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B.C.300 彌生[야요이]시대-(청동기시대)
기원전 3세기경 한반도 남부로부터 농경문화의 영향을 받아 북큐수를 중심으로 벼농사와 금속기를 사용하는 새로운 문화가 일어나 일본열도에서 처음으로 농경사회가 성립하였다.
죠몬 토기 대신 야요이토기가 이용되었기 때문에 이 시대의 문화를 야요이 문화라고 부른다.
중국에서는 한민족이 황하유역의 농경문화를 기초로 고도의 문명을 발전시켜 기원전 4세기경 철기시대에 도달하고
기원전 3세기에는 동아시아 최초의 통일국가인 진이 출현하였다.
이어서 강대한 한제국이 성립하여 주변 제국가, 제민족에게 정치적으로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정치, 문화적 파급에 의해 제민족은 특색있는 농경과 금속문화를 발전시켜 나가게 되었다.
농경문화와 더불어 직물의 기술도 전해졌다.
이것이 일본열도에 전해진 것은 주로 한반도 남부로부터 집단적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에 의해서였다고 생각된다.
한반도 남부의 것과 같은 형의 지석묘가 북큐슈에서 자주 발견되고, 서일본의 야요이시대 전기 지석묘에서 발견되는 인골의 평균신장이 죠몬시대 인골의 그것과 비교해 볼 때 한반도 남부인의 신장에 가깝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도래자수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죠몬시대 이래의 일본열도의 인종을 완전히 변화시킬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다만 북큐슈에서 발견된 최고 형식의 야요이 토기에 자주 그 지역 최후의 죠몬 토기가 동반하여 출토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일본 재래의 사람들이 도래한 사람들과 접촉ㆍ융합해서 죠몬 문화를 변질시켰다고 추정된다.
북큐수에서 발생한 야요이 문화는 츄고쿠, 시고쿠로부터 긴키지방까지 급속히 퍼져 나갔는데, 중부지방 동쪽에 야요이 문화가 미쳤던 것은 중기 이후의 일이다.
그 이유는 동일본의 자연조건이 서일본에 비해 농경재배에 적합하지 않고,
동일본 사회에서는 수렵ㆍ어로경제의 전통이 강했기 때문에 새로운 생산경제로의 전환에 시간이 걸렸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야요이시대 후기까지는 동북지방의 일부와 훗카이도를 제외한 전일본에서 벼농사가 행해지게 되었다.
-야마타이국-(우리나라의 연맹 왕국 시대)
3세기 초 중국에서는 한제국이 멸망하고 위ㆍ촉ㆍ오 의 삼국시대가 되었다.
이 시기에 일본열도에서는 2세기 중ㆍ후반에 소국들 간의 격렬한 항쟁이 벌어지는 대란이 발생하였다.
이 대란의 과정에서 여러 소국은 보다 큰 국으로 통합되어 30여국으로 축소되고 나아가 유력한 정치집단에 의해 광역의 정치적 통합이 진행되었다.
여기에서 30여국 수장들의 추대를 받아 야마타이국의 여왕 히미코를 맹주로 하는 연맹왕국이 탄생하였다.
여왕 히미코는 영적 능력을 지닌 사제자적인 수장이며 종교적인 권위에 강하게 의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지』왜인전에 의하면 히미코는 남편이 없고 남동생이 정치를 보좌했다고 한다.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관리를 파견하고 특히 북큐슈 연안의 이토국에는 일대솔이라는 검찰과 외교의 기능을 담당하는 관을 설치하였다.
국내에는 왕을 정점으로해서 대인, 하호, 노예 등의 신분질서가 있고 법 질서와 권력구조, 그리고 세제도 정비되어 어느 정도 국가의 형태를 갖추었다.
여왕은 239년에 중국의 위에 사자를 파견해서 위의 황제로부터 친위왜왕이라는 칭호와 금인자수와 동경100매를 하사박았다.
히미코의 사후 이요라고 부르는 여왕이 즉위하여 위와 통교했지만, 266년 위에 이어서 건국한 서진에의 견사를 최후로 야마타이국의 소식은 끊기고 이후 약 150년간 중국사서에서 왜국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3. A.D.300 大和[야마토]시대-우리나라의 삼국시대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에 세토내해 연안으로부터 기나이에 걸쳐서 고분이 조영되기 시작하였다.
고분은 특정 개인을 위한 커다란분구를 갖는 분묘이기 때문에 고분의 발생은 야요이 시대의 소국간의 항쟁, 지역적 통합의 과정에서 커다란 권력을 갖는 지배자가 출현한 것을 말해주고 있다.
초기의 고분의 대부분은 전방후원분이라고 불리우는 독특한 형태를 갖고, 그 규모도 거대하였다.
