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가장(家長)...며느리 사랑
아버지는 물야(物野) 오록 출신으로 1930년대 초반에 한글(그때는 언문이라고
했다)을 해독했던 맏며느리를 맞아 무척 아끼셨을 것으로 짐작된다.
첫 머느리를 맞았으니 그럴 것이리라.....
후에 짐작되는 것은 두동 사장어른 (큰생질의 조부. 한학자(漢學者), 법전 강(姜)씨
집안에 가신 고모댁, 그리고 거촌, 바래미, 조향(祖鄕)영주의 소고집등 이름있는
분들과 교류하시면서 견문도 넓히고 일상생할에 그 영향도 많이 받으신것 같았다.
특히 며느리에 대한 모든 것은 각별하셨다. 안에서 읽을 책도 구해 오시고 안으로
사돈간에 교신한 소위(所謂) "사돈지"라는 것을 읽게 하시고 지어 보라고도 하셨
다. 금정으로 출가한 고모의 문장(文章)이나 필체(筆體)가 좋아 오시면 같이 지내며
본받아 보도록 했었다.
안방에서 사돈지를 유창하게 특유의 고저를 넣어 읽는 것을 보고 들은 기억이 있다.
이렇게 관심을 쏟았던 그 며느리의 시중을 평생 받으시면서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그 며느리의 효성도 지극하셨다.
옛날에 흔히 봤던 목 뒤에 나는 곪는 종기(腫氣)를 "발찌"라고 했는데 아버지가 목
뒤에 이런게 났었다. 이것이 곪기까지는 며칠이 걸리고 매우 아픈것이 특징이다.
곪은 뒤에는 고름을 짜내야 하는데 목 뒤이기에 누군가가 해주어야 한다.
이 일을 며느리가 손으로 고름을 짜는 것이 아니고 주저없이 입으로 피고름을 빨아
짜냈었다. 불순물 제거와 소독도 된 셈이니 이 상처는 쉽게 치유됐었다.
이 소문은 널리 퍼져서 주위에서 효부라는 칭송을 많이 들은 흐뭇한 일화를 남기셨다.
아버지의 마음도 흡족했을 것이다.
지금 세대들은 상상도 못하고 또 이렇게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아버지는 대범하셔서 안에서 하는 일은 도외시 하실것 같은데 장담는 일은 매주 쑤는
일 부터 돌봤고, 김장하는 일은 꼭 손수 하셨다.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손수 며느리
들과 같이 함께 했고 김장 독을 땅에 묻고 눈비를 가리는 "우더기"설치 까지 마무리 하
셨다.
장담기, 김장.....이 발효 저장 식품들은 생명과 직결되는 가장 소중한 먹거리였기에 손수
즐겨 하셨을까?....
그때의 김장꺼리를 생각해 보면 알이 꽉찬 배추란 것은 구경도 못해 봤고 그런 배추가
있는줄도 몰랐다. 무우와 시퍼런 배추잎만으로 김장을 했으며 그 외에 콩잎, 팥잎,시레기
등 건조 시킨것을 겨울 내내 먹고 살았으니 요즘 말하는 건강식품만 먹고 산 세이다.
달리 겨울에 먹을 꺼리가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아버지는 말년에 병마와 싸우시면서도 이 일은 하셨으니 며느리 사랑, 가족사랑의 한
내면에는 이렇게 솜털 같이 따뜻함이 녹아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게한 어른이셨다.
춥고 한기가 든다고 어께에 두꺼운 포대기 같은 것을 드르시고 밖에서 이런 일을 하시
던 모습을 잊을 수 가 없다.
세속(世俗)에서 말하기를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고 들어 왔다. 비교의 대상도
안되지만 현대를 사는 시아버지들은 어떨까? 아주 먼 옛날에나 있을 수 있는 예기로
웃움 짓겠지!.... 그렇지만 이것은 바로 우리 윗 세대의 어른들이 사셨던 모습이다.
바로 우리 집에서.........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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