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職場人)의 수난(受難)과 효심(孝心)
6,25전쟁으로 모든 걸 잃은 우리는 세계최빈국이었다.
3공화국의 출범으로 시작한 경제개발의 열매가 1995년에 대망의 10,000불 시대를
맞았고 고도 성장의 호황(好況)은 이어져 갔었다.
정치 정세가 바뀌어 꿈 같은 10,000불 시대를 연 중추세력을 군사독재로 매도하던
소위 민주화 세력이 집권했던 김영삼 문민정부 말기에 외환관리를 잘 못해 국가 부도
사태의 위기를 맞았었다.
식량의 자급자족 (1976) 으로 보릿고개도 사라지고 경기의 호황도 이어져 잘 살기 위한
꿈이 영글어 갔었는데 이런 어려움을 당했다.
이런 연유로 국민소득도 10,000불에서 6,700불로 후퇴했고 이를 만회하는데 5년이 걸렸
다. 그 5년을 허비 안했다면 같이 출발해 40,000불을 넘긴 "싱가폴"을 따라 갔을수도...
아까운 시간이었다.
이 사태의 수습에 들어선 교체된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는 외화를 빌려온 공적자금(이자는
국가가 부담)을 퍼 주면서 구조조정에 나섰었다.
합치고, 축소하고, 없애 버리고......
이때 부터 직장인들의 수난시대(受難時代)가 시작 됐었다.
처음 들어 보는 IMF 정국.....이때 맏사위는 축협포항지점장으로 있었다. 도시의 지점장을
맡아 나갔으니까 꿈도 많았을 것이다. 가족들의 기쁨도 컸었다.
초대를 받아 항구도시의 밤을 함께 즐기며 기쁨을 나누기도 했었다.
아직 이 도시에 뿌리도 내리기 전 IMF정국은 구조조정 작업에 나섰던 것이다.
"구조조정" 이란 낯선 단어 속에는 "농협, 축협의 통합"이라는 날벼락 같은 일이 들어 있었다.
반대 데모등 반항도 있었지만 통합작업은 진행 되었고 인원의 감축을 위한 인사문제까지 대두
되었다.
원래 통합이란 1;1 동등한 자격에서 해야 함에도 요즘 말처럼 갑,을(甲,乙)관계가 성립되었고
을(乙)에 위치한 축협 쪽에 감원을 유도키 위한 치사한 외압(外壓)풍경이 일어났다.
직급도 강등 시키고 한직(閑職)으로 내 몰고 심지어 사무실 채상 배치 같은 시시콜콜한데 까지
차별화......이렇게 왼갖 치졸한 짓으로 갑(甲)의 횡포가 곳곳에서 자행 되어 축협계렬의 인사의
불이익은 계속 되었었다. 따지고 보면 원래는 한 뿌리에서 갈려 나왔는데.......
이 와중(渦中)에서 끝까지 이들과 맞서 참고 싸우고 한 긴긴세월....
혼자 감당해야할 심신의 신난(辛難)을 참아가며 정년(停年)까지 간 그 불퇴전(不退轉)의 정신
은 높아 평가 받아야 한다.
내 혼자가 아닌 가족을 위한 일념으로 침착하게 대처했고 외로운 가운데 끈질기게 이어 갔던
그 감투정신(敢鬪精神).......어쩌면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했으리라....
특히 풍요에 길들어진 나약(懦弱)한 요즘 세대의 귀감(龜鑑)이 되고도 남을 일이다.
그렇게 하여 농협이라는 한집 식구가 됐는데도 한동안 한직으로 지내다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색깔도 퇴색해 버려서 인지 부책임자를 거쳐 단위 기관장 까지 올랐고 축협공판장을 끝으로
정년 퇴임을 맞이 했다.
비록 평생 직장생활에서 시대가 안겨 준 굴곡(屈曲)도 겪었지만 유종의 미를 장식한 것은 축복
받을 일이다.