이 고분은 평야를 바라보는 구릉의 정상부나 산록에 조영되었고, 분구의 위에는 인물, 가옥, 동물 등 다양한 모양의 하나와로 장식하고 고분의 주위는 원통 하니와로 둘렀다.
분구의 내부에는 장대한 목관을 안장한 수혈식석실이 조영되었고 동거울, 옥, 장식품, 동촉, 철제의 무구ㆍ농구ㆍ공구 등이 부장되었다.
이들 고분은 4세기 중엽에는 큐슈 북부에서 중부지방까지 확대되었는데 특히 야마토를 중심으로 한 기나이에는 거대한 고분이 집중하고 있다.
4세기 말에서 5세기에 걸쳐 고분의 분포는 도호쿠 남부까지 미치게 되었다.
이 시기의 고분은 평야에 분구를 만들고 주위에 구덩이를 판 거대한 것이 많고 특히 오사카 평야에 있는 곤다야마 고분, 다이센 고분은 전장이 450미터가 넘는 거대한 것이었다.(경주 고분들을 생각하게 한다.)
이러한 거대한 고분의 조영은 그 지배하의 민중을 동원해서 향해진 대사업이고 그 지역의 수장의 권력, 즉 야마토정권의 위세를 상징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 시기에 게누, 쓰쿠시 등의 지방에도 거대한 고분이 조영되고 있어 각지에 지역정권이 출현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5~6세기에는 한반도나 중국대륙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건너와 일본에 살게 되었다.
(카즈오 교수는 야요이-나라시대에 걸친 천년동안에 한반도로부터 백만명에 가까운 이주민이 있었다는 설을 제기하고 있다.)
이 사람들을 일본에서는 통상 도래인(渡來人), 혹은 귀화인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토목, 양잠, 직물 등의 전문적인 일에 종사 하거나, 관청에서 한자를 사용하여 기록이나 계산, 외교문서 작성 등을 했기 때문에, 앞선 기술이나 지식을 통하여 일본인의 생활의 진보에 큰 공헌을 했다고 보여진다.
유교가 서적과 함께, 불교가 경전이나 불상들과 함께, 중국으로부터 한반도를 경유하여 일본에 전파된 것도 이 때의 일이다.
이것들이 모두 일본인의 학문, 사상, 종교, 예술등의 초석이 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6세기 중엽 가장 유력한 호족 세력이었던 모노베씨(物部氏)와 소가씨(蘇我氏)가 정권쟁탈전을 벌인 결과, 불교의 수용에 적극적인 소가씨가 보수적 세력인 모노베씨를 누르고, 조정의 정치를 거의 독점하게 된다.
또한 이 때 쇼오토쿠태자(聖德太子)가 천황을 대신하여 정치를 하는 섭정에 취임(593), 그는 소사씨 등의 호족과 손잡고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의 기초를 닦기위해 노력했다.
우선 관위 12계를 만들어서 관리들의 순위를 정하고, 능력있는 자를 관리로 발탁했다.
또한 불교와 유교 사상을 받아들여 헌법 17조를 제정했다. 그것은 「화합이 중요하다」「부처님을 공경하라」는 따위의, 천황을 모시는 관리들의 마음가짐을 기술한 것으로서, 오늘날의 헌법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그는 또 사신과 유학생등을 중국에 파견 (견수사), 선진문화의 수입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쇼오토쿠태자는 독실한 불교신자였기 때문에, 불교를 널리 전하기 위해서 야마토의 이카루(斑鳩)에 호오류우지(法隆寺)를 세웠다.
이 절은 한번 불이 났지만 곧 재건되어,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의 하나로 인정되고 있다.
호오류우지에는 석가삼존상을 비롯하여 훌륭한 미술·공예품이 보존되어 있으며, 호오류우지 뿐만 아니라 나라에 있는 츄우구우지(中宮寺), 쿄오토에 있는 코오류우지(廣隆寺)에도 예술성이 뛰어난 미륵보살상이 남아 있다.
이 시대의 문화는, 야마토의 아스카(飛鳥)나 이카루를 중심으로 번성했기 때문에 아스카문화라고 부른다.
아스카문화는 대륙의 영향이 강하여, 멀리 그리이스나 서아시아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도 적지 않다.
쇼오토쿠태자의 사후, 소가씨들의 세력이 더욱 강화되어, 그들의 전횡이 극에 달하자, 황태자인 나까노 오오에(中大兄)와 호족의 한 사람인 나까토미노 카마타리(中臣鎌足) 등은, 645년 소가씨를 제거하고 새로운 정치의 장을 열었다. 이것을 大化의 改新(타이카 개신)이라고 한다.
大化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제정된 연호이다. 대화개신은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체제를 확립했다.
그 내용은 호족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와 인민을 모두 천황이 소유하는 것으로 전환시키고(公地·公民化), 호족은 도읍이나 지방의 관리로 만들어 버렸다.
