回顧輯草案

御洞(어동)아제의 追慕(추모)

bsk5865 2019. 6. 2. 11:24

御洞(어동)아제의 追慕(추모)

 

우리는 부랭이 산촌에서 농사외엔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누대(累代)를 살아왔다. 내가 아직 어렸을때 다덕(多德)광산이 성(盛)했는데 우리 집안에서 그 광산의 대장깐에서 일한 승태(勝泰)형이 유일했다.

.........(일찍 고향 떠나 울진.삼척으로 이거(移居)하신 어른들을 제외하고)

 

그 보다 앞서 삼종숙(三從叔)인 어동(御洞)아제 (敬緖 조부)는 일찍 출향(出鄕)하여 외지의 문물(文物)을 선험(先驗)하신 우리 고을의 선구자로서 후대의 본보기가 될만 했었다.

우리 집안의 그 연배의 어른들은 숙명처럼 가난하게 농사꾼으로 사시다가 아무런 발전의 자취도 남기지 못하고 살다 가셨다.

 

내가 소학교에(1930년대 말) 다니던 무렵 어동아제는 사람의 병을 고치는 신기한 의술을 익혀가지고 귀향(歸鄕)하셨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한방(漢方)과 양방(洋方)의 장점을 살려 이를 현실에 적용해 보려는 포부를 가지신듯하여 훌륭했다고 여겨진다.

 

이 촌놈은 그 때 주사(注射)란 것울 처음 봤고. 빈 도시락에 주사기를 넣고 끓여 소독하는 것도 처음 봤다. 근육주사야 찌르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혈관주사란 정말 신기했다. 외과시술에서 곪은 상처 도려내고 그 상처에 약품처리된 카제를 밖아 처리하는 것도 처음 구경했다.

마라리야에 걸려 고생할때 가루약 한첩 먹고 거뜬히 생기를 되찾았고....그 때 우리 몸은 순수했기에 약효도 빨랐었다.

 

그 옛날 1930년대 우리의 의료행위란 원시적 수준...한약방에 가서 증세 이야기하고 탕약 받아 따려먹는것. 또는 민간요법 써보는것. 미신적 행위....이런것만 보다가 눈으로 금방 확인 할 수 있는 효과에 모두들 놀랐을 것이다.

 

까닭에 "병 잘 고치는 명의"라는 소문은 이 동내 저 동내로 퍼져 늘 바쁘게 생활하셨다.

내가 어렸을 때 아직 시간에 대한 개념도 정립 안 됐을 때였지만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동그란 회중시계도 구경했고 손목시계 (일본말로 "우데마끼"라 했다)도 처음 봤다. 또 '시계에 밥을 준다"는 말도 이해 못했다.

정말 다른 세상에서 오신 분 같았다.

또 그 옛날에 이 고을에서는 보기 어려운 귀한 자전거를 타고 내왕하셨으니 놀라운 의술과 함께 경천동지(驚天動地)의 변화를 이 고을에 몰고 오신 어른이었다.

 

지금의 잣대로 보면 불법이라 하겠지만 의료혜택의  불모지(不毛地)로 질병으로 부터 고통받는 주민을 생각할때 더구나 이런 산골짝이란 입지조건(立地條件)으로 볼 때 도리어 불가피한 적선(積善)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환자를 찾아가서 돌보는 것이 주가 되기에 이 고을에서의 내왕도 한계가 있어 거주지를 옮기셨고 주민이 많은 인근 원둔. 명호로 옮겨 다니셨다.

그 후 고향 면소재지인 봉성에 새시장(市場)이 형성됐었다. 5일장으로 장날은 3일 8일. 특히 소(牛)의 출시가 많아 그 거래도 활발하였고 인근 우시장(牛市場) 중의 으뜸으로 정평이 있었다.

이것을 계기로 봉성(鳳城)새시장 인근 터에 새집을 짓고 당국의 허가를 받아 간판을 걸고 환자를 돌봤다.승훈형님이 같이 계시면서 한약을 썰기도 하고 처방이 나오면 조제도 하는것을 곁에서 자주 봤다.

 

그 때 나도 취직한 사회인이 됐는데 마라리아인지? 여러날을 고생했다. 이 약 저 약에 효험을 못 보자 아저씨가 "이거면 떨어진다"고 하시며 앰플속의 많은 물약이 든것을 주사기로 뽑아 혈관에 ......그 순간 코 끝이 화끈 해지는듯한 기억이 남아 있다.   약 값은요?   "됐다. 그냥 가거라...."

한마디 하시고는  방으로 들어가셨다. 그 후 내 열병은 깨끗이 고쳐진것은 물론이다.

이렇게 집안 대소가에 대해선 의료수가를 따지지 않으셨고 아팠던 곳을 고쳐 주었다는것으로 만족하시며 지내셨다.

 

그후 나도 직장에 일에 파묻혀 자주 뵙지 못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후 편안한 노후를 보내셔야할 그 무럽 생활무대와 영업환경을 넓히고 바꾸기 위해   군(郡)소재지인 봉화신시장(奉化新市場)으로 거주를 옮기셨다. 생소한 곳이기에 우선 인적교류의 새장(章)이 열였을것으로 짐작했었다. 내가 봉화에서 존경하던 어른이 "자네 삼종숙 약방이 잘 돼야 될텐데...."하고 염려해주시기에 더욱 그런것을 느꼈다.

시가지를 벗어나 새로 개발하여  옮긴 다리 건너 신시장에 집안어른이  터를 잡고 계신다는 것은 흐뭇한 일이다. 시장이란 평소에도 내왕인구가 많은 곳이지만 5일장이 서기 때문에 더욱 장사에 유리한 곳이다.

 

그러한 때에 나는 1970년대 부터 불운의 연속으로 10년을 방황했고 견디기 힘들어 1980년대에 고향이 싫어 대구로 떠나버렸으니 자주 찾아 뵈올 기회가 없었음이 죄스러울 뿐이다.

 

그 때 가족중에 손자가 육사출신의 현역으로서 장군 반렬에 오를 유망주였기에 (후에 少將) 보람과 긍지를 지녀 대인관계에 자신(自信)과 떳떳함을 항상 지녔을 것이다  생활에 있어선 노후(老後)라지만 허가된 직업이 있어 늘 여유로왔을것이며 말년에 많은 벗들을 사귀고 어울린 그 노후의 모습이 아름다왔을것으로 짐작했었다.

 

뒤돌아 보면 오랜 세월 동안 집안대소가의 여러 질환 치료를 전담하신 주치의(主治醫) 역할을 해 주셨다. 그 수가도 불문에 붙힌것이 예사였으니 모두가 어렵고 힘들게 살았던 그 시대에 우리 가문에 큰 힘이 되어 주셨고 또 큰 자랑이기도 했었다.

 

그 평생을 돌아 볼 때 가난한 고을에서 농사꾼의 길은 일찍이 외면하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결정 출향(出鄕)하셨고 훗날 생업의 토대가 된 기량을 연마하신 후에 귀향.....자수성가하신 입지전적 어른이셨다. 

또 우리 박씨 대소가에 많은 기여를 하신 어른으로 우리는 영원히 기억하고 경모(敬慕)해야할 집안의 큰 어른

으로 전해져야 한다.

 

2009.5....대구에서   들길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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