적인 언사를 통해 겁을 주기도 했다. 그는 어떤 제안에도 논리적이고 화려한 언변으로 조선의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특히 11월 27일 수백 명의 신문기자와 도쿄 유학생들 앞에서 한 연설은〈조선의 청년지사 독립을 주장하는 사자후). <제국 수도 한켠에서 불온언사 난무〉라는 제목으로 각 신문을 장식하며 일본 열도를 뒤흔들었고,이듬해 일본의 제국의회는 여운형의 방일문제를 둘러싼 논란으로 중의원이 해산되기에 이른다. 적의 심장부인 일본본토에서 합법적인 방법을 통해 조선독립을 설파한 것은 독립운동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화려한 성과였다. 이후 여운형은 독립운동가로 대중 앞에 또렷이 부각된다.
여운형은 1886년 음력 4월 22일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곡에서 여정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경제적으로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대대로 소론에 속하는 양반 가문이었다. 여섯 살 때부터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다가 열다섯 살 되던 해 배재학당에 입학,신학문을 공부하기 시작했다.1년 뒤 배재학당을 중퇴하고 흥화학교를 다니다 다시 관립우체학교로 전학했다. 통신원 간부들과 관리들을 양성하는 학교였다. 그러나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여운형은 일제의 관리가 될 수 없다며 졸업을 1개월 앞두고 자퇴했다.
여운형이 국권회복운동에 뛰어든 것은 스물한 살 때 부터로 보인다. 신민회 청년회원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시작한 여운형은 1907년 양평에 사립기독광동학교(私立基督光東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어 신교육 구국운동을 시작했다. 1910년에는 강원도 강릉에 초당의숙(草堂義塾)을 설립했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겼다는 비보를 들은 여운형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망명을 선택하고 1913년 신민회가 창립한 만주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交)를 찾아갔다가 1914년 난징으로 가서 금릉대학(金陵大學) 영문과에 입학했다 금릉대학을 졸업한 뒤 협화서국(協和書局)이라는 기독교 서적 출판판매공사에서 일하며 상하이에 거류하고 있는 교민단의 간부 일을 보았다.
그리고 1918년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이라는 청년단체를 조직했다. 처음 여섯 명으로 시작한 이 작은 조직은 이후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는 등 3•1운동의 주요한 진앙지가 된다.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에 가담해 임시의정원 의원을 맡았으나,임시정부의 노선 싸움에 실망한 뒤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 반제투쟁의 연장선상에 조선독립이 놓여 있다는 판단 아래 중국의 혁명 투쟁에 가담해 활동하기도 했다. 1921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해 레닌(Lenin,Vladimir II’ich)과 트로츠키(Trotskii,Leon)를 만나 조선독립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등 국제적인 인물로 차츰 성장해나갔다. 1929년 상하이 푸단대학 축구단을 인솔해 동남아시아 각지를 순회하면서 영국과 미국의 식민지 정책을 통렬히 비난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해 7월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에 압송된 뒤 3년의 징역형을 언도 받아 복역하다 1932년 출옥했다 이후〈조선중앙일보〉사 사장과 조선체육회장직을 맡아 베를린 올림픽대회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없애는 일장기 말소 사건을 주도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중앙일보〉사는 폐간되었다.
일본을 오가며 세계 정세를 살피던 여운형은 머지않아 일본이 패망하고 조선이 독립할 것이라는 사실을 예견하고. 1944년 조선건국동맹이라는 항일 지하조직을 만들었다.
광복 후 여운형의 활약은 더욱 빛났다. 그가 아니었다면 광복 후의 정국은 완전히 무정부 상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방송이 나가기 전 정무총감 엔도는 여운형에게 광복 후 치안을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 여운형은 공백 기간의 질서 유지를 담당하며 건국동맹원을 중심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건국준비위원회는 한 달여 만에 전국 145개 지부를 설치하며 영향력을 확대했다.