중앙집권화
중앙정부에는 제사를 관장하는 신기관(新祇官)과 정치를 담당하는 태정관(太政官)의 2관과 8省을 설치하고, 지방에는 중앙정부가 임명한 관리가 국사(國司)라는 이름으로 파견되었다.
모든 인민을 호적에 등록시키고, 그에 따라 일정한 토지(口分田)를 나누어 주었다.
토지에 따라 쌀이나 천으로 세금을 조정에 내게하고, 사람이 죽을면, 토지를 반납하게 했다.
그 밖에도 남자에게는 도읍이나 지방의 토목공사 등에서 일해야 하는 노역의 의무가 부과되었으며, 도읍지나 큐우슈우의 국경을 경비하는 병역의 의무도 있었다.
4. 593 飛鳥[아스카]시대-백제 성왕이후
불교의 전래로부터 쇼토쿠 태자의 시대를 중심으로 약 1세기간은 왕도가 나라현 아스카 지방에 있었기에 때문에 아스카 시대라 하고 그 문화라 한다.
아스카 문화는 불교문화가 중심이고 백제를 비롯한 한반도 제국의 영향이 컸다.
쇼토쿠 태자는 불교에 의해 일본문화를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불교사원으로서는 소가씨의 발원으로 일본 최초로 아스카지(飛鳥寺)가 세워지고 여기에 고구려승 혜자와 백제승 혜총을 주지케 하였다.
이어 쇼토쿠 태자의 발원에 의해 시텐노지ㆍ호류지 등을 시작으로 호족들도 다투어 우지데라를 건립했다.
그 중에서도 호류지(法隆寺)는 5층 탑과 대부분의 회랑은 이 시대의 건축양식을 금일에 전하여 현존하는 세계최고의 목조건축의 유구로 알려져 있다.
당시의 불사로서 저명한 구라쓰쿠리노 토리는 호류지 금당의 석가삼존상을 만들었다.
이외에 고류지와 츄구지의 반가사유상과 호류지 몽전의 구세관음상, 백제관음상 등은 이 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회화에서는 고구려승 담징에 의해 채색법 도구, 종이ㆍ묵의 제조법이 전해지는 등 한반도로부터 새로운 기법이 전래되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백제승 관륵은 역을 전하여 이로부터 연월의 경과를 기록할 수 있게 되어 역사서와 제기록의 발달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5. 710 奈良[나라]시대-통일신라시대
710년, 일본은 당의 장안을 본떠 나라에 헤에죠오쿄오(平城京)라는 수도를 건설하였다.
이 헤에죠오쿄오는 약 70년간 수도로서 번영했는데 이 시기를 나라 시대라고 한다.
나라 시대는 천황에 의한 율령정치가 행해졌다.
율령정치의 근본은 공지(公地)·공민(公民)제도였으나 귀족들의 간전영년사재법(토지를 개간한 자에게 토지를!) 악용으로 붕괴되고, 이로써 대토지를 소유하게 된 귀족들과 승려들은 막강한 정치권력을 소유하게 된다.
나라 시대 중반에 가면, 흉년과 전염병이 계속되어 민심이 흉흉해지고, 귀족들과 승려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이에 쇼오무 천황은 불심으로 이를 극복하고자 나라에 토오다이지(東大寺)를 세우고, 그 안에 높이 16m 가량의 금동대불을 만들었다.
일본 조정은 7∼9세기까지 총 13회 중국에 견당사를 파견하여 당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다.
이 시대의 문화는 텐표오(天平) 문화라고 하는데 불교에 의한 정치를 이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불교 문화가 대단히 발전했다.
또한 대체로 귀족적인 성격을 갖는 문화였지만 <만요오슈>(萬葉集)같은 전국민적 생활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도 나왔다.
8세기 천황 가문의 정통성을 역사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국사편찬사업이 활발히 진행되어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편찬되었다.
이 두 권의 책에는 신화와 국토 통일에 관한 전설 등이 실려 있다.
6. 794 平安[헤이안]시대-신라 하대~고려 중기
칸무 천황은 율령 정치를 다시 회복하고자 794년에 헤이안쿄오(지금의 쿄오토오)로 천도하였는데, 이후 가마쿠라 막부가 세워지기까지 약 400년간을 헤이안 시대라고 한다.
헤이안 시대 초기, 율령 정치 회복 과정에서 후지와라 씨가 정치 일선에 나서게 된다.
딸을 천황에게 시집보내고 외척이 된 후지와라 씨들은 중앙 정부의 중추부를 장악하고 주요 관직을 독점하였다.
