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부산항-손인호 작사 손희담 작곡 한복남
一 송도야 잘 있거라 해운대야 다시 보자 백사장 숨은 추억 세월도 무심한데 흰돛대 어디 두고 물소리만 처량한가 사공아 정든 님아 나그네 울고 간다
二 오륙도 건너편에 영도다리 서러워라 부산항 정든 포구 떠난들 잊을손가 섬색시 검은머리 휘파람도 다정한데 뱃고동 슬피 울어 이별가 불러주네
李承晩 생몰년도: 1875년(고종12)-1965년 호: 우남(雩南) 활동 분야: 독립운동,정치 다른 이름: 이승룡(李承龍)
생애와 업적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며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승만.그러나 그는 두 번 다 자신을 대통령으로 추대했던 사람들에게 쫓겨났다 그리고‘건국의 아버지’ 에서‘분단의 원흉’까지 그에 대한 평가는 지금까지도 양극단에 놓여 있다.
이승만은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면에서 이경선과 김해 김씨 사이의 5댄 독자로 태어났다 용이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어머니가 꾼 뒤 잉태했다고 하여 어릴 적 이름은 승룡이었다.몰락한 가문이었지만 전주 이씨 양녕대군의 16대손이었던 이승만은 왕족의 후예라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가졌다. 어린나이에 서울로 옮겨와 남산 서쪽 도동에서 유년기를 보내며 전통적 교육을 받았다. 1894년 9월 배재학당에 입학하기 전까지 사서삼경을 모두 익혀 유학에 대한 소양을 쌓았고,배재학당에 입학해 영어와 새로운 학문에 접했다. 그 무렵 배재학당에는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이 교사로 부임해 협성회(協成會)라는 토론회를 이끌고 있었다. 협성회는 일반인들을 받아들이며 나중에 이름을 독립협회로 바꾸는데,이승만은 독립협회에 참가해〈제국신문〉의 논설위원으로,만민공동회의 투사로 이름을 알려갔다. 고종 폐위 음모에 휘말려 투옥된 뒤 6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옥중에서 이승만은 미국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본격적으로 영어와 신학문을 공부하는 한편,기독교로개종했다.
1904년 옥에서 나온 이승만은 한규설 • 민영환의 밀사로 미국에 건너 간다.루스벨트(Roosevelt, Theodore) 대통령,헤 이 (Hay,John Milton) 국무장관 등을 만나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일본에 매수된 당시 주미공사가 협조해주지 않아 정식으로 진정서를 제출하는 데에는 실패하자 그대로 미국에 머물며 유학의 길을 택했다. 조지워싱턴대학을 졸업한 뒤 하버드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프린스턴대학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이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재학 중 기회가 있을 때 마다 한국에 대한 강연을 했는데,모두 170여 회에 이른다.
공부를 마친 이승만은 1910년 서울 YMCA에서 한국 청년의 교육과 전도를 전담하기 위해 귀국했다. 그러나 일제가 기독교 세력을 꺾기 위해 조작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더 허상 국내에 머물 수 없게 되자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미국에서 열리는 감리교대표회의에 참석차 출국해 광복이 되기까지 주로 미국에서 머물렀다.
이승만은 청년 독립운동가,전주 이씨,미국 박사,기독교 전도사,미국 대통령 윌슨과의 친분 등에 힘입어 한성 정부 • 노령 정부 • 상하이 임시정부 등 3•1운동 이후 국내외에 설립된 모든 정부조직에 대통령 • 수상 • 총리 등으로 추대되었다.
1919년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초대 국무총리로 추대되었으나 대통령제를 주장하고 스스로 대통령이라는 직함을 사용해 물의를 일으켰다.결국 임시정부의 직제를 대통령제로 고치고,1920년 상하이로 건너가 대통령에 취임했지만,워싱턴군축회의에 대비하기 위해 6개월 뒤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돌아오지 않았다. 상하이에 돌아오지 않아 임시정부의 활동에 제약을 주었고,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에 대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청원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계속 논란이 되다가 1925년 탄핵되었다. 그러나 그는 임시정부의 결정을 무시하고 구미위원부를 통해 독단적인 활동을 계속했다.
이승만은 열강,특히 미국과의 외교를 통해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는 외교론적인 독립운동 노선을 견지했다. 영어와 국제 정세에 밝았던 그는 일본의 침략성을 경고하며 한국 문제를 쟁점화하려 주로 미국 정부를 상대로 외교 활동을 벌였지만,미국의 반응은 냉담했다. 파리강화회의와 워싱턴군축회의 등에서 지속적으로 시도한 외교 활동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는데도 워싱턴과 하와이에 머물며 항일투쟁과 외교활동을 계속했다.