비록 미군정이 인정하지 않았고 우익의 파괴공작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건국준비위원회는 광복 직후 정치공백기에 나타난,대중적 기반을 가진 강력한 정치 세력으로, 신탁통치문제로 좌우익이 극렬하게 대립하기 전까지는 조선의 유일한정치적 구심체였다.
여운형은 한반도의 완전한 통일 독립이 미국과 소련이라는 외세의 대립,좌익과 우익이라는 사상 이념적 대립,남한과 북한이라는 지역적 분립이라는 세 가지 대립 구도를 극복해야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대화와 설득,양보와 타협을 중시했던 그는 좌우를 넘나들며,남북을 오르내리며,미국과 소련을 상대하며 민족의 현실적 활로를 찾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1945년 9월 6일 미군의 남한 진주를 앞두고 여운형은 박헌영이 이끄는 공산 계열과 연대해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부주석에 올랐다.박헌영과 여운형은 미군이 행정 일체를 넘겨줄 것을 기대했으나,우익진영의 반대와 미군정의 승인 거부로 실패했다. 다시 11월 건국동맹 세력을 모체로 조선인민당을 창당하고 당수로 취임했다. 1946년 2월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에 참가하여 의장단에 선출된 이후 3월에 열린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김규식 등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그 해 9월 평양에서 김일성과 회동해 한반도 문제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적극적으로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며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을 위해 노력하던 중 1947년7월 19일 서울혜화동로터리에서 극우파의 사주를 받은 한지근에게 암살당했다. 광복 이후 2년 동안 그에게 가해진 열두 번째 테러였다.
평 가 상하이 임시정부의 외무차장,일본의회에서 조선독립을 주장했던 애국 청년,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특별당원,레닌 • 트로츠키 • 쑨원과 조선의 독립운동을 논의했던 좌파 지식인,베를린 올림픽 우승자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 사건을 처음 주도한〈조선중앙일보〉사장,조선체육회 회장,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좌우합작운동의 선봉, 남북연대를 위해 38선을 다섯 차례나 넘나든 최초의정치인.
한국현대사에서 누구보다 화려한 경력을 가진 여운형에 대한 평가는 찬사와 비난을 모두 품고있다. 좌우합작과 남북합작을 추구하며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지향하던 그는 광복 직후 남북한을 통틀어 가장 대중적인 지지를 얻었던 정치가였다.1946년〈뉴욕타임스>. AP통신 등 미국의 주요 언론이 여운형을 취재하며 한결같이 한국의 위대한 민주주의자’“한국의 진보적 실력자’라 평가했고,미군정 당시 미국 공사로 있었던 랭던(Langdon,William)은 “동양의 위인이다. 인도의 간디와 비견할 만한 인물이다”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반면,미군정청에 드나들었다고 친미파,북한과 접촉한다고 공산주의자,우익과 합작을 시도했다고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광복 직후 여운형에게 큰절을 했던 조선 공산당의 박헌영은“미군정의 주구가 된 야심가’라고 비난했고,극우 세력들은 ‘조선 공산당의 허수아비”라고 몰아세웠다.
그리고 여운형을 정적으로 여겼던 이승만이 집권한 뒤에는 공산주의자로 낙인 찍혀, 오랫동안 금기의 대상이 되었다.2005년 3월 1일 비로소 독립유공자로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일장기 말소사건 1936년 8월 10일 일본 선수단의 일원으로 일장기를 가슴에 단채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올림픽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하자 국내 언론들은 이를 대서특필했다.8월 13일자 〈조선중앙일보〉가 손기정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신문에 실었으나 총독부의 검열에 발각되지 않았다. 그러나8월 24일〈동아일보〉가 일장기를 지운 손기정의 사진을 게재한 것이 발각되어〈조선중앙일보〉는 폐간되고 〈동아일보〉는 297일 동안 정간 당하고 관계자를 비롯한 13명이 사직 당한 뒤 복간되었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