이들의 후지와라 씨의 전성기는 10세기 말∼ 11세기 초반, 미찌나가 ·요리미찌 부자의 시대였다. 이렇게 정치가 후지와라 씨 중심의 귀족정치로 되어감에 따라, 또다시 공지·공민제도가 붕괴되고 장원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또한 이러한 장원은 후지와라 씨 일가의 정치를 뒷받침하는 경제적 기반이 되어주었다.
이 시대는 귀족문화이면서 당풍 문화를 토대로 한 일본문화가 발전하여 국풍문화가 꽃을 피우게 된다.
이 국풍문화의 대표주자가 바로 카나 문자의 발명으로 활성화된 일본 문학이다.
남성들은 주로 카타카나와 한문을 사용했던 데에 반해 이 시대 여성들은 히라가나로 와카(和歌)와 일기, 수필, 소설 등 자유스럽게 자신의 감정을 발산했다.
대표작으로는 무라사키시키부의 <겐지모노카타리>(源氏物語)와 세이쇼나곤의 <마쿠라소시>를 들 수 있다.
헤이안 초기, 사이초와 구카이가 중국으로 유학, 불교를 배워 돌아왔는데 불교와 정치의 분리를 주장하며 사이초는 천태종을, 구카이는 진언종을 개종했다.
이들 불교는 조정과 귀족 등 상류사회로 빠르게 보급되었으며 10세기 중엽에는 정토교가 귀족과 서민사이에서 널리 보급되었다.
후지와라 씨가 중앙 정계를 주름잡고 있을 무렵 지방에서는 무사 세력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유력한 호족을 중심으로 무사단을 만들었는데 미나모토 씨와 다이라 씨의 무사단이 대표적이다.
12세기 중엽 시라카와 상황과 천황간의 대립으로 발생한 후지와라 씨 일가의 분쟁을 시작으로 이들 무사들은 각기 미나모토·상황 측과 다이라·천황 측으로 나뉘어 싸움을 벌였는데 이것이 호겐·헤이지의 난이라고 한다.
무사들은 이 난을 계기로 중앙 정계로 진출하게 되었는데 이 전쟁에서 미나모토 씨를 물리친 다이라기요모리가 실권을 잡고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그러나 미나모토 씨와 고시라카와 법황이 결탁, 다이라 씨를 공격하여 1185년 다이라 씨들은 단노우라에서 전멸하고 만다.
7. 1192 鎌倉[가마쿠라]시대-고려 무신 정권 시대(1170~)
다이라 씨를 전멸시킨 미나모토노요리토모는 카마쿠라를 발판으로 전국재패의 준비에 착수한다.
그는 1192년 정이대장군에 임명되어 카마쿠라에 막부를 설치하는데 이것이 약 140년간 계속되는데 이 시기를 카마쿠라 시대라고 한다.
이것이 이후 700여 년간 지속되는 무사들에 의한 독재정치의 시작이다.
막부는 장군과 그 부하 고케닌(御家人)이 토지를 매개로 결합된 주종관계를 기초로 하고 있으며 고케닌 중 유력한 자를 슈우고·지토오에 임명, 전국을 지배했다.
하지만 쿄오토오에 엄연히 천황과 귀족 중심의 정부가 존재하였기 때문에, 카마쿠라 시대는 공·무 2중 정권의 시대였다.
문화도 정치와 마찬가지로 귀족문화와 무사계급의 문화가 양립하였는데, 신흥 무사계급은 고전문화와 송문화를 받아들여 그들만의 강건한 기풍과 무인 세상을 담은 문화를 창출해 냈다.
문학 쪽으로는 무사들의 무용담을 담은 군담소설이 생겨났는데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헤이케이모노가타리>(平家物語(*物語;이야기)이다.
카마쿠라 시대에는 전란이 계속 되는 등 시국이 불안하여 많은 무사와 백성들이 종교에 귀의하여 새로운 불교가 계속 생겨났다.
이 시기의 불교는 난해하고 계율 중심의 불교에서 쉽고 실천적인 불교로 바뀌어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 중, 중국에서 들어온 선종은 무사들 사이에서 인기였는데, 좌선으로 정신을 수양하는 선종의 엄격함이 무사 정신과 일치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시기, 이세 신궁(伊世神宮)에서는 불교의 교리를 참고로 하여 일본 고유 종교인 신도(神道)의 이론적 기초를 정립하고자 하였다.
요리토모 사후, 부인 마사코의 친정 호오죠(北條) 씨가 실권을 장악한다.
그러나 13세기 후반 두 차례의 여·원연합군의 원정으로 인한 전쟁으로 약소 고케닌들의 불만이 터져나와 막부를 등지게 되면서 천황에 의해 가마쿠라 막부는 멸망하고 만다.
8. 1338 室町[무로마치]시대-고려말 조선초
카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킨 고다이고 천황은 고대적인 천황제와 귀족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천황 중심의 정치를 부활시켰으나 이에 불만을 품은 아시카가(足利) 타카우지의 반란으로 천황은 패주하게 되었다.
