回顧輯草案

갑술생 숙질(甲戌生叔姪)

bsk5865 2021. 10. 13. 21:57

갑술생 숙질(甲戌生叔姪)

 

우리 집엔 갑술생 동갑내기 숙질이 같이 컸었다. 나와는 4살차 이지만 어릴때는 많은

연차(年差)를 느꼈었다. 80 을 너머 같이 늙어 가고 있는 지금은 아니지만....

장조카 보다 동생이 측은할 때가 많았을 것이다. 아버지 일찍 여의고 모든일 형을 의지

해야 했으니.....형들도 자식이 크고 있고.....들어 내지는 않았지만 어머니의 마음도 늘

그랬을 것이다.

 

구민학교 입학할때도 시험을 받던 시절,  그때 교장이 데우라(出浦)라는 일본인이었는데

"내 동생과 조카도 입학시험 본다"고 말한적이 있다. 내 학교 성적이 좋은 편이니 숙질도

좋을 것이라는 암시와 청탁형의 서툰 표현인듯한 어릴때의 추억이다.

일제시대에 입학해서 4학년때 해방을 맞아 다시 우리 한글로 공부한 세대다.

 

중학교가 20리 길이어서 우선 고등공민학교에서 계속 공부하다가 중학교에 편입했다.

그때 내 중학교 선배(작고) 가  재직하고 있는 것을 모르고 교무선생인지? 하고 편입 교섭을

했었다. 그것을 선배가 알고 "내가 이 학교에 있는데 내게 먼저 용건을 알리지 않았다" 고

섭섭해 하는일이 있어 미안했었다.

그 선배가 일어로 자기들 끼리 영, 수, 국만 보자고 제안해서 그 덕택으로 영어, 수학, 국어

3과목만 실력테스트를 하고 학력을 인정 받아 편입학이 됐었다.

 

그후 먼길 다니면서 공부를 잘해 안동사범학교에 지원 같이 합격....숙질의 장래는 교육계

진출이 보장 되어 온 집안이 기뻐했었다.

그러나 하숙도 못시키고 자취3년의 신고(辛苦)를 겪게 했으니 가족으로서 면목없는 과거사

가 됐었다.

 

그 모진 고생끝에 얻은 값진 보답으로 비교적 순탄한 인생의 길을 밟았을 것이리라....

또 나라의 경제도 고도로 성장 했고 재정에 여유도 생겨 복지에도 눈뜨게 되는데 까지

왔었다. 퇴직금, 연금 같은 새로운 용어가 일반화 되고 이런 복지제도의 시행으로 퇴임(退任)

후 이 제도의 수혜자가 됐으니 노후까지 보장 받는 시대적 행운도 누리게 되어 고마운 일이다.

 

내 교단에 있을때 비사계(非師系)라고 푸대접 받아 새로 공포된 법의 규정을 적용(1949, 5,

공포했고 나는 1개월 후1949, 6, 임용, 공포전은 모두 준교사) 강등시키고 다시 준교사고시

(準敎師考試)를 거쳐 겨우 2급 정교사로......

숙질은 정규 사범계 출신으로서 신분 보장에는 정정당당 했을 것이니 나와는 비교도 안되는

복된 일이었다.

 

숙질은 모두 교장으로서 정년 퇴임을 했으며 우리집에서는 제일 높은 벼슬을 했다.

만약 공직에 나가는 것이 고소원(固所願)이셨던 아버지가 계셨다면 끝으로 숙질이 교장 까지

올랐으니 어떤 얼굴로 이를 반겼을까?.......지하에서도 기뻐하고 계실터이니 효도를 다한것이다.

교장 재직시에는 모두 초대를 받았었고 그 지역의 별미로 환대애 준 것이 고마왔고 오래오래

도록 즐거웠는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우리 3숙질은 1930년대생으로 빈곤의 시대에 어려운 가운데서도 정규교육과정을 이수시켜

우리집 최초로 배출한 지식인이다.

지식인이라고 해서 우리집에 혁신적인 변화는 주지 못했지만 그래도 세상속에서 시대변화에

따라 우리의 현실과 잘 타협하면서 우리 대가족이 살아 오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지식인이었지만 물(物)적인 것은 항상 빈곤의 시대였기에 미진한 구석이 많아 아쉬운 점으로

남아 있다.

 

그로 부터 30여년 !  자유와 풍요가 넘치는 달라진 세상에서도 그 물결에 함께 휩쌓여 흐르고

있는 우리 대가족의 오늘이 있음은 시대와 잘 타협하면서 살아 왔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