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탄(順坦)했던 막내의 초년(初年)
봉화여중 입학시험에서 수석을 따낸 인기있는 막내였다. (그때 시험성적은 공개 안했던
시절이었지만 비공식으로.......)
교내 행사때는 피아노 반주를 맡아했고 학생들 간에는 잘 알려진 모범생이었다.
대구로 전학 수속차 여중을 방문했는데 학교로서는 보내기가 아까운 존재라고 아쉬워
하던 선생님들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남에게 돋보이려고 행동하는 것도 아니고 시키는 것, 해야할 것을 열심히 하는 성격이기
에 그러한 결과인듯 하다.
학과에 있어서는 특히 수학을 잘 한다는 선생님의 칭찬이 내 귀에 까지 전해 졌었다.
대구에 와서는 자리가 나는 대로 추첨을 통해 배정된 여중이 경일이었고 흩어져 있던
식구가 한곳에 모이게 됐었다.
1983년 부터는 대구 사람으로 살아가야 했다. 학교생활도 봉화여중때 처럼 돋보였던 위치
에서 벗어나 마음 편한 평범한 위치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겼을 것이다.
여고도 효성여고를 졸업하고 영남대학에 들어 갔었다.
그때 나도 직장에 나가고는 있었으나 형부인 손서방이 대학 입학금을 대납해 주었다.
잊어서는 안될 고마운 일이며 이것이 가족의 사랑이다.
범어동에서 긴 세월 하숙을 치면서 대학 뒷바라지를 했었고.....
지금 살고 있는 신암동으로 이사와 새로운 삶을 시작 하기전 대학은 졸업했었다.
취직이 어려운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지만 좋은 계기가 때마침 있어서 또 그 기회를
잘 활용할 수 있었기에 졸업과 동시에 대구은행에 취직까지 됐었고 이는 엄마의 노력으로
좋은 결실을 맺게 된것이다.
온 가족의 기쁨은 말 할것도 없고 행복했었다.
그때 대구은행이 확장 발전하던 때였고 첫 직장으로 경대교 지점으로 발령을 받았었다.
막내를 첫 직장에 보내 놓고 그 직장에 관심이 많았던 그때는 재산세를 은행에서 경쟁적
으로 유치 수납했었다. 납기가 되면 여러 곳에서 교섭이 왔지만 막내가 경대교 지점에
있었기에 나름대로 많이 몰아 주었고 상당한 고액 나세자의 것도 있었다고 기억한다.
마을금고에서 받은 것도 몽땅 털어서 보내며 막내의 첫 직장 근무를 후원했었다.
아마 윗사람 보기에도 흐뭇했을 것이다.
세월이야 많이 흘렀지만 대구 와서 졸업과 동시에 취직 까지 했으니 대견하고 신바람이
났던 시절이었지.......
새아파트에 입주했고 막내는 은행에 출근하고 나도 직장에 나가고....
대구와서 가슴 뿌듯한 행복감에 젖었을 때였다.
경대교 지점에서 은행 업무에 익숙해 질때 까지는 고생을 했었다. 그것은 누구나 모두
겪는 일이며, 처음부터 좋은 선배만나 업무를 잘 익혀 행원으로서 내 몫을 다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행원들 중에는 자기들은 고졸출신인데 대졸자가 왔다고 빈정대는 소리도 들여 왔다.
이무렵 또 행운의 여신을 만나 큰 도음을 얻어 대구은행 본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로서 창구 업무도 면했으며 본점으로 발탁된 것은 엄청난 영전을 한 것이고 보통 행원
들은 기대하기 힘든 인사 이동이었다.
범어동에서 큰방 하나에 식구가 같이 기거했고 고3의 신고(辛苦)의 1년을 보내는 등
고생했던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는 잘 짜여진 톱니바퀴 돌아가듯 한치 오차도
없이 제때에 척척 잘 풀렸었다.
낯선 객지 대구에 와서 이처럼 순탄(順坦)한 길이 열리게 된것은 여러사람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렇게 많은 복을 누리게 된것도 또한 막내에게 내린 큰 축복이었다.
어릴때 부터 막내는 큰 탈 없이 잘 자라 주었고 사회 진출의 기회까지 제공 했으니 부모
로서의 역할도 여기까지로 끝나는 것이며 앞으로 화려하게 전개될 너의 인생은 모두가
너의 몫으로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가지 잘 해냈다는 안도감(安堵感)보다 섭섭한 마음이 앞서는 것은 묶여있던 끈을 놓아
주는 것처럼 할 일 없는 늙은이로 전락할 내 인생을 슬퍼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 흐르듯 순탄하게 열리게 되었던 여자로서의 행운의 직장이 결혼과 동시에 끝나 버렸다.
옛날에는 결혼하면 그만 두었던 시절도 있었으나 요즘은 직장인의 모든 권익이 보장되고
남여 차별도 없는데 출산, 육아 등의 고생이 수반 되드라도 맞벌이 부부로 시작 했드라면...
하고 지금도 엄마는 아쉬어 하고 있다. 그때는 엄마도 힘이 조금 남아 있을때 였으니까.....