패주한 고다이고 천황은 요시노에 조정을 세우고, 타카우지는 쿄오토에 새로운 천황을 세우고 정이 대장군이 되어 막부를 세웠다.
이후 각각 남조와 북조로 대립하게 되는데 이 시기를 남북조 시대라고 하며 아시카가의 손자인 요시미츠가 무로마치에 하나노고쇼로 불리는 대저택을 짓고 이를 막부로 사용했기 때문에 무로마치 막부 시대라고 한다.
무로마치 막부는 카마쿠라 막부에 비해 쇼군과 무사들 사이의 결속력이 약했기 때문에, 슈고다이묘(守護大名)들은 자신의 소유지를 확장하고 군사력을 키워 그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였다.
1467년, 무로마치의 8대 장군은 요시마사 때, 무사들은 장군의 후계 문제로 파가 갈려 이후 11년간 전쟁이 지속되었는데 이를 오오닌의 난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장원제 질서가 파괴되고 하극상의 사회가 시작되었는데 이후 100여 년간 싸움이 계속되는 이 시기를 전국시대라 하고, 이 시대의 새로운 지배자들을 센고쿠다이묘오(戰國大名)라 한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농업 기술이 발달하여 이모작이 행해졌으며 마을마다 회합을 열어 촌락 농민들끼리 세금이나 농업기술 등에 대해 의논하기도 했는데, 이로써 유대가 강해진 농민들이 단결하여 세금 문제로 막부에 무력으로 대항하기도 하였다.
이를 쯔찌잇키(土一揆)라고 하며 간혹 종교적인 문제로 잇키(一揆=봉기)를 일으키기도 했는데, 때로는 이 잇키 때문에 패망하는 다이묘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 시대에는 다이묘(大名=제후)들이 무기조달을 위해 상공업자를 보호했기 때문에 상품유통과 함께 운송업을 하는 거상들도 많아졌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막부가 쿄오토에 있었기 때문에 선종의 영향을 받은 무사들의 정신세계와 귀족들의 문화가 합쳐져 간소하면서 깊이 있는, 새로운 무가문화가 만들어졌다.
건축물로는, 무로마치 막부 3대장군인 요시미츠의 금각(金閣)과 8대 요시마사가 세운 은각(銀閣)이 유명한데 둘 다 선종사원의 건축양식을 보인다.
특히 은각의 건축 양식은 현재 일본 주택의 원형이 되었다.
무로마치 시대의 정원은 초기에는 자연미를 그대로 살린 금각사와 같은 형태가 많았으나 후기로 갈수록 류우안지의 석정처럼 자연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카레이산스식이 유행하였다.
전통예술 분야에서 노오가쿠(能樂)가 완성되었는데 이 노오가쿠는 서민들의 소박한 연극을 근간으로 한 가무극으로 독특한 상징미를 갖고 있으며, 막간극으로 쿄오겐(狂言)이 함께 상연되었다.
이 두 전통예술은 현재에도 그 연출기법이 그대로 지켜지고 있다
9. 1573 安土桃山[아즈치 모모야마]시대-임진왜란 전후
중세 유럽의 봉건사회가 십자군 전쟁, 르네상스, 종교개혁, 지리상의 발견 등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로 인해 서서히 붕괴되면서 그 배경이 되었던 상공업자와 자영 농민 등 신흥세력들은 유럽의 절대왕정과 손잡고 새로운 무역시장인 동양으로의 진출을 시도했다.
일본은, 오오닌의 난 이후 계속되는 전란으로 극도의 혼란에 빠진 일본은 16세기 후반에 등장한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통일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1543년 두 명의 포르투갈 사람이 큐우슈우 남방 타네가시마에 표류하여 소총을 전해준 사건이 있었다.
이 소총을 국산화하여 대량생산하여 소총부대를 만들어 재래의 전투양식을 현대적으로 뒤바꿔 놓은 사람이 노부나가이다. 또한 그는 상업과 수공업, 기독교를 보호·육성하였다.
이로써 포르투갈, 스페인과의 무역이 상당한 진척을 보이며 유럽문물이 전해지기 시작했는데 이를 남만무역이라고 한다.
카스텔라, 빵, 즈봉 등 외래어도 당시 포르투갈어에서 전해진 것들이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천하통일을 완수하기 전에 심복 아케치미쯔히데의 반란(혼노지의 변)으로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도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가 아케치미쯔히데를 파하고 오사카 성을 근거로 1590년, 드디어 천하통일의 대업을 완수하였다.
이시대를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라고 하는데, 이 명칭은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성(城)인 아즈치 성과 모모야마 성에서 따온 것이다.
