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의 야식 출생의 애환(哀歡)
아버지의 자매인 우리 고모는 세 분이 [法田법전. 道心도심. 金井금정] 계셨지만
아버지는 혼자이시고 맞집의 종형도 한 분 계셨으나 일찍 돌아 가셨기에 자손이 귀해
이에 대한 집념은 대단하셨다.
그 때는 어린 아이들 "홍진" 끝에 합병증인 페렴으로 없애는 일이 많았고 우리 집 큰
형님에게도 작은 형님에게도 남자 아이를 "홍진"끝에 없앤 슬픈일을 겪으셨다.
출생 때는 위로 형제가 같이 남자 아이를 출산했기에 그 기쁨이 컸었는데........
나는 큰 사랑방에서 지냈기 때문에 어머니와 같이 어린 손자 일찍 보내고 가엽고
섭섭해서 눈물 짓는 아버지의 모습을 여러번 봤었다.
그런 연유를 겪은 뒤 문서는 누구 보다도 조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었다.
어린 문서가 귀여워서 대리고 잤으며 자다가 오줌 쌀가봐 깨워 누게하고 야식도 만들
어 먹였었다. 저녁 밥상에서 밥과 김치를 남겨 방 한 구석에 두었다가 야밤에 화로불을
담뱃대로 불어가면서 서툰 "김치볶음밥"을 밤마다 만들었었다. 아마 그 시대 최고의
밤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조부모 품에서 응석을 부리며 자란 손자가 세상에서 할 일 많이 남겨둔채 62살
에 세상을 떠났다. 잔병치레도 막았고 똑똑한 귀염동이로 키워 준 조부모의 사랑은
알고 떠났겠지.....불운하여 안타까운 가족사를 기록했었지만 저 세상에 계시는 조부모
의 마음은 더 원통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분명 해로운 것이지만 그것이 귀엽고 소중한 손자를 보살피는 사랑의
표시로 알고 긴긴 밤을 견디고 계셨을 것이다.
나와 같이 한 방에서 자던이는 그 냄새를 오래도록 참고 넘겼으며 배 고팠던 그 때 겨울
은 칼바람과 함께 오래 머물렀었다.
그 때의 추위란 길바닥도 얼어서 터지는 못견딜 추위였다.
出生의 哀歡[애환]
그때 가족사를 더 적어보면 큰집 맞조카는 우리 5형제의 막내와 같이 문서보다 7년전
에 출생 건재[健在]하여 같이 학교에 다녔었다. 문서 아래 상운 최실이 태어나서 안방
에서 컸지만 그 이전부터 문서는 우리와 같이 사랑방에서 특히 조부모의 보살핌 속에
서 자랐었다.
사랑방에서 거처한 가족은 결혼전 세째형과 나를 포함한 5숙질과 7명이지만 두동의
큰생질도 봉성학교 다니느라고 같이 지냈다.
그 위에 집안 어른들도 밤 늦게까지 놀다가 으레 우리 사랑방에 와서 자고 새벽에
가기도 했다.
아버지는 새벽이면 나가셔서 소가 먹을 소죽을 끓었었고 온돌방에 온기가 다시 들어
와 등이 따뜻해지는 그 새벽이 행복했었다.
여름 잠자리는 서로 적당한 공간으로 흩어졌지만 모기. 빈대. 벼룩이 괴롭히는 고통은
지금 세대는 상상도 못한다.
그러다가 형님 결혼하고 내가 중학교 가고 하여 변동이 생겼지만 지금 생각하면 모두
가 어렵게 지내던 시절 그런 잠자리에서 살아온 것이 기적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인심은 어느 시대보다도 넉넉했었다.
이런 세월을 보내는 가운데 늘 걱정하시던 작은 집에 손자가 태어났었다.
복스럽게 생겼던 손자들을 없애고 눈물짓던 모습이 기쁨으로 바뀐것이다. 특히 아버
지의 환한 모습은 온 집안을 훈훈하게 만들었었다.
도리켜 보면 그 어린것을 없앴던 그 날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 날 아침 형수님은 가버린 아이에 미련을 못버려 자꾸 도닥거리고 있었고. 어머
니는 보기가 안스러워 그만 두라고 했었다.
작은 형님은 입혔던 옷들도 모두 챙겨 어린것을 수습하고 안고 나가셨다. 그 뒤를
내가 따라 갔었는데 앞산 진등의 훨씬 위쪽에 묻고 눈물을 뿌렸었다.
그러한 내력을 겪은 뒤에 얻은 손자다. 천지신명에게 감사하면서 얻은 기쁨이다.
이름을 뭐라고 할까? 형은 나와 상의를 했다.
가버린 아이는 항렬자위에 용 [龍]같이 되라고 용 [龍]자를 썼었고 큰집에 없앤
아이는 크게 일어나라고 흥 [興]자를 썼었다.
지금 절박한 것은 우선 건강하게 잘 커줘야하는 것이 우선이기에
"옛부터 학[鶴]은 천년을 살고 거북 [龜]은 만년을 산다고 했으니 이것을 쓰기로
했었다.
그래서 구[龜]자를 먼저 쓰고 다음에 태어난 아이는 학[鶴]자를 쓰기로 했으니 이것이
지금 쓰고 있는 이름의 연유[緣由]다.
이렇게 온 가족의 바램속애서 태어난 구서는 그 후 건강하게 잘 자랐었다.
특히 코를 많이 흘렸는데 이는 옛부터 건강의 상징이라했기에 내심 반가운 일로
여겼었다
다만 그 해 부터 흉년이 자주 들어 쌀이 귀해 마음껏 흰쌀밥 못해 준 것을 온 가족이
늘 안타까와 했었다.
'回顧輯草案'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탈줄 모르는 자전거 끌고 [정미기.부싯돌] (0) | 2020.04.27 |
---|---|
우리 어머니 (0) | 2020.04.26 |
春姬 詩集을 보고 (0) | 2019.09.06 |
御洞(어동)아제의 追慕(추모) (0) | 2019.06.02 |
16世 文植 碑文 (0) | 2019.04.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