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ginal Message-----
From: "김송교"<sgkim900@naver.com>
To: "김남각"<kimnamga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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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t: 2015-11-24 (화) 22:44:31
Subject: : 프랑스의 드골장군의 호소
1940년 6월, 세계최강으로 평가 받던 프랑스 육군은 독일군의 전격전 전술에 걸려 6주 만에 무너진다.
프랑스 정부가 1차 대전의 영웅 패탕 원수를 지도자로 불러내 독일에 항복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국방차관 드골 장군은 영국으로 탈출, 망명정부를 만든다.
처칠은 그가 BBC 방송을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6월18일 드골의 BBC 방송 연설은 프랑스가 다시 일어나 노르망디 상륙 작전 뒤
戰勝國으로 逆轉하는 계기를 만든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 간결한 연설은 名文이기도 하다(그는 처칠에 지지 않을 大문장가였다.)
영어로 번역된 全文을 한국어로 다시 번역하였다.
*프랑스 인들에게 보내는 드골 장군의 호소(1940년 6월18일)
"오랜 동안 프랑스 군의 수뇌부에서 일했던 지도자들이 정부를 구성하였습니다.
우리 군대가 패배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이 정부는 敵對 행위를 중단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敵과 협상을 시작하였습니다.
우리가 기계화된 敵의 군사력에 의하여 육상과 공중에서 압도되었고,
지금도 압도당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진실입니다.
우리의 병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독일군의 탱크와 비행기와 전술이 우리 군대를 퇴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지도자들을 곤경으로 몰아넣은 것은 독일의 탱크, 비행기, 전술이 만들어낸 기습의 효과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게 끝장일까요? 우리가 모든 희망을 버려야 할까요?
우리의 패배는 최종적이고 구제불능인가요?
이런 질문에 답하겠습니다.
아니요!
내가 모든 사실을 아는 입장에서, 프랑스의 大義는 패배하지 않았다고 말할 때 나를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패배시킨 바로 그 요인들이 어느 날 우리를 승리로 이끌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걸 기억하십시오, 프랑스는 홀로 선 게 아닙니다. 프랑스는 고립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의 뒤에는 광활한 제국이 있고,
우리는 制海權을 장악하고 싸움을 계속하는 大英제국과 같은 大義로 손 잡을 것입니다.
영국과 마찬가지로 프랑스는 미국의 엄청난 산업 자원을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不運한 우리나라에 한정된 전쟁이 아닙니다.
이 싸움의 결과는 프랑스 戰役으로만 결정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세계 전쟁입니다.
실수가 많았고, 늑장도 부렸으며,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었지만
이 세계가 장차 우리의 敵을 파멸시킬 모든 수단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를 덮친 기계화 부대의 거대한 重量에 의하여 붕괴되었지만,
더 강력한 기계화 부대가 우리를 승리로 인도할 미래를 내다 봅니다. 세계의 운명이 여기에 달렸습니다.
나 드골 장군은 런던에서, 영국 영토에 있거나 있게 될 모든 프랑스 장교들과 남자들,
무기를 가졌거나 갖지 않았거나를 불문하고 여러분들에게 호소합니다.
영국 영토에 와 있거나 장차 오게 될 군수공장의 기술자와 숙련공들에게도 호소합니다.
나와 연락 합시다.
어떤 일이 있어도 프랑스 저항 운동의 불꽃은 죽지 않아야 하며 죽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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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위대한 정치가 샤를르 드골은 1970년에 80세로 사망하였을 때
유언에 의하여 간소한 가족장으로 고향에 묻혔다.
그는 죽기 전해 대통령職을 사임하였다.
행정개혁에 대한 자신의 제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되자 스스로 물러나 고향 콜롬베로 돌아갔다.
그는 텔레비전을 보다가 동맥경색으로 急死하였다.
그는 유언에서 가족장으로 할 것과 함께 대통령이나 장관들이 參禮하는 것을 금하였다.
2차대전 때 프랑스 해방군으로 함께 싸웠던 戰友들의 참례만 허용하였다.
프랑스 정부는 이 유언을 존중하여 파리의 노트르담 聖堂에서 별도의 영결식을 가졌다.
드골은 조촐한 자신의 墓碑에는 이름과 生歿(생몰) 연도만 쓰라고 유언해 놓았다.
그래서 이렇게만 새겨졌다.
'Charles de Gaulle, 1890 '.
그는 은퇴후에 대통령의 年金을 받지 않았다.
다만 대령계급에 해당하는 年金만 받았다.
유족은 그의 死後 관리능력이 없다고 하여 저택을 팔았다.
드골은 1940년 국방차관으로서 敗戰을 맞았다.
프랑스군이 히틀러 군대에 大敗하자 런던으로 망명, 자유프랑스군을 조직, 抗戰을 계속하였다.
'우리는 전투에선 졌지만 전쟁에서 지지는 않았다'는 연설이 유명하다.
그의 抗戰에 호응, 독일군에 점령된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 운동이 일어났다.
프랑스군은 연합군과 함께 파리 등 프랑스 수복작전에도 참여하였다.
영국의 처칠 수상이 얄타 회담에서 강력히 주장하여 프랑스는 戰勝國 대우를 받고
독일 분할 점령 통치에도 참여하고 유엔 안보리의 상임이사국이 되었다. 드골의 공이었다.
프랑스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일하던 그는 戰後의 政界 분열에 실망, 은퇴를 선언, 고향으로 돌아가 회고록을 쓰면서 칩거하였다.
알제리 독립문제로 국가가 혼란에 빠지자 1958년 다시 국민들이 그를 불러냈다.
드골은 대통령으로 추대되어 내각제를 대통령 중심제로 改憲하여 만성적인 정치불안에 종지부를 찍고
(제5공화국 출범) 알제리를 독립시켜주었다.
독립반대자들로부터 여러 차례 암살 企圖가 있었고 알제리 주둔군의 쿠데타도 진압하였다.
드골의 治下에서 프랑스는 정치적 안정을 이룩하고 과학 기술을 발전시켰으며 核무장을 하고
중국과 수교하는 등 미국에 예속되지 않는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걸었다.
NATO의 작전통제권에 프랑스군이 들어가는 데 반대한 드골은 NATO엔 머물면서도 프랑스군을 빼버렸다.
퐁텐블루에 있던 NATO 사령부도 밀어냈다.
그의 임기중 프랑스는 처음으로 국민총생산 부문에서 영국을 앞섰다.
그의 死後에도 드골 노선은 프랑스 정치의 主流로 이어지고 있다.
언제 우리나라에도
이와같은 지도자가 나타날까요? 솔
http://cafe.daum.net/airfa3/pdzu/3555?q=%EB%93%9C%EA%B3%A8%20%EC%9E%A5%EA%B5%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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