이 시대의 문화는 신흥 센고쿠다이묘들과 대상인들의 영향으로 웅장하고 화려한 성격을 보이는데 이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성(城)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전국의 다이묘들이 각각의 죠오카마치(城下町)-성곽도시-를 이루며 살았는데 성은 다이묘의 거처이며 정치권력의 중심이었다. 따라서 대단히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현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효고현의 히메지성을 보면 그 시대 성들의 화려함과 그 규모를 알 수 있다.
히데요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우리에게는 친숙한(?) 이름이다.
자신의 지배체제를 확고히 하기 위해 토지조사를 단행, 전답의 수확고를 조사하여 세율을 정하는 다이코켄치를 실시하였고, 농민들의 반란을 막기 위해 가타나가리(칼사냥)을 단행하였다.
이로써 병농이 분리되고 긴 분란의 씨앗인 장원제가 막을 내렸다.
히데요시는 다도를 적극 권장하여 지원하여 일본 다도가 완성되었다.
다도의 정신을 화경청적(和敬淸寂)이라 하여, 고요함 속에 생동감이 깃들어 있다고 하여 이를 와비차라 하였다.
10. 1603 江戶[에도]시대-조선 후기
히데요시 사후, 토쿠가와이에야스(德川家康)는 토요토미의 추종세력을 격파하고 1603년 정이대장군이 되어 에도(토오쿄오)에 막부를 설치했다.
이후 약 260년간의 에도막부의 통치 시기를 에도(江戶=東京)시대라 한다.
이에야스는 막부 직할령을 내려 전국의 25%와 교오토오, 오오사카, 나가사키 등의 중요 도시를 직접 지배하였다.
이에야스는 자신의 일족과 가신들에게 영지를 나눠주었는데 그 영지를 한(藩)이라 하였고, 그 영주를 다이묘오(大名)이라 하였다.
에도 막부는 전국의 한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조직을 정비하여 막번체제(幕藩體制)를 구성했다.
막부는 다이묘가 지켜야할 규칙을 정하고 이를 어겼을 때에는 영지를 몰수하는 등 엄하게 다스렸으나 그 규칙 안에서는 영주 나름대로 영지를 지배할 수 있는 독자적 권한을 부여해 주었다.<중앙집권적 봉건제>
이밖에, 조정과 사원에까지 그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 만큼 막부는 실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3대 쇼군인 이에미츠는 참근교대제를 만들어 영주의 처자식들을 볼모로 잡고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실시하였다.
에도 막부는 전체 인구의 76.4%나 되는 농민들을 지배하기 위해서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제도를 만들어 최상계급인 무사들은 농민이나 쵸오닌(주로 상인)들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도록 했다.
이로써 소수의 무사들이 대다수인 농민과 쵸오닌(町人=상인)을 지배하는 봉건사회가 유지될 수 있었다.
이에야스는 초기에는 해외도항 무역과 해외 이주를 허락하였으나 기독교가 일본사회 깊숙이 파고드는 것을 보고 기독교 금지령을 내렸다.
이에마츠는 아예 해외도항과 해외이주자의 귀국을 법으로 금지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사형에 처하는 극약처방을 썼다.
이에 1637년 큐우슈우의 시마바라에서 과중한 세금과 기독교 금지에 대항하여 잇키가 일어났다.
4개월에 걸쳐 겨우 난을 수습한 막부는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력하게 하고 1639년 쇄국령을 공포, 기독교와 관련이 없는 네덜란드인과 중국인에게만 나가사키와 데지마(出島)를 개항했다.
이로 인해 일본의 독자적인 문화와 산업이 발달하였으나 서양문명과의 교류가 단절되어 문화적 고립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켄로쿠 시대(1688∼1703)에 에도 막부는 불량화폐의 남발로 재정이 파탄 지경이 이르게 되자 세 차례에 걸쳐 경제개혁을 단행하였다.
차례로 교호(亨保)의 개혁, 간세이(實政)의 개혁, 텐보(天保)의 개혁을 일컬어 에도 시대 3대 개혁이라고 하는데 공통적으로 경제난을 극복하고자 무사들의 사치를 금하는 검약에 관한 것으로 모두 실패로 끝났다.
에도 시대 학문은 일본의 고전을 연구하는 국학과 의학을 중심으로 한 양학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는데 국학은 후에 존왕양이 운동으로, 양학은 개국을 주장하고 막부를 반대하는 운동으로 이어졌다.
일본이 쇄국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동안에 이미 근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구미 서구열강들은 일본에 개항을 요구해왔다.
이에 막부는 끈질기게 개항을 거부하였으나 결국 미국의 강력한 개항요구에 밀려 1854년 카나가와에서 일미화친조약을 체결하고 개항하였다.
이어 1858년 미국의 통상 요구에 다이로(大老) 이이나오스케가 조정의 허락도 없이 단독으로 일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해버렸다.