광복 이후 이승만의 행보는 빨라졌다. 답해 10월에 귀국해‘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총재에 취임했고,미국의 지지를 기반으로 우익 세력의 연합조직체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장,민족통일총본부 총재를 역임하는 등 우익의 지도자로 확고한 위치를 잡아나갔다. 그 해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결정된 5개년 신탁통치에 반대해 찬탁을 주장하는 좌익 세력을 제압했고,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이듬해 6월 전라북도 정읍에서 남한단독정부 수립계획을 발표한‘정읍 발언’으로 국내외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승만은 정치적으로 반탁,반공 및 단독정부의 즉각적인 수립을 주장했다.
1948년 5월 10일 선거 이후 구성된 제헌국회에서 국회의장에 선출되었으며,대통령중심제로헌법이 제정되자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강력한 반공 • 배일주의자였던 이승만은 대통령으로 선출된 뒤 국내의 공산주의운동을 분쇄하고 일본에 대해 강경외교를 견지했다.
6 •25전쟁 중 유엔군의 도움을 얻어 북한군을 물리쳤고,국토가 분단된 상태에서의 정전협상을 강력히 반대했으며,1953년 남한 각지에 수용되어 있던 반공 포로 2만 7,000여 명을 유엔군의 양해없이 단독으로 석방했다. 또한 같은 해 정전협정이 체결되자 한미양국이 휴전 후에도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한다는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한편6 •25전쟁 중 헌법을 대통령직선제로 개정해 제2대 대통령에 재선되고,초대 대통령에 대한 연임제한을 철폐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사사오입개헌을 강행해 1956년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되는 등 장기집권을 위해 불법적인 개헌을 하고,정적과 야당을 강압해 민주 정치발전에 심각한 지장을 주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1960년에도 대대적 부정선거로 다시 제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이 부정선거에 저항하는 국민들이 4.19의거를 일으키자 대통령 직을 사임하고 하와이로 망명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국내로 옮겨와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평 가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모든 견해가 주관적이며 감정적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탁월한 지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독선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이었다고 기억하는 사람이 생존해 있는 상황에서 그에 대한객관적인 평가는 매우 어렵다.
이승만 재임 시에는 찬OJ하는 성격이 강했고,4.19혁명 이후부터는 분단과 독재의 책임자로 비판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뤘다. 이승만을 비판하는 입장은 이승만이 일제시대 독립운동 진영의 분열과 대립을 조장한 장본인이며,광복 후에는 권력 장악을 위해 분단 정부 수립을 주도했고,한국 사회에 반공주의를 전면화하고 반민주 독재 활동을 통해 민주주의의 진전을 막았다고 주장한다. 또한 한국군의 지휘권을 휴전 후에도 미국에 이양함으로써 종속적인 한미관계를 고착시켰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이승만을‘건국의 아버지’로 평가하는 긍정적인 입장이 등장했다. 이들은 이승만이 개화기 때부터 활동한 애국자였고,미국 프린스턴대학 박사라는 당대 최고 학력과 임시정부 대통령이라는 최고 경력을 지녔으며,광복후 국내 지지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미군정 사령관 하지(Hodge,John R) 중장과 대립하며 건국의 대업을 이루어낸 점을 높이 평가한다. 또한 한국전쟁 시기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미국의 안전보장 위에서 이후 경제개발을 이룩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공을 강조한다. 이승만은 분명 초대 대통령으로서 근대 국가의 틀을 세우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외세의 이익에 편승해 이 나라를 분단시켰고,친일 세력을 청산하지 못했으며, 이후 장기집권에 대한 집착으로 이 땅에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는 데 실패했다는 비난은 피하기 어려울듯싶다.
105인 사건 일제는 서북 지방의 민족운동을 말살할 목적으로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을 조작해 1911년 9월 윤치호 • 이승훈을 비롯한 600여 명을 검거했다. 1912년 5월 122명이 기소되었으며,9월 105명이 징역 5~10년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를 105인 사건이라 한다. 그러나 105인 모두가 고등법원에 항소해 1913년 6명을 제외한 99명이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로써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은 조작된 것임이 밝혀졌지만,이 사건을 계기로 비밀결사인 신민회가 해체되었고,국내의 민족운동은 큰 타격을 받았다.
사사오입개헌 1954년 5월 20일 선거에서 자유당이 원내 절대다수를 차지하자,자유당은 이승만 대통령의 영구집권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제한을 철폐한다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11월 27일 국회 표결 결과 재적의원 203명 중 찬성 135표,반대 60표,기권 7표로 헌법개정에 필요한 3분의 2인 136표에서 1표가 부족했다. 따라서 부결(否決)이 선포되었으나,이틀 후 재적의원 203명의 3분의 2는 사사오입(四捨五入)하면 135명이라 하여 전날의 부결 선포를 번복,가결(可決)이 선포되었다. 이를 사사오입개헌이라고 한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