お駒雪化粧-笹みどり 作詩 水木れいじ 作曲 安藤実親 編曲 佐伯 亭
一 蝶よ花よと もてはやされて そんな昔が 懐かしい 器量ばかりで 実らぬ花か お駒うす紅 黄泉路の旅化粧
二 恋とのれんの 両天秤じゃ しょせん渡れぬ 憂き世川 人目忍んだ 閨の灯も 浮いた浮いたの 夢も消え 今日は罪の瀬 おぼれ舟
三 才三ひとりと こころに決めて 解いた十九の 初島田 誰の筋書やら からくり芝居 お駒なみだで 爪びく 三味の弦
(セリフ) もう想い残すことなんて あるもんか みれんも無い…怨みも無い… この世のことは 水に流して むこう岸 あの人が…あの人が… きっと私を 待っているからね
四 誰に見せましょ 女の意地を わかれ絵すがた 黄八丈 これが この世の見おさめ橋に…… お駒いのちか ひとひら春の雪
돌아온 敬天寺 石塔 日本이 掠奪했던 數많은 文化財 가운데 가장 큰 論難을 불러일으켰던 寶物은 京畿道 豊德郡 敬天寺 10層 石塔이었습니다. 1348年 高麗 忠穆王 때 세워진 石塔은 素材가 大理石이지만 精鍊한 技巧 德分에 玉塔으로 불렸습니다. 石搭 奪取를 主導한 人物은 日本 宮內大臣 田中光顕(たなかみつあき)였습니다. 그는 1907年 1月 24日에 擧行되는 皇太子(純宗)의 結婚 祝賀를 爲해 日本 國王 特使資格으로 韓國에 왔다가 文化財를 强奪해 갔습니다.
田中光顕의 石塔 奪取는 組織的이고 大規模였습니다. 軍隊를 動員하여 아름다운 塔을 한 조각씩 들어내려 鐵道便으로 濟物浦까지 運搬한 뒤 待機 中이던 배에 실어 日本으로 가져갔다고 '워싱턴 포스트'(1907.6.2.)가 報道했습니다. 軍隊가 아니고 銃과 칼을 든 民間人들이었다는 說도 있습니다.(新韓民報, '玉塔 奪去의 수말', 1907.7.5., 7.12.) 어쨌건 田中는 塔의 奪取에는 成功했지만 文化財 不法奪取를 强力하게 糾彈하는 逆風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日本의 文明破壞的 野蠻性을 가장 積極的으로 糾彈하고 나선 사람은 高宗의 外交 諮問官이었던 美國人 헐버트(H.B.Hulbert)와 英國人 大韓每日申報 社長 배설(E.T.Bethell)이었습니다. 헐버트는 日本 고베에서 英國人이 發行하던 '재팬 크로니클'과 美國 新聞에 日本이 恣行하는 掠奪 行爲의 본보기로 이 事件을 알렸습니다. '韓國에서의 文化破壞'(재팬 크로니클, 1907.4.4.), '사라진 塔과 다른 事件들'(4.18.) 等을 잇달아 寄稿하여 日本의 文化財 侵奪을 糾彈했습니다.
美國 言論도 同調했습니다. 美國 駐在 日本大使 青木周藏(あおきしゅうぞう)는 7月 2日字로 外務大臣 林董(はやしただす)에게 報告書를 보냈습니다. '美國 言論이 5月 19日부터 田中의 窃盜行爲를 批判하는 記事를 퍼뜨리고 있었습니다. 田中에게 뒤집어씌운 汚名은 結局 日本에 非友好的인 與論 形成으로 連結될 수 있음을 憂慮한다'는 要旨였습니다. 代表的인 例로 워싱턴 포스트(WP) 6月 2日字 記事를 添附했습니다.
'日本, 400年 後에 韓國의 有名한 塔 窃盜에 成功하다'(1907.6.2.)〈寫眞〉라는 題目의 WP 記事는 壬辰倭亂 때 파고다 公園의 塔을 强奪하려 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日本이 드디어 이번에는 成功을 거두었다는 內用이었습니다.
記事는 問題의 塔을 그림으로 紹介했습니다. 豊臣秀吉 軍隊가 奪取하려고 上段 3層까지 解體했다가 가져가지 못했다는 파고다 公園의 大理石 搭〈誌面의 왼쪽 그림〉과 日本으로 搬出한 敬天寺 石塔〈오른쪽 그림〉을 나란히 對比한 것이었습니다. 大韓每日申報는 "敬天寺에 있던 玉塔을 찾으매 靑山이 말이 없도다. 이대로 가다가는 韓國의 보배가 모두 東京博覽會場이나 오사카의 古物商 物件이 되고 말 것이다"라고 嘆息했다.(1910.4.12.)
日本에서도 田中를 批判하는 新聞과 雜誌가 많았습니다. 國內外의 非難을 意識했던 初代 總督 寺内와 2代 總督 長谷川는 塔의 所有가 總督府임을 내세워 返還을 要求한 끝에 1919年 國內로 되돌려 왔습니다. 悲運의 石塔은 긴 歲月 景福宮 안에 放置된 채로 光復을 맞았고, 1959年에야 復元作業이 始作되어 이듬해 原來 모습을 되찾으면서 國寶로 指定되었다. 2005年 龍山 國立中央博物館으로 옮겨졌습니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