일미수호통상조약은 치외법권허용, 관세자주권 포기 등 상당히 불평등한 조약이었는데, 결국 이이나오스케는 존왕양이론자들에게 암살 당하고 만다.
개항 이후 수출의 급증으로 물가가 급등하는 경제혼란이 일어났다.
이에 사쯔마와 초오슈우의 하급무사들이 존왕양이운동을 일으키고 영국과 네덜란드, 프랑스, 미국 등의 열강의 함대들과 교전 상태에 들어갔으나 열강의 힘에 밀려 결국 '양이'를 포기하고 존왕도막(막부를 타도하는)으로 방향 수정을 하였다.
사쯔마와 초오슈우는 삿초 동맹을 맺고 신정부 수립을 목표로 영국의 지원 하에 서양식 신식 군비를 정비하였다.
이에 막부도 프랑스의 원조를 받아 쵸오슈우를 정벌하는 등 치열한 대립상황에 빠진다. 여기에 폭동과 농민봉기까지 일어나 일본사회는 극도의 혼란상황에 이르게 되어 이세 신궁에 참배하는 것이 사회적인 유행이었다.
상황이 점차 악화되자 15대 쇼군 요시노부가 왕정복고를 선언하고 정권을 천황에게 반납했으나 신정부는 요시노부의 영지와 관위를 빼앗아 버렸다.
이로 인해 막부의 무사들이 교오토오에서 도바·후시미 전쟁을 일으켰고 결국 이 전재에서 신정부군이 승리하게 되었고 260여 년 간 계속되었던 에도 막부의 시대는 끝나버렸다
11. 1868 明治[메이지]시대
1868년 메이지 천황은 신 정부 정치방침인 5개조 선언문을 발표, 연호를 메이지로 정하고 1867년 쿄오토에서 토오쿄오로 천도하였다.
에도 막부 멸망 이후에도 1년 6개월 가량 무사들의 반란이 계속되었으나 모두 진압하고 신정부는 일본 통일에 성공하였다.
신 정부는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새 정치체계를 위해서 메이지유신을 단행하여 다이묘들의 영지와 영민을 천황에게 복속시키고 세금을 정부에서 받았으며, 모든 지방관을 중앙정부에서 파견하였다.
또한 사민평등을 선언하여 신분제를 폐지하였고, 직업 선택과 거주이전의 자유를 주었다.
부국강병 책을 시행하여 정부가 직접 관영공장을 세우고 광산을 개발하는 등 근대산업의 발전과 전신, 우편, 화폐, 철도 교통 등의 근대적인 제도개혁에도 힘썼다.
메이지 정부는 1873년 징병령을 내려 군대를 조직하고 1882년 일본은행을 설립하는 등 계속적으로 개혁에 힘썼다.
개혁정치를 위한 자금마련에 나선 메이지 정부는 지조개정(地租改正)을 실시, 땅을 갖고 있는 만큼 현금으로 세금을 내게 하였다.
그러나 이 조세개혁은 여전히 소작인들 같은 빈농들에게는 불리한 것이었기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의 공장으로 향하였다.
이들은 일본 근대산업 발전을 위한 노동력이 되었고, 한편 일본 군대의 주요 병력이 되기도 했다.
1872년 메이지 정부는 근대적인 교육을 위해 학제를 개정, 모든 국민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는데 차츰 소학교교육이 확산되었다. 그 후 고등교육기관도 속속 세워졌다.
이러한 메이지 정부의 서구화 정책은 태양력과 7요제도, 1일 24시간제, 단발과 양복, 기독교의 인정, 신문 간행 등 국민생활 전반에 걸쳐 그 영향력을 발휘하여, 이름하여 일본의 '문명개화'가 이루어졌다.
일본의 국민적 베스트셀러였던 '학문을 권함'의 작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등에 의해 자유주의와 개인주의 등 근대 구미의 사상이 소개되면서 일본 전역은 자유와 평등, 인권주의 사상으로 물들게 되었다.
이에 헌법의 제정과 의회를 통한 정치를 주장하며 일본 최초의 정당인 자유당이 생겨났고(1881년),곧 이어 영국식 의회정치를 주장하는 입헌 개진당이 생겨났다.
결국 1889년 히토오 히로부미 등은 독일 헌법을 본뜬 대일본제국헌법을 공포하고 1890년 제국의회를 개설하였다.
이어 1890년 일본 최초의 중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선거권이 제한적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국민의 1%정도가 선거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일단 근대산업의 발달이 어느 정도 괘도에 오르자 일본은 서구열강들과 마찬가지로 해외시장 개척에 나서게 되는데 그 첫발을 딛은 곳이 바로 한반도이다.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끼 조약을 체결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패권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일본은 1904년 러시아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하여 사할린 남쪽 반과 남만주 철도 등을 챙기게 되었다.
