回顧輯草案

남아 있는 늦동이 형제(兄弟)

bsk5865 2021. 10. 15. 00:20

남아 있는 늦동이 형제(兄弟)

 

5형제중 위로는 모두 돌아가시고 나와 동생만 남았다.

통상 막내는 위로 부모형제의 사랑과 보호를 받기만 하고 자란 존재지만 많은 식구가 살고

있었던 우리집은 그렇지 못했었다.

클때의 기억은 별난 것이 없다. 나이 차가 별로 없었으니까....

국민학교때는 담임이 중학교 선배라서 자주 만났고 어느 해 가을 소풍지인 청량산(淸凉山)에

가서 같이 1박(泊)한 추억이 남아있다.

 

우리집 뿐 아니라 그 때의 농촌사정은 다 그러 했지만 가난이 겪는 일은 모두 겪었다. 먹거리,

입을 거리, 주거공간....철이 없었던 시절이었지만 늙어서 그때 일을 생각해 보면 그렇게 열악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 공부를 했고 이렇게 성장 했을까? 하고 인간의 한계란 없는 것이고 적응력

도 끝이 없는 것이라고 믿어 보기도 했다.

 

어미니 따라 형 그늘에서 학교 공부가 시작됐었다. 그 뒷바라지도 넉넉지 못해 고생 했었다.

사범학교에 진학 하고는 숙질이 자취(自炊)3년의 견디기 힘든 세월을 보낸 흔적이 아직도 묻어

있을 것이다. 그래도 진로를 상의하고 힘이 되어줄 조언자(助言者)가 가족중에 있다는 것은

나 보다 좋았다.

 

그리고 정규 엘리트 코스를 밟아 공인(公人)이 되고 지식인으로서 장래를 맡겼으니 이것 또한

우리 집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직장 따라 집을 떠났으니 자연 분가로 독립했고 그때 어머니가 기뻐하시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우리 막내와 손자가 선생님이 됐다" 동내 한바퀴 돌아도 어깨가 으쓱했을 것이다. 

내색은 잘 못하시는 분이지만....

그것도 숙질이 같은 기쁨을 안았으니 그 어깨는 더 올라 갔겠지....어쩼든 한때 마을의 화제가

됐었다.

 

나는 5,16후 병역미필자 겅리 할때 이 지침에 따라 소집되어 입대신검(入隊身檢)을 받았었다.

그 신체검사에서 폐질환자(肺疾患者)로 판명되어 귀환조치 됐었다. 그것은 개인적인 사정이고

신분 처리는 자동 면직....1년 복무제대 자동복직이란 것이 지침이었는데 예외(例外)가 됐으니

입대도 못하고 직장도 잃고 병 치료는해야할 처지가 됐었다.

 

결국 미필자란 오명(汚名)을 썼지만 6,25 전쟁중에도 우리 나이 또래와 같이 영장 받아 포항

영일국교에 입대신검을 받기 위해 집결했고 며칠 교실 바닥에 머물면서 대기하다가 신체검사

에서 근골박약(筋骨薄弱)등의 이유로 귀환조치 됐었다. 다음 해에 다시 징병 신체검사를 받았

고 ...약체질인 신체적 결함 때문에 못간 것이지만 세상은 이를 봐 주지 않았다.....

이래서 부러운 것은 살찐 사람이고 평생소원은 건장한 체격이었다. 선천적인 약체질을 후천적

으로 극복 못하고 평생을 살았으나 그래도 잘 견디고 오래 살았다.

 

실직자가 된 막막한 처지에 있을때 동생이 제일 먼저 해 준것은 고향에 가서 보신용으로 장만

해온 개 한마리.......이것을 먹으면서 폐결핵약을 먹기 시작했었다.

1960년 초에 찾아 온 이 위기를 동생이  중심이 되어 안 사람과 같이 잘 극복해 주었었고 나도

치료에 전념했다. 생계를 위해 직장 동료들의 하숙도 했고 프린드 인쇄도 했었다.

이렇게 세월이 흘러 동생의 협조로 생활도 점차 안정되고 후에 교육청에서 복직권유도 있었

으나 지금의 생활이 좋아 사양하기도........

