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おまえに惚れた-徳久広司///純宗皇帝가 斷髮하다(D

bsk5865 2015. 6. 11. 09:00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5.06.11 05:59

 

おまえに惚れた-徳久広司///純宗皇帝가 斷髮하다(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7406 


おまえに惚れた-徳久広司


おまえに惚れた-徳久広司

作詞 たかたかし 作曲 徳久広司


俺にきめろよ まよわずに
言って振り向きゃ ついてくる
惚れた 惚れたよ
おまえに惚れた
肩を抱きよせ 眸をのぞきゃ
頰に紅さす おまえに惚れた


あなた躰に 惡いわと
水でお酒を 割ってだす
惚れた 惚れたよ
おまえに 惚れた
言葉づかいも 女房を
きどる今夜の おまえに惚れた


金じゃ幸せ 買えないと
俺を泣かせる 憎いやつ
惚れた 惚れたよ
おまえに 惚れた
空を見上げりゃ 星ひとつ
そっと指さす おまえに惚れた


純宗皇帝가 斷髮하다

大韓每日申報 雜報(1909. 3. 31)에 '지독한 頑固'라는 題目의 記事가 실렸습니다. '星州郡에 사는 조성직이라는 이는 新學文에 뜻을 두고 上京하였습니다. 그는 크게 決心하고 斷髮한 後 隆熙學校에 入學했습니다. 그런데 故鄕의 父親이 이 消息을 듣고 아들에게 집으로 돌아올 것을 命했습니다. 10余 次例나 便紙로 嚴하게 命하니 아들은 父親의 뜻을 拒逆할 수 없어 집에 내려갔습니다. 그 父親은 아들이 머리 깎은 꼴이 부끄럽다고 아예 바깥出入을 禁止시켰습니다.'

비슷한 事緣이 한 週日 前에도 '申報'(1909. 3. 23)에 紹介됐습니다. '교남학회 記念式에 參加했던 人事들이 斷髮했습니다. 장길상이라는 사람도 여럿이 意氣投合하여 함께 머리를 잘랐습니다. 그런데 그는 入城 後 玉貫子 網巾을 버릴 수 없다고 다시 민머리 위에 갓을 쓰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朝鮮統監府가 是正 改善이라는 名目으로 强要했던 斷髮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日帝 强占 直前 內部 訓令으로 强制 施行된 斷髮은 韓國人의 生活風俗을 크게 바꾸어놓았습니다. 高宗의 뒤를 이어 皇帝에 오르게 된 純宗(强制合倂 後 '朝鮮李王'으로 格下된 뒤의 모습)은 "是正 改善하여 政局을 새롭게 할진대 반드시 朕이 먼저 始作할지라. 마땅히 卽位하는 날 斷髮하고 軍人服裝을 하리니 臣民은 다 알아서 朕의 뜻을 좇으라"고 하는 '斷髮詔勅'(申報, 1907.8.18)을 發表했습니다. 그리고 皇帝 卽位式 前날 太皇帝(高宗)와 皇太子와 함께 모두 상투머리를 잘랐습니다(申報, 1907. 8. 27).

卽位禮式에 入參하는 官人도 모두 削髮하도록 特別 指示를 내렸습니다. 宮內府에서는 賀禮式까지 누구든지 削髮하지 않은 者는 闕門 出入을 許可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宮闕 안에 理髮所를 設置하고 官人의 斷髮을 團束했습니다. 元來 斷髮令은 明成皇后 弑害 事件 直後 日本의 强要에 依해 이루어진 이른바 乙未改革(1896)의 最大 課題였습니다. 當時 高宗은 스스로 먼저 머리를 깎은 後 斷髮令을 내렸지만 많은 百姓들이 痛哭하며 이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日本은 純宗이 새 皇帝에 오르는 자리에서 皇帝가 率先하여 斷髮을 하도록 强要했습니다. 그런데 純宗의 '斷髮詔勅' 以後 斷髮을 둘러싼 社會 雰圍氣가 乙未改革 때와는 사뭇 달라졌습니다. 大韓每日申報나 皇城新聞 等도 生活 改善 課題의 하나로 斷髮을 大體로 首肯하는 態度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各 地方의 郡守와 面長들이 斷髮을 決行했고, 各級 學校 學生들도 團體로 斷髮을 實施했다는 消息이 연이어 新聞에 報道되었습니다.

各地 人力車꾼들도 斷髮에 同參했습니다. '學生들이 斷髮 後 민머리를 負擔스러워 하게 되니 帽子를 購入하여 學生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申報, 1910.5.3)는 記事도 登場했스니다. 美國에서 發刊되던 新韓民報는 日帝 强占 直後 새로운 社會 風俗圖의 斷面을 보여주는 짤막한 記事(1910.10.19)를 실었는데, '平壤城 內에 머리 깎는 집이 10余 곳이 늘었다니 斷髮하는 風潮를 가히 알겠다'라는 內容입니다. 그리고 理髮所가 登場한 것입니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