이후 일본은 중국에 남만주철도회사를 차리고, 조선을 합병하여 식민지화하는 등 본격적으로 식민지 쟁탈전에 돌입하였고 미국과의 불평등조약인 치외법권을 폐지시키고 관세자주권을 회복하는 등 자국 내의 외교문제를 해결하였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으로 풍부한 원료시장을 손에 넣은 일본은 기계, 제철, 조선, 제사, 직물, 방적업 등 근대 산업이 발달하여 자본주의가 발달하였다.
자본주의 발달에 따라 대지주와 자본가는 의회에 진출하여 정치권 진입에 성공하였다.
한편 자본주의 발달로 인한 사회문제가 심각해지자 사회주의 사상이 유행하여 노동자, 농민, 학생들의 소작쟁의, 노동운동이 빈발하였다.
12.1912 大正[다이쇼]시대
1914년에 일어난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의 동맹군으로 출병한 일본은 중국에서 독일 군을 격파하는 전과를 거두고 1920년 국제연맹의 상임이사국으로 선임되었다.
1차 대전으로 일본 경제는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
아시아 시장을 상대로 한 공업용품 수출로 생긴 막대한 이익을 챙겨 대재벌이 등장하기도 하였으나 쌀과 생필품 가격의 폭등으로 대부분의 국민들은 생활고에 시달려야했다.
이에 1819년 토야마 현에서 쌀가게를 습격하는 등 쌀 소동이 벌어졌으며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쌀 소동 이후 평민재상 하라다카시가 일본 최초의 정당내각을 구성하였고 1925년 선거법을 개정하여 25세 이상의 모든 남자에게 선거권이 주어지게 되었다.
또한 치안법을 제정하여 불붙은 각계의 사회운동을 원천 봉쇄하였다.
1923년 관동 지방을 중심으로 대규모 지진이 발생하였다.
이 관동 대지진은 일본인들의 재일 한국인 학살의 발단이 되었는데 이로써 일본 경제도 한풀 꺾이는 듯 했다.
재건 사업에 들어간 일본은 전화와 자동차, 지하철 등이 생기고 토오쿄오를 중심으로 고층 빌딩이 생겼으며 라디오 방송과 신문, 잡지 등의 매스미디어가 나날이 발달하였다.
13. 1926 昭和[쇼와]시대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이 전세계로 확산되어 일본 경제도 위기 국면에 도달했다.
이에 정부와 군부, 대재벌들은 사태를 수습하고자 중국진출을 꾀하는데, 1931년 만주사변이 그것이다.
1933년 일본은 만주국 인정 문제로 국제연맹을 탈퇴하였고 국내에서는 쿠테타가 잇달아 일본 사회는 일대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 와중에 일본 군부는 중일 전쟁(1931)을 일으켰고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 이탈리아와 군사동맹을 맺고 1941년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전쟁 발발 초기에는 동남아시아 일대를 점령하는 등 일본이 연합군에 우세하였으나 곧 전열을 가다듬은 미국에 의해 전세가 뒤바뀌었다.
결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소련이 참전, 대일 선전포고를 하자 1945년 8월 15일 일본 군부와 천황은 연합군에 항복하였고, 이로써 1931년 중일전쟁으로 시작한 15년간의 전쟁은 막을 내렸다.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 후, 일본은 연합군 최고 사령관인 미국의 맥아더 장군의 관할 하에 들어갔다.
맥아더는 극동군사재판소를 설치, 전범 처벌에 들어갔으며, 치안유지법을 폐지하였고 20세 이상의 남녀 모두에게 참정권을 주는 등 일본 군국주의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또한 미쯔비시와 미쯔이, 스미토모 등 군부에 협력했던 대재벌들을 해체하고 농지개혁을 단행하였다.
1946년 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하여 천황을 국가의 상징으로 하는 주권재민, 평화주의, 인권존중의 일본국헌법이 공포되었다.
전후 일본은 국토와 산업시설이 모두 파괴되었고 식량부족과 물가폭등 등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일본 국민들은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경제적 상황은 이렇게 최악이었으나 민주주의 정신에 입각한 자유로운 문화활동이 이어졌고 학문적으로도 많은 발전을 이룩해 1949년 유까와히데키가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14. 1989 平成[헤이세이]시대
868년의 메이지유신이래 음력을 전면 폐지하고 양력을 도입한 일본.
하지만 그들은 한국과 중국에서는 일찌감치 사라진 연호를 여지껏 쓰고 있다.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던 국왕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리라.
헤이세이(平成). 지금의 일본연호이다.
일본인에게는 1989년이 헤이세이1년이다.
문제는 이일본의 연호가 물과 공기처럼 평소에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는
존재인 국왕과는 달리 일상생활에 두루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