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8년 4월 6일 明治天皇은 신정부의 정치방침인 五箇条の御誓文을 발표하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국가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했는데 이것을 明治維新이라고 한다.
江戸幕府의 붕괴 후 일부 막부 세력의 저항이 있었으나,新政府는 이를 제압하고,연호를 明治로 정하고 1869년 수도를 東京로 옮겼다.
明治政府는 일본의 근대화를 위해 사민평등을 선언하고 藩을 폐하고 県을 설치하여 중앙에서 지방관을 임명 하면서 자연스럽게 지배권을 확립했다. 또한 서민들도 성(姓)을 갖게 하고,직업이나 주소도 자유롭게 옮길 수 있게 하였다.1872년에는 학제를 제정하여 6세 이상의 남녀가 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또한 太陽暦을 채택하고,단발을 하고 양복을 착용했다
明治政府는 서구 열강과 견줄 수 있는 부국강병 실현을 위해 경제발전과 군사력 증강에 의한 근대국가의 형성을 목표로 했다. 殖産興業政策의 실현 방안으로 서구의 근대적 기술과 기계를 도입하여 官主導의 관영공장을 세우고 광산을 개발하는 등 직영사업장 중심의 근대산업을 육성하였다. 또 철도 및 선박,전신,우편 등의 시설을 정비하고,금융단위로 円을 도입 하고 1882년 日本銀行을 설립하여 근대화 추진을 가속화하였다. 또한 군사력 증강을 위해 1873년 징병령을 발표하여 20세 이상의 남자에게 병역의 의무를 부과하고 이를 전제로 국민군을 조직하였다.
明治政府는 1889년 강한 군주력이 특징인 독일 프로이센 헌법을 모방하여 만든 大日本帝国憲法을 발포하고 이듬해 시행하였다. 大日本帝国憲法은 欽定憲法으로 의회의 권한이 제한되어 있었으며,의회는 법률을 제정하기 위해서는 천황의 재가가 필요한 기관으로 천황의 입법행위를 협찬하는 기관에 지나지 않았다.
제국의회는 明治時代 초기의 자유민권 운동과 의회개설운동의 영향으로 1890년 성립되었다. 의회는 貴族院과 衆議院으로 나뉘는 양원제로,첫 중의원 선거 당시 선거권 자 수는 전체 국민의 1%에 지나지 않는 극히 제한된 선거였다. 이는 국민의 의견이 국정에 반영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였다. 총선거 결과 民党이 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하면서 초기 의회는 군비확장을 추구하는 번벌의 超然主義 입장과 대립 각을 세웠다. 그러나 日淸戰爭 후의 최대 과제였던 전후 처리를 두고 내각과 제휴하면서 民党으로서의 입장을 포기했다.
明治政府는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받은 막대한 배상금의 80%를 군비확장에 쏟아 부으면서 제국주의의 발판을 마련했다. 또,배상금은 금본위제(金本位制) 시행의 원천이 되었다.
明治政府는 1902년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견제하기 위해 영국과 日英同盟을 체결하고 1904년 日露戦争을 일으켜 승리하면서,1906년 중국에 南満州鉄道株式会社를 세우고, 1910년 대한제국을 합병하면서 제국주의 강국으로 나아갔다.
明治時代는 서양의 근대문학 사상들이 들어와 일본 문학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사실주의와 낭만주의 문학이 등장했다. 1890년 森鴎外의 舞姫가 발표되어 자아의식의 자각과 인간성의 해방을 주장했다. 일본 근대문단을 대표하는 소설가 夏目激石는 吾輩は猫である(나는 고양이다). 坊ちゃん(도련님)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1912년 明治天皇의 뒤를 이어 大正天皇이 재위에 올랐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영국 과의 동맹관계를 이유로 전쟁에 참여해 중국에 있는 독일군사 기지를 점령하였다. 일본 경제는 전쟁특수로 인해 조선업, 섬유 업,제철업 등을 중심으로 공전의 성장을 이루었으며 정부는 러일전쟁 후 계속되었던 재정난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18년 戦後 투자설비의 과잉과 재고 적체로 경기가 악화되고,전쟁 중 금지되었던 금수출로 인해 일본은행은 대량의 금을 보유하게 되어 금본위제 기능도 상실되어 정부와 일본은행의 대책은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더욱이 1923년 발생한 関東大震災으로 경제회복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昭和時代를 맞이했다.
大正時代에는 도시를 중심으로 백화점으로 대표되는 소비문화,대중문화가 성립하였다. 도시에는 카페,레스토랑,영화관 등의 새로운 문화가 생겨나는 한편 슬럼이 형성되고,도시와 근대화의 혜택을 받지 못한 농어촌의 격차는 심해지고,노동항쟁이 격화되는 등 사회적 모순이 깊어졌다.
大正天皇의 뒤를 이어 1926년 昭和天皇이 즉위했다. 제1차 세계대전과 간토대지진으로 이어진 昭和金融恐慌에 이어 1929년 10월 미국 뉴욕의 주가 대폭락으로 이어진 세계공황은 일본 경제에 커다란 타격을 주어 기업이 도산하고 사회 불안이 증가했다.
1931년 일본군은 만주사변(滿州事쫓)을 일으켜 중국북동부를 점령 한뒤 1932년 만주국(滿州固)을 세웠다. 만주사변의 조사를 실시한 국제연맹이 만주국을 열강이 공동 관리할 것을 주장하자 이에 반대한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1932년 5월 해군의 청년장교가 부패정치를 개조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당시 수상을 암살하면서 정당정치는 끝이 나고 군인과 관료 내각이 시작되었다. 이후 1936년 2월 천황 친정(親政) 하에서의 국가개조를 목표로 육군 청년장교들이 수상관저와 정부 각료를 공격하여 사상자가 발생했다. 두 번의 쿠데타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지만,천황 중심의 정치를 실현하고자 한 일본 군국주의의 대두를 보여주었다.
정치적 권력을 획득한 일본 군부는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고,1941년에는 하와이의 진주만에 있는 미군 해군기지를 공격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1945년 8월 6일과 9일 広島와 長崎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결국 1945년 8월 15일 포츠담 선언을 통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하면서 마침내 종식되었다.
19세기 말부터 계속되어 온 일본 군부의 전쟁은 국민들을 전쟁터로 내몰아 많은 전사자를 냈으며,경제적으로도 엄청난 손실을 보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림과 동시에 일본도 평화헌법을 제정하고 戦後의 피해 복구에 힘을 쏟게 되었다.
식민지였던 조선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강제징병과 강제징용으로 전쟁에 동원되어 희생되었으며,젊은 여성들이 종군위안부로 끌려가 성적(性的)으로 혹사 당하는 전례 없는 잔인한 고통을 겪었다.그러나 당사자들은 이에 대해 일본 측으로부터 진실한 반성과 사과는 아직도 받지 못하고 있다. 생존해 있는 고령의 희생자들을 위해 무엇보다 신속한 해결이 절실한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