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人物函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6.06.06 08:39
퇴계 이황의 결혼 생활|▶....韓國 文學 싸롱
퇴계 이황의 결혼 생활
저는 두 번 장가들었는데 한 번은 불행이 심한 경우를 만났지요.
그러나 이러한 처지에도 마음가짐을 감히 박하게 하지 않고
힘껏 잘 지내려고 노력한 지가 무려 수십 년이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마음이 괴롭고 생각이 산란하여
그 번민을 견디기 어려운 때도 있었습니다만
어떻게 마음대로 하자고 큰 인륜을 소홀히 하여
홀어머니께 걱정을 끼칠 수가 있었겠습니까?....1장
이 편지는 퇴계가 후학인 이함형(李咸亨)에게 보낸 것이다.
이함형 내외는 금슬이 좋지 않아 서로
상면(相面)하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퇴계는 그 사실을 알고 그가 하직하고 물러날
즈음에 편지를 써서 봉투에 넣고 겉봉에는
"도차밀계간(道次密啓看)길을 가다가 가만히 열어보라"는
다섯 자를 써서 주었다.
편지를 보고 이함형은 깊이 회개하고 깨달아
부부의 도리를 다하기 시작했다고 한다....2장
그렇다면 제자를 깨우친 퇴계의 결혼 생활은 어떤 것이었을까?
퇴계는 21세에 결혼하고 7년 만에 상처한다.
두 번째 부인은 3년 뒤인 30세에 얻는데,
이 권씨 부인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퇴계선생 두번째 부인...(권씨 부인)는 갑자사화의 피해를
고스란히 당했던 집안의 후예였다.
그녀의 조부인 권주(權柱)는 갑자사화 때 사약을 받았으며,
조모는 사약이 내려졌다는 기별을 받고 자결했다.
아버지 권질(權礩)도 거제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후 아버지가 풀려나 권씨 부인의 집안은 안정이 되는가 싶더니
신사년(1521) 무옥으로 또 풍파를 겪었다.
숙부가 죽고 아버지가 다시 귀양을 가고, 숙모는 관비로 끌려갔다.
권씨 부인은 어린 나이에 참극을 목격하고 그 충격으로
정신이 혼미해지더니 영영 회복되지 않았다고 한다.
퇴계가 "불행이 심한 경우를 만났다"는 것은 부인과
그 가족의 불행을 일컫는 것일 수도 있지만,
결국은 불행한 부인으로 인한 퇴계 자신의 불행을 일컫는 것이리라.
전해오는 말로는 퇴계 선생이 당시 고향인 예안에 귀양 와 있던
권씨 부인의 아버지 권질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권씨 부인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권질은 상처한 퇴계 선생에게
과년한 딸이 정신이 혼미해서 아직 시집도 못 가고 있는
형편을 말하고는 맡 아 줄 것을 부탁했고, 퇴계 선생도 승낙했다.
퇴계는 당시 서른 살로 앞길이 구만 리 같은 학자였다.
그런 그가 정신 장애가 있는 여성을 후처로 삼았다.
이 이야기는 과연 사실일까? 나는 꽤나 그럴 듯한 이야기라고 본다.
아무리 전통 혼례가 간접적으로 혼담이 오가는 방식이라 하더라도,
혼인 당사자의 치명적 결함에 대해서는 숨기기 어려웠다.
신부가 치명적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안 상태에서 혼례가 이루어졌다면
이런 혼례에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것이고 그 사정은 아마도
신부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 정도가 아닐까.
간곡한 부탁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들어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퇴계는 그 부탁을 수락했다. 아무리 퇴계라고 하더라도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정신 장애 여성을 부인으로 맞을 것을 부탁하고, 또 그것을
수락해 혼인을 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퇴계의 인격에
대한 권질의 믿음과 그런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퇴계의 인품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나는 이 결혼에는 그 외에 또 다른 것, 현대와는 다른 혼인관이
관여했다고 본다. 조선시대에 부인은 남성에게 역할로서 기억되며,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에게 친밀한
의사소통의 대상이기보다는 공경과 예의의 대상이 되는 것이 중요했다.
퇴계에게 왜 바보 부인을 맞았느냐고 물어보는 구전 설화가 있다.
퇴계는 이렇게 답한다.
"그 사람을 데리고 살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 구실을 하게 만들어야지요....3장
이런 이야기가 생성될 수 있는 배경에는 부부 사이의 불평등이
작용하고 있다. 저명한 유학자에게 부인은 가르침을 전하는
또 다른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퇴계 선생은 권씨 부인과 17년 동안 결혼 생활을 했다.
이 결혼 생활에 대해서는 또 다른 이야깃거리가 있다.
퇴계 부인이 얼마나 침선 솜씨가 없었는지 보여주는 이야기들이다.
퇴계는 빗자루 같은 버선을 신고 다녔다고 하기도 하고,
하얀 도포에 빨간색 천으로 기운 옷을 입고 다녔다고 하기도 한다.
(부인이 바느질 솜씨가 없어서...!")
이런 이야기들은 퇴계의 인품을 증명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는 빗자루 같은 버선과 얼룩덜룩한 옷을 군소리 없이 입고 다녔다.
그가 항상 불평 없이 그런 버선을 신거나 옷을 입자 심지어는
제자들과 동료들 사이에서 퇴계 패션이 유행했다고까지 한다.
실제로 퇴계가 바보 부인을 박대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녀에 대한
사후 예로 증빙된다. 후처가 죽자 퇴계는 전처소생의 아들에게
적모복(嫡母服)을 입게 했으며 시묘도 시켰다.
그리고 자신은 권씨 부인의 묘소 건너편 바위 곁에 양진암을 지어
1년 넘게 머무르면서 부인의 묘를 지켰다....4장
나를 감동시킨 것은 이런 사후의 예도 있지만, 권씨 생전 그들 부부에
대한 에피소드다. 정신 장애를 가진 아내가 한번은 제사상에서 떨어진
배를 얼른 치마 속에 감추다가 손윗동서에게 들켰다.
퇴계는 아내 대신 형수에게 사죄한 후 아내를 방으로 불러 연유를 물었다.
배가 먹고 싶어 그랬다고 하자 퇴계는 그 배를 꺼내게 한 후
손수 깎아주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실수에 대한 훈계도, 제례(祭禮)에 대한 설명도 없었다.
퇴계는 제사라는 엄숙한 순간에도 일차적 욕구에만 충실한 부인을
그 자체로 인정했다. 이런 것이 퇴계가 부인에게 보낼 수 있는 예의와
공경이 아니었을까? 이 이야기 역시 퇴계의 인품을 보여주기 위한
허구일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부인에 대한 배려를 통해
퇴계의 인품을 보여주는 방식을 이렇게 효과적으로 구사한
그 누군가에게 대신 존경을 보낸다.
- 출처: net.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