回顧輯草案

당(堂)집앞 들의 논(畓)

bsk5865 2021. 9. 27. 17:07

당(堂)집앞 들의 논(畓)

 

농토는 생명의 원천 같은 것...이 고을에 있는 많치 않는 농토도 이 고을을 개척한

우리 집안이 찾이 하지 못하고 외지인의 소유가 많았다.

그 시절 집성촌(集姓村)에 연고 없는 타성(他姓)이 사는 것도 반길 일은 아니였고

타인 소유가 된 농토도 반길 일은 아니지만 불가 항력으로 치부했겠지.....자손이

많지 않았고 경제력도 따라와 주지 못 했을 것이니까.........

 

일제 말기 성황당(城皇堂) 앞들의 논이 팔려나갈 기회가 있었다.

이를 한두집이 사지도 못하고 3등분하여 위쪽은 우리가, 중간은 창평(昌坪)사가,

밑쪽은 성곡할배......이렇게 나누어 샀다. 농촌에 거금이 없기에 이 논을 담보로 당시

긍융조합에서 대출을 받아 자금을 조달했었다.

이것이 훗날 작은 형님의 문전옥답이고 주곡(主穀) 흰쌀 생산의 보고(寶庫)로 큰 행

운이 됐다.

 

이 논을 살때는 가슴 설레는 큰 돈이었고 이자와 원금 상환의 고생을 각오 했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8,15 해방(解放)을 맞았고 사회의 혼란속에 물가는 천정부지로

뛰고 있었다. 돈의 가치는 떨어지고 물건의 가치는오르고.....이런 현상이 사회 전반

에 이어지더니 금융조합의 그 원금은 쌀 두어가마니 값에 지나지않을 정도로 돈의

가치가 폭락했었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세월이 갖다 준 행운이었지만 욕심도 투기성도 큰 포부도

없었기에 창평 사가에 사라고 권했을 것이다.

사가에서는 곧 타인에게 전매했고 그 전매의 기회도 잡지 못해 영영 타인의 소유가

되고 말았었다. 운이 좋았다면 그것도 잡았을 것이지만.......

 

그때 크게 욕심 한번 부려 저질렀다면 그 문전옥답의 반은 우리 것이 됐을걸,,,,,,

가당치 않는 일이지만 지나고 아쉬운 생각.......헛된 지나간 꿈을 더듬어 봤다.

인생이란 선택의 연속이고 길흉의 갈림길은 여기에도 있었다.

 

그러나 본래 부터 과욕 허욕을 부릴 줄 모르고, 자신을 알고 분수를 지키며 살아

온 어른들의 가는 길에 외도(外道)는 없었다. 이것이 서대(先代)가 가셨던 길이었

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겨 본다.

우리 아버지는 이런 분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