いのちの旅路-竜鉄也 作詞 竜鉄也 作曲 竜鉄也
一 行く手さえぎる 闇夜がこわい 深い谷間に 流されて のぞみはかなく 影かなし 見えぬかがみの 姿に泣いて 暗いさだめの 旅の始り
二 浮世わびしい 奈落の底へ いっそ捨てたい この命 生きて行くには つらすぎる 灯りがほしい 叫んでみたが 夢もちりぢり 消えゆくままに
三 人にふまれて 恨んだことも たえてしのんだ 手さぐりの 旅路はるかな うたのみち 作り笑顔に なみだのちかい 晴れて日のさす 男の夜明け
昌德宮 樂善齋 ‘나는 樂善齋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殿下,妃 殿下 보고 싶습니다.
알쏭달쏭한 퀴즈 하나. 朝鮮의 宮闕에는 언제까지 사람이 살았을까? 答은 1989年입니다. 不過 20余 年 前까지만 해도 王의 居處였던 大闕에는 朝鮮의 王族이 居住했습니다. 그 主人公은 高宗이 環甲에 이르러 얻은 德惠翁主였습니다. 1912年 德壽宮에서 태어난 그는 昌德宮에서 波瀾萬丈한 삶을 磨勘했습니다.
‘德惠翁主’는 올해 初 村上春樹(むらかみはるき)의 ‘1Q84’를 제치고 베스트셀러 1位에 오른 권비영의 歷史小說 題目이기도 합니다 이 小說은 지금껏 잘 알려지지 않았던 人物인 德惠翁主에 對한 好奇心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의 生涯는 20世紀 初盤의 昏亂스러웠단 國內 狀況처럼 슬픔과 恨으로 點綴됐습니다. 德惠翁主에게는 平生‘亡國의 公主’라는 굴레가 따라다녔습니다.
高宗은 막내 딸이었던 德惠翁主에게는 그에게는 끔찍이 아꼈으나 지키지는 못했습니다. 高宗이 昇遐한 뒤 植民地 政府는 朝鮮王朝의 正體性을 지우기 爲해 德惠翁主를 日本으로 보냈고,그는 願치 않는 結婚을 하며 精神病을 앓았습니다. 光復 以後 故國으로 돌아오는 過程도 順坦치 않아 李承晩 政權이 물러난 以後에야 歸國할 수 있었습니다.
樂善齋는 日本에서 生活하던 德惠翁主가 어린 時節을 떠올리며 그리워하던 空間입니다. 小說에는 “내가 살던 昌德宮에는 아름다운 後園이 있었지. 봄이면 華奢하게 꽃이 피고 라는 文句가 登場합니다. 德惠翁主의 말처럼 4月 初旬이 되면 昌德宮은 多樣한 꽃들이 망울을 터뜨립니다. 그 中 樂善齋의 梅花는 觀纜池(관람지)의 生薑나무 꽃과 함께 봄의 傳令使 役割을 합니다. 梅花꽃이 지면 樂善齋에는 살구꽃과 앵두 꽃이 次例로 滿發합니다.
事實 樂善齋는 壬辰倭亂이 끝난 뒤 朝鮮의 正宮으로 機能했던 昌德宮에서 比較的 歷史가 짧은 建物입니다. 正面 6칸,側面 2칸의 單層 기와집으로 本來 1847年 後宮의 處所로 세워졌습니다. 君子의 德目 中에 서도 으뜸이 되는‘善’을 줄 긴다는 뜻으로 임금이 善行을 베풀면 世上이 즐거워진다는 意味가 숨어 있습니다.
昌德宮에서 王과 王妃의 處所는 大造殿이였습니다. 그런데 1917年 境內에 큰불이 나자 純宗은 樂善齋로 居處를 옮깁니다. 以後 樂善齋는 王朝의 마지막을. 傳하는 建築物이 됩니다. 純宗의 妃였던 純貞孝皇后,純宗의 異腹同生이자 韓末의 마지막 皇太子인 英親王, 德惠翁主,英親王과 婚姻했던 李方子가 모두 樂善齋를 비롯한 附屬 建物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樂善齋 周邊에는 純宗이 誕生한 觀物軒,德惠翁主가 起居했던 壽康齋,純貞孝皇后가 머물었던 錫福軒,闕內를 굽어볼 수 있는 翠雲亭 等이 있습니다. 大部分이 朝鮮時代 後期에 建築됐는데,樂善齋와 이어져 있는 錫福軒과 壽康齋는 昌德宮의 다른 建物에 比해 수수한 便입니다.
2006年 補修를 마치고 特別 觀覽 形態로 開放됐던 樂善齋는 自由롭게 둘러볼 수 없습니다. 20名이 무리를 지어 解說士와 함께 移動하는데,每日 午前 10時 30分과 午後 4時에 觀覽이 始作됩니다. 文化財廳은 5月 1日부터 昌德宮의 自由觀覽을 推進할 方針이지만,樂善齋는 後園의 玉流川과 함께 立場이 統制됩니다.
昌德宮 自由觀覽 時 눈여겨봐야 할 곳은 芙蓉池입니다. 小說에서 德惠翁主가 어머니인 貴人 梁氏와 봄나들이를 하던 곳입니다. 王이 科擧에 及第한 선비들에게 酒宴을 베풀던 연못으로도 傳해집니다. 한 邊의 길이가 大略30m인 直四角形인데,못 中央에는 소나무가 있는 동그란 섬이 位置해 東洋的 世界觀인‘天圓地方’을 具顯합니다. 雰圍氣가 閑暇한 봄날 午後 천천히 거닐기 좋습니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