下町川-笹みどり 作詩 石本美由紀 作曲 叶 弦大 編曲 池多孝春
一 いくら上手に 化粧をしても 泣いた眼もとは すぐわかる すぐわかる 濡れたこころの 下町川よ 妻になれない 恋をして 風に別れの 秋を知る
二 恋のいのちと 両国花火 燃えて散る間に 夏が逝く 夏が逝く 添えぬさだめの 下町川よ 飲んで忘れる 淋しさも 酔いが醒めれば また募る
三 いっそ死のうかと 思ってみたが 残るみれんが 袖を引く 袖を引く 夢も寒々 下町川よ 明日の願いを 酉の市 賭けて待ちたい またの春
9歲 年下 男과 結婚한 密偵 裵貞子 "前 漢城判尹 裵國泰 氏의 妹弟 裵貞子와 日本에 遊學하여 卒業한 侍從武官 朴榮喆氏가 새 문밖 호텔에서 婚禮를 再 昨日에 擧行하였는데 婚姻하는 禮節과 잔치하는 飮食을 다 西洋法으로 하고 內外國 紳士 數百 人을 請하여 待接하였다더라."('大韓每日申報' 1907.12.24.)
裵貞子(1870~1951=寫眞50代 때의 모습)의 結婚이 世間의 耳目을 끈 것은, 이것이 3번째 結婚이었던 데다 新郞 朴榮喆이 아홉 살 年下이고 그女와 結婚하기 為해 離婚까지 한 때문이었습니다. 裵貞子는 日本에서 留學生 田在植과 結婚해 아들까지 두었고, 田在植과 死別한 後 歸國해 玄暎運과 結婚했습니다. 宮內府 飜譯官 等 閑職에 머물던 玄暎運은 裵貞子와 結婚한 後 陸軍 參領, 宮內府 大臣署理 等 破格的 昇進을 거듭했지만, 離婚 後 詐欺罪로 起訴돼 懲役 5年 刑을 宣告 받았습니다. 裵貞子는 朴榮喆과 5~6年 살다가 離婚하고, 日本人 大橋(おおはし)와 結婚했습니다. 그 後로도 銀行員 崔德, 貿易商 조병헌, 20歲 年下의 靑年富豪 정봉진, 25歲 年下의 日本 巡査 川尻(かわじり), 富豪 조희경 等과 同居하고 헤어지는 等 華麗한 男性編曆으로 有名했습니다.
裵貞子는 어릴 때 大院君의 側近이었던 父親이 明成皇后 執權 後 處刑되자 母親과 함께 流浪 生活을 하다가 密陽府 官妓를 거쳐 通度寺에서 出家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後 通度寺를 떠나 1885年 父親의 親舊였던 密陽府使 정병하의 紹介로 日本人 密偵 松雄(まつお)를 만나 渡日해 亡命 政客 안경수에게 맡겨졌고 그의 도움으로 學校에도 다녔습니다. 1887年 안경수의 周旋으로 金玉均 門下에 들어갔고, 그의 紹介로 伊藤博文의 養女가 되어 스파이 敎育을 받은 것으로 傳해집니다. 이때 水泳•乘馬•射擊•벽장 술 等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1927年 裵貞子의 口述을 바탕으로 編纂한 책 '裵貞子 實記'에 이런 內容이 記錄돼 있지만, 額面 그대로 믿기는 어렵습니다. 裵貞子의 渡日을 周旋했다는 정병하가 密陽府使에 赴任한 것은 1888年이었고, 裵貞子가 그의 門下에 들어갔다고 主張한 1887年 金玉均은 小笠原(おがさわら) 섬에 流配 中이었기 때문입니다.
'伊藤博文의 養女'로 自處한 裵貞子는 1894年 歸國 後 皇室과 國政을 弄奸했습니다. 嚴妃와 高宗에게 接近한 뒤, 皇室과의 親分, 타고난 美貌, 絢爛한 話術을 利用해 日本의 密偵 役割을 遂行했습니다. 韓日 强制合倂 後에는 豪華奢侈 生活과 獵色行脚으로 家産을 蕩盡하고, 滿洲 一帶를 떠돌며 獨立運動家를 偵探•密告해 生計를 維持했습니다.
裵貞子는 昨年 哈爾濱(합이빈)에서 多數의 同胞를 敵에게 잡아주고, 挾雜을 하고 奉天으로 逃亡하여 奉天 同胞의 事情을 敵 領事官에 告하야 同胞의 받는 困難이 莫甚하외다. 아아 언제까지나 이 可殺의 妖女 裵貞子의 命을 그대로 두겠습니까?” (獨立新聞 1920.5.8.)
光復 後 裵貞子는 여든 살의 나이로 反民特委에 起訴되었다가 出獄 後 6•25戰爭 中에 死亡했습니다. 그女를 背景으로 한 映畵 '妖花 裵貞子'가 1966年(김지미 主演 映畵 포스터)과 1973年 두 차례 만들어졌습니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