回顧輯草案

마지막 본 세째 누님

bsk5865 2021. 10. 13. 15:22

마지막 본 세째 누님

 

창평(昌坪)으로 누님이 출가할 때는 내가 국민학교 저학년때였다. 자주 찾아가서

자고 오기도 했었다. 신혼부부가 기거하는 아랫채 그 방에서....철이 없기로서니....

대구 무태(無怠) 김녕김씨(金寧金氏) 집안이었던 사장 어른 내외분도 큰사형 내외분도

생질의 4촌도 아직 그 얼굴들을 기억할 수 있다.

 

그때 밤이면 전깃불이 꽃밭을 이룬 부럽던 다덕광산(多德鑛山)이 일터였고 일제시대

였기에 일본어를 잘 했었다. 자형은 힘이 장대하여 면내 채XX씨와 함께 씨름 대표선수

이기도 했었다.

일제 말기에 다덕광산이 폐광되더니 지방 경기도 사라지고 해방을 맞고서는 생활터전도

바뀌었다.

누님집도 분가했고 사장어른도 돌아가시고.....어릴 때 그런 추억만 안고 세월은 흘렀다.

 

집의 세째형과 자형은 같은 연배라서 허물 없이 잘 지냈었다.  처가에 오면 잘 어울렸고

눈이 내려 험한재 때문에 갇혀있기도 했지만 사위 대접은 어느 집이든 각별했었다.

닭장의 닭의 수난은 물론이요, 떡도 메밀묵도 비빕밥도.....그때는 그렇게 처가에 오면

백년손님 처럼 잘 해 주는것이 오랜 관습이었다.

말년에는 질녀인 명서가 제주도에 살았기에 같이 제주도 여행도 즐겼다고 들었다.

같이 하늘을 날았으니 마음도 같이 하늘을 날만큼 기뻤을 것이다.

자형은 처가에 대한 관심도 지대하여 크고 작은일 모두 참여해 주셨고, 대구서 내 환갑

때도 형둘과 같이 오셔서 축하해 주셨다.

이제 모두 세상을 떠나셨기에 보고 싶은 마음으로 생전에 각별했던 모습을 그려봤다.

 

내가 봉화에 살때 어느 이른 아침 자형이 찾아 오셨다. 안동 성소병원에서 오시는 길이

라고....놀랍고 억장이 무너지는듯한 말을 전하기에 차를 세워 두었다는 중학교 앞까지

같이 갔었다. 

차에 가보니 출산고(出産苦)를 겪다가 잘못되어 애석하게도 생명을 잃었단다.

정말 망연자실(茫然自失)......핑 도는 눈물과 함께 만감이 교차되는 순간 차는 정든

집으로 떠나 벼렸었다.

 

그래도 또 한순간 생질 대연(大淵)이 모습이 떠 올랐다.  얼마나 황망 했을까? 순산해

올것으로 알고 그 준비를 했을 집이 초상 집으로 돌변했으니 세상에 이런 기막히는 일

이 어디 있으며 이런 모습으로 어머니를 보내게 됐으니 그 애통함이야 어디에 비할까..

이제 허리 펴고 살아 볼 날도 멀지 않았는데....생활과 육아(育兒)에 파묻혀 평생  고생만

하시다가 눈울 감았으니 참 박복한 누님이셨다.

 

1955년인가? 잠시 동양학교에 근무했는데 그때도 3번쯤인가? 찾아 봤을뿐 자주 만나

보지 못한 처지인데 이렇게 눈을 감은 후에야 만났으니....이것이 앞날을 모르는 인생인

지.....이 세상에 나 보다 4살 위인 누님과는 이렇게 작별했었다.

 

누님이 출가했던 그 옛날은 전쟁중이었다. 비상시국에 모든것이 전쟁으로만 내몰리던

세상!....젊은이의 안정을 일찍 찾아주기 위해 혼처를 찾아 출가 시킨것으로 짐작해 본다.

 

같이 커갈때 나를 잘 대리고 놀아  주었을 것이고 누나에게 응석도 많이 부렸을 것이다.

누님! 내가 철들어 누님을 만난 것은 평생을 통해 보면 지극히 짧은 시간들이었고  잘

해드리지도 못해 송구스런 마음만 남아 있는 동생을 너그럽게 봐 용서해 주시고.....

 

슬하에 5남매 남기고 떠났으니 저 세상에서도 살아 가는 모습 지켜 보면서 아무런 걱정

없이 편히 쉬세요. 그리고 이들의 앞길을 밝혀주세요.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