맏사위는 이렇게 IMF사태에서 온 직장인의 수난을 강인한 자세와 신념으로 극복하고 축복의
대미(大尾)를 장식 했었다.
그러나 많은 직장인들은 실직하고 파산과 동시에 가정도 허물어지고 심지어 노숙자의 양산등
사회적 갈등과 고통을 주었으며 그 후유증은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채로 곳곳에 널려 있다.
한 정권의 실정(失政)이 이렇게 직장인을 어려운 세상으로 몰아 넣었고 나라의 경제에도 큰 손
실을 끼쳤었다.
그러함에도 아무런 책임의식과 사과도 없이 뻔뻔하기만 한것이 정치인의 얼굴이라면 참 서글픈
일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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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中年)의 변신(變身)과 효심(孝心)>
여기서 꼭 적어 두고 싶은 가상(嘉尙)한 일은 부모에 대한 효심(孝心)이다.
손서방은 퇴임후 2011년 부터 매월 용돈을 직접 내 통장으로 보내 주고 있다.
매월 보내 준다는 것에 큰 뜻이 있고 마음 든든하게 의지할 평생 사금고(私金庫)같다.
고맙다. 손실이 내외 모두.....
해외 여행도 국내 여행도 여러번 같이 다녀 주었고 외식도 자주 했었다. 더욱 고마왔던
것은 부랭이로 돌아가고 싶어서 없는 돈을 짜내어 작은 집을 마련할때 건축비를 보태 주었고
울타리와 조경수를 인부를 고용 직접 심어 주었었다.
이 곳에 찾아 올때는 꼭 꽃나무와 조경수를 사가지고 와서 심고 구석구석 살펴 보며 손을
써 주었었다.
스포스땐스 강사로 나가는 맏딸은 엄마를 주 2회 대리고 다녔었다. 그 세월이 10여년이 흘
렀고 늙은이의 생활에 활력소가 되었으니 그 마음씀이 고마왔었다.
일찍 운전을 배워 엄마를 태우고 집까지 왔을때 엄마는 기뻐서 눈물이 났단다. 그때는 아직
여성 드라이버가 드물때였기에..........나도 1997년 부터 운전 실기를 맏딸과 두째 사위한테
배워 익혔었다.
맏이가 중심을 잡고 있는한 앞으로 3남매의 유대는 튼튼히게 이어나갈 것으로 믿어진다.
이렇게 효도하면서 살아온 맏이의 중년(中年)생활은 아름답고 믿음직 했었다.
변신(變身)에 또 변신을 거쳐 거듭난 인생을 살고 있어 곁에서 보기에도 놀랍고 자랑스러웠다.
생각지도 못했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으니 놀라운 변신일수 밖에 없었다.
아이들 모두 키워 놓고 생긴 한가한 시간을 놀고 즐길만도 한데 그 시간을 이용하여 과감하게
사회활동에 나선 것이다 .
본래 춤에 대한 바탕이 잠재해 있었는지 아니면 노력의 대가인지는 모르겠으나 일찍 스포스
땐스를 익혔었다.
시류(時流)에 따라 수요(需要)가 있는 곳에서 봉사한 세월이 10여년을 넘었고, 새 스탭의 창작
능력은 출중(出衆)하여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큼 주위의 격찬을 받아 왔었다.
비판적일수 있는 앨리트 수강생을 실력으로 누르고 타고 난 친화력(親和力)으로 이들을 이끌
었기에 더욱 그러했었다
그래도 끊임 없이 자기발전의 노력을 게을리지 않는 생활태도는 모범적이고 본받을 일이었다.
각기 다른 인격체들을 통제해 가면서 목적한바 대로 이끌고 나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런 일을 인기리(人氣裡)에 잘 처리해 나가는 능력의 소지자로 그 자리를 굳혔었다.
정말 맏딸의 중년은 아름답고 자랑스러웠으며 같이 다닌 엄마가 남에게 들은 딸의 칭찬도
그러했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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