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浪花情歌-神楽坂はん子///梁槿煥, 親日派 閔完植 處斷

bsk5865 2015. 6. 10. 20:13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5.06.10 06:48

 

浪花情歌-神楽坂はん子///梁槿煥, 親日派 閔完植 處斷(D)|★....演歌 게시판

黃圭源http://cafe.daum.net/enkamom/KTiH/7401 




浪花情歌-神楽坂はん子

作詩 西條八十 作曲 古賀政男 編曲 佐伯 亭


泣いた涙も うれしい夢も
みんな知ってる 川波瀬波
赤いネオンの 道頓堀も
あんたはん居なけりゃ 真の闇
ホンマダッセ ソウダッセ 寄ッテンカ


女ひとりを 三ずじの糸に
頼る春秋 今年も暮れる
雁が啼く啼く 大阪城を
眺めてくらすも あんたゆえ
ホンマダッセ ソウダッセ 寄ッテンカ


燃えるおもいを うち明けきれず
今日も別れる はかない握手
水の大阪 八百八橋
恋路の掛橋 なぜに無い
ホンマダッセ ソウダッセ 寄ッテンカ


梁槿煥, 親日派 閔完植 處斷

1921年 2月 16日 午前 9時 30紛 東京 鐵道호텔 14號室에서 國民協會 會長이자 時事新聞' 閔元植이 칼에 찔려 暗殺當했습니다. 日本 着物 옷차림의 靑年이 찾아와 "獨立運動을 해야 하는 때에 參政權 運動을 벌이는 것은 賣國奴"라면서 論爭을 벌이다가 處斷한 것입니다. 警察은 報道를 禁止한 狀態로 搜査를 進行하여 같은 달 24日 長崎에서 上海로 出港하려는 배를 타고 있던 梁槿煥을 逮捕했습니다.

閔元植은 1910年 1月 1日부터 '時事新聞'을 發行하던 親日派로, 1920年 4月 1日부터 같은 題號의 新聞을 두 번째로 發行하면서 '新 日本主義'를 主唱하던 人物이었습니다. 그는 일찍부터 新聞 發刊에 關心을 가져, 內部 衛生課長 때인 1907年 9月 '衛生新聞'(月刊)을 創刊했고, 1909年 10月에는 大同日報 社長이 되었다는 說도 있습니다.

'時事新聞'은 一進會 機關紙 '國民新報'와 한통속이라는 非難을 받으면서(皇城新聞, 1910.3.23., 大韓每日申報, 3.24.) 1910年 5月까지 100號가 發行되었으나, 强制合邦 後에는 韓國人 發行 新聞이 모두 門을 닫게 되었기 때문에 繼續할 수가 없었습니다. 1920年 總督府가 朝鮮人 發行 新聞 3種을 許可하여 朝鮮日報가 第一 먼저 3月 5日에 創刊되었고, 4月 1日 東亞日報와 時事新聞이 뒤를 이었습니다.

閔元植은 京畿道 驪州 出身으로 어려서부터 日本에 살았고, 福岡 所在 東亞學校의 敎師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20歲 때(1906年) 歸國한 뒤 伊藤博文의 눈에 띄어 舊韓國 內府 衛生課長, 帝室 會計審査委員을 거쳐 合邦 後에는 高陽郡守, 利川郡守를 歷任했습니다. 3•1運動 直後 每日申報에 '騷擾의 原因과 匡救例案(광구예안)'(1919.4.9.~16.)을 8回 連載하며 3•1運動을 批判했습니다. 같은 해 7月에는 8百 余名의 署名을 받아 朝鮮人의 參政權 請願을 目的으로 日本에 갔다 온 的도 있습니다.

美國에서 發行되던 '新韓民報'는 '맛당히 죽여야 할 閔元植'이라는 題目으로 "3月 以後로 怨讐의 歡心을 사려는 醜惡한 言論을 왜 新聞紙들에 發表하여 識者의 嘲笑와 靑年의 憤怒를 받던 高陽郡守 閔元植은 近日에 '新 日本主義'라는 怪惡한 宣傳書를 分布하여 倭敵의 창귀되는 職責을 完成하려 한다더라"고 批判했습니다. (新韓民報, 1919.11.27.)

梁槿煥은 28살 靑年이었습니다. 勞動을 하면서 日本大学 政治經濟科에 籍을 두고 日本 女子와 結婚하여 두 딸이 있었습니다. 梁槿煥이 逮捕된 後 無期懲役을 받아 服役하는 동안 그의 家族을 돕자고 募金하는 사람도 있다고 朝鮮日報가 報道했고(1921.8.17.), 4年 뒤에는 어머니와 딸을 訪問하여 消息을 알렸습니다(1925.4.15.).

梁槿煥은 13年 服役 中 減刑되어 1933年 2月 假出獄했습니다(假出獄 後 朝鮮日報를 訪問했을 때의 梁槿煥[中央], 오른쪽은 딸). 光復 後에는 親日派 剔抉과 反共을 目的으로 革新探偵社를 設立하고 ' 革新報'를 創刊했다가 이듬해 3月 '輿論新聞'으로 이름을 바꾸어 發行하였는데 韓國戰爭의 渦中에 北傀軍에게 被拉되어 拷問을 當하던 끝에 1950年 9月 15日 京畿道 坡州에서 後退하는 人民軍에 依해 被殺되어 風雲의 一生을 마쳤습니다. 閔元植이 暗殺當하자 일찍부터 讀者들로부터 外面當하던 '時事新聞'은 저절로 廢刊되고 말았습니다.

政府에서는 故人의 功勳을 기리어 1980年 建國勳章 獨立章을 追敍했습니다. 그리고 國家報勳處는 光復會․獨立記念館과 共同으로 ‘閔元植’을 處斷하여 日帝의 앞잡이들에게 警鍾을 울린 梁槿煥 先生의 誕生 115周年을 기리고자「이달의 獨立運動家」로 選定하였습니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