 

그렇게 살다보니 동생의 혼기가 늦어짐에 따라 걱정했었는데 마침 주위에 직장이 있는 좋은

규수가 있어 혼담이 오고 갔었다. 시간을 두고 서로 생각하는 여유를 가진후에 허혼(許婚)의

기쁜 소식이 왔었다.

 

결혼식은 그때의 사회상(社會相)으로 봐서는 체면유지는 했다고 생각  했었다.

군수 주례로 각 기관에서도 친지도 올만한 사람은 모두 와 주어 흡족 했었다.

그리고 우리 형제의 마지막 혼사를 어머니 생존시에 올린 것이 무엇 보다도 다행으로 생각

했고 우리집에 처음으로 직장 여성을 며느리로 맞이 했었다.

어머니도 말은 없었으나 그것을 얼마나 애타게 바라고 계셨을까?.. 나도 부모 되고서야 그

심정 헤아려 봤고 말 한마디 따뜻하게 보듬어 드리지 못한 불효 자식이 돼버렸다.

 

맨 아래로 형제가 내 불운(不運)을 계기로 한집에서 살다가 결혼해서 한 가정을 이루게 됐으니

이 또한 인생사중 기쁜 일이 아닌가?

직장 따라 직급의 상승에 따라 군내로 도(道)내로 옮겨 다녔으며 특히 포항 교장 재임시에는

초청을 받았고 해산진미를 즐긴 하루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 대구 칠곡이다. 시내 버스로 우리집에서 1시간이 걸리는 먼곳이다.

 

동생이나 나나 같이 고향을 버리고 이곳 대구에 정착했다고는 하나 원거리에 있기 때문에

부랭이 처럼 조석으로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서글픈 것은 건강 문제가 늘 앞서 만남의

제약을 받는다.

가끔 만나면 점심 함께 먹고 용돈도 나누어 주기에 젊었을 때 느끼지 못한 감회에 젖기도

했었다.

 

슬하 자매는 모두 출가를 잘 해 걱정 없이 잘 살고 있다. 특히 이들은 효성이 지극하고 우의도

좋아 늘 한마음이 되어 멀리서나마 부모를 걱정하고 잘 돌봐 주고 있어 보기도 좋고 흐뭇하다.

그리고 출가해서 아이들 잘 키운것도 장하지만 생활력도 돋보여 제손으로 이룩한 자산도 만만치

않다.  남의 부러움을 주고 있는 억척이 들이다.

 

동생은 퇴직후에 봉사활동도 복지관을 통해 많이 하고 있다.  자기 발전을 위해 서도(書道)도 익혔

으며  젊은이 못지않게 컴퓨터 스마트폰....등 최첨단 과학문명이기도 능숙하게 조작(操作)하는

재능을 지니고 있어 이를 생활에 잘 응용하면서 시대와 같이 살아 가고 있다.

 

늦게 시작한 글 쓰는 일, 특히 시작(詩作)에 정진(精進)하더니 그 실력이 일취월장(日就月長)하여

시단(詩壇)에도 올랐고 작품집도 여러번 발간 했다.

또 오래된 2005년에 "신인문학상"도 수상 했었다.  

지금도 매일 시 한편 쓰는 것이 일과 처럼 되어 있다.  그 시 가운데는 잊지 못할 고향 가슴에

묻어 두고 있는 고향 "부랭이" 에 대한 시를 많이 남겼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후기(後記)

이제 90고개를 넘기고 노령에 이르고 보니 힘 드는것 중 하나는 외로움인듯 하다. 주변의 지인

들이 죽고 병들어 사라져 가니 허전한 마음은 비길데 없는데 이를 덜어  주는 우리 형제가 건재

(健在)함은 하늘이 준 축복이리라........

 

내 노후의 생활주변을 늘 돌봐 주는 것도 고맙고 무엇 보다 곁에 있다는 것이 심약한 나에겐

태산 같이 든든하고 즐겁다.

부끄러운 것은 항상 받기만 하는 나약함이다.

 

고향에서 울리고 살았던 자랑스러운 장곡댁(壯谷宅)의 아들 !  그 끝자락도 가풍을 이어 진작

(振作)했고 건실(健實)했으며 또한 그 끝도 장대(壯大)하리라고 외쳐 본다....202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