戦国時代의 막을 내린 것은 작은 尾張国의 領主에 지나지 않았던 織田信長였다 그는 남다른 지략과 전술로 여러 나리를 정복하고 동맹관계를 맺으면서 세력을 넓혀 京都로 진출,1573년 将軍 足利義昭를 추방함으로써,명분상으로만 존재하던 室町幕府를 종식시켰다.
信長는 1576년 安土城을 축조하고,그 후 계속하여 반대 세력을 제거하여 일본의 전국통일을 목전에 둔 1582년 本能寺에서 家臣 明智光秀의 습격을 받고,本能寺에 불을 지르고 불 속에 뛰어들어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이를 本能寺の変이라고 한다.
信長의 부하였던 羽柴秀吉는 明智光秀를 무찌르고 信長의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굳힌다. 1586년 太政大臣에 오른 秀吉는 豊臣라는성(姓)을 하사 받고,1590년 일본 통일의 업을 이룩한다.
권력을 잡은 秀吉는 농민의 거병을 막기 위해 칼,창,철포 등의 무기를 징수하여 농민의 무기소지를 금하여 무사와의 신분 구별을 확고히 하였다. 또한 전국적으로 농지의 상태,면적,수확고,경작 농민 등을 조사하여 경작자에게 과세하고 경작자가 직접 영주에게 납세하는 방식을 취하면서 장원제를 폐지하는 등 정권의 안정에 힘을 쏟았다. 秀吉는 명나라를 정복하고자 두 번에 걸쳐 조선을 침략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信長와 秀吉가 통치했던 시기를 信長의 거점이었던 安土城과 秀吉의 거점이었던 桃山城에서 따와 安土•桃山時代라고 한다. 이 시기의 문화는 거상(巨商)의 등장으로 호화롭고 웅장하다. 다도가 유행했으며,또한 조선에서 끌려간 도공과 활자 기술자들에 의해 도자기와 인쇄술이 발달하는 기초가 마련되었다.
豊臣秀吉의 사후,정권을 손에 권 것은 徳川家康였다. 家康는 1600년 関ヶ原の戦い에서 石田三成를 제압하고 1603년 江戸에 막부를 설치했다. 이후 1867년까지 약260년간을 江戸時代라 한다.
江戸幕府는 京都,大阪,長崎 등 주요 도시와 항만,광산 등을 막부가 직접 지배하였다. 직영 지를 제외한 곳에는 300여 개의 藩을 설치하고,막부의 규정 하에서 각 藩의 자치를 인정하는 幕藩体制를 실시했다. 영지(領地)는 将軍이 지정했으며, 参勤交代 와 유명 大名들의 改易 제도 등을 통해 大名와의 주종관계를 확고히 다졌다 또한 막부는 적은 수의 무사가 백성을 지배하기 용이하도록 士農工商의 신분제도를 만들었으며,세금 확보를 위해 술과 차를 금지하는 등 농민의 생활을 세세하게 규제하였다.
江戸幕府는 크리스트교가 국내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면서 이것이 스페인,포르투갈의 침략을 초래할 것을 염려하여 禁敎令을 내려 선교사를 추방하고,신자들에게 박해를 가하는 한편,스페인,포르투갈과의 무역을 금하는 쇄국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쇄국정책 중에서도 중국 조선과의 교류는 계속되었으며,조선통신사는 두 나라의 문화적 교류의 창구역할을 하였다.
18세기 들어 막부의 재정이 만성적으로 악화되자 재정 재건을 위해 여러 개혁을 추진했으나 효과는 미미하였다. 무거운 세금에 항의하는 농민봉기가 잇따르고 경제의 발달로 농촌에서도 화폐가 쓰이게 되자 빈부의 차이는 더욱 확대되고 신분을 파는 무사가 등장하는 등 신분제가 흔들리고 幕藩体制는 변질되어 갔다.
江戸幕府는 1854년 미국과 日米和親条約을 맺고 下田와 函館 두 개의 항을 개항하면서 쇄국정책을 마감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 계속해서 다른 나라와의 조약에 의해 개항이 이루어지면서 将軍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薩摩藩과 長州藩의 하급무사를 중심으로 천황을 존경하고 막부를 타도하자는 尊王倒幕운동이 일어났다. 결국 1867년 15대 将軍、慶喜가 천황에게 정권을 돌려 주면서 江戸幕府는 막을 내렸다. 이로써 鎌倉幕府설치 이후 70년 가까이 이어져 온 무가정치가 끝나게 된다.
막부는 서양과 교류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한편 長崎의 出島에서는 네덜란드와의 교역을 허가하였다. 長崎에 들어오는 중국문화와 서양문화는 지식인의 호기심을 자극하였고,이로 인해 洋学과 의학,한방의학이 발달했다. 이러한 흐름은 막부 말 제국주의 시대의 팽창정책에 의한 欧米 열강의 접근에 대응하는 힘이 되었고 開国의 원동력이 되었다.
江戸時代의 문화는 町人의 문화로,문학은 소설문학을 중심으로 발달하였으며,俳句라는 새로운 형태의 짧은 정형시가 등장했다.

京都에서는 염색 기법의 하나로 인물,꽃,새 등의 화려한 무늬가 특징인 友禅染이 발달하고 有田와 九谷 등에서는 일본을 대표하는 도자기가 만들어졌다 신사에서 춘 춤에서 시작되었던 歌舞伎도 江戸文化를 대표하는 것 중의 하나이다. 또한 浮世絵라는 판화그림은 19세기 후반 유럽의 인상파 화가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막부는 무사의 자녀들에게 朱子学을 교육했으며,寺子屋라는 교육기관이 생겨 서민도 교육 받을 기회를 얻었다. 寺子屋는 서민의 아이들에게 읽기와 쓰기,계산 등을 가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