아직 은행에 있었다면 지금쯤 어떤 자리를 찾이 하고 있을까?...어떤 모습일까?..
부질 없는 생각을 가끔 해 본단다.
3남매중 끝으로 태어나 부모룰 비롯 언니, 오빠, 모두가 보호막이 되어 주었기 때문에
막내는 다 그렇지만 많이 받으며 자랐고 대구로 왔기 때문에 대학 진학도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렇지만 어릴 때 나름대로 판단하고 정한 행동은 바꾸지 않는 때고집도 있었고 아무도
그것을 꺾지는 못했다.
막내는 학생때 부터 남학생이 잘 다랐다.
집 까지 큰맘 먹고 찾아 오는 청년도 있었고 골목길을 지키고 있다가 따라 오기도 하고
....하교(下校)길엔 골목에 나가 있다가 데리고 온적도 여러번 있었다.
대학때는 방학동안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는데 그때 첫눈에 마음 설레임을 가졌던
남학생이 어떤 인연으로 나와 자주 만나는 사이가 됐었다. 막내딸의 결혼소식이 전해지자
크게 실망하는 것을 봤다. 그동안 막내의 안부는 자주 물었으나 지나는 인사말인줄 알았는데...
오랫동안 짝사랑만 했는건지?.... 나를 통해 말을 해보려고 벼르고 있었는지........
그런데 지금의 김서방과 인연이 되어 오랫동안 사귀더니 어느날 양가의 부모가 만나기로
했었다. 수성호텔인지?...
인연의 결실을 전제로 만났기에 수인사 후에는 생활환경, 성장과정 등의 이야기와 두째 아들
결혼후 분가에 따른 집안의 계획등도 이야기가 있었다.
그리고 결혼식은 호텔에서 할 예정이었으나 그때 사회적 분위기에 맞춰 검소한 결혼식 쪽으로
1991, 10, 5, 고려예식장에서 치루었다. 신혼여행은 외국으로 떠났다.
우리와 김서방은 결혼전에도 내왕하면서 지냈다. 첫 만남이란 다 좋은것만 보이지만 특히 김서방
은 진정성, 적극성, 왕성한 활동력이 돋보여 가족에게 호감을 많이 샀다.
경대 정문쪽에서 잠시 조그만한 식당을 해본 경험이 있다. 그때 엄마의 일손을 도운다고 온 것이
끓는 물을 엎질러 발에 화상을 입었고 보행이 어려워졌었다.
이럴 때 김서방은 승용차로 데려오고 아파트 3층까지 업어다 주고....아침에는 업어서 차에 태우고
병원도 가고...출퇴근 하듯이 이런 생활을 오래 했다. 은행에는 병가를 냈고.....
신암동 새아파트로 이사 올때도 중요한 것은 승용차로 먼저 날라다 주었다.
두째 사위될 김서방 그때 점수 많이 땄었지......지난 그 세월이 좋았다.
본가에서 준비해 둔 아파트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맏딸 민지를 출산하기전 싱암동에 와
있었고 출산후에도 산후조리를 엄마 곁에서 했다.
아기 민지가 밤엔 놀고 낮엔 잠만 자고......이렇게 밤과 낮이 바뀐 갖난 아기 대문에 엄마와 산모
의 고생이 월여(月餘)동안 계속 되어 걱정을 많이 했었다.
그런데 제 집으로 들어간 후로는 정상으로 돌아 왔다고 한다.....신기한 일이었다.
제집인줄 알고 편해서 그랬을까?
이렇게 직장 그만 두고 결혼하고 첫 출산까지의 행로를 돌아 보아도 막내의 주위는 늘 보호해
줄 사람이 여전히 많았었다.
이젠 양가의 양친 그늘에서 벗어나고 자식 키우면서 인간 관계를 돈독히 하고 세상 살아가는
고달픈 인생길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 보여주기를 믿으면서 신혼생활을 지켜 봤었다.
막내는 두째 주성이도 순산했고 어른들을 기쁘게 해 드렸다.
우리 3남매는 밀약이라도 한듯이 각기 남매를 두었으니 손자가 6명,우리 내외와 함께 가족이
14면으로 늘어났다. 기쁘지 않을 수 없다. 활짝 핀 손자들의 출세 모습을 보고 싶다.
100세 장수 해서라도..............
민지는 커가는 동안 신암동에 많이 와 있었다. 출생후 첫 거주지니까.....
내외가 해외여행을 갔을 때도 와 있었고 바쁜일이 있어도 낯익은 신암동에 와서 놀도록 맡기
고 다녔었지.....민지가 조금 커서 데리고 다닐만 해지니까 동생 주성이가 뒤를 이어 신암동에
와있기도 하고 범물동 집에 우리가 가서 있어 주기도 했다. 어릴때 낯선 환경은 불안해서 싫어
하는 까닭도 있겠지만 고집은 있어도 잘 따라 주었다.
이제 아이들도 다 컸으니 돌봐 줄 일 없어졌고 그런 일이라도 맡겨 주었을 때가 좋았다.
우리 두 늙은이는 영영 식구들의 짐으로 변해 버린 현실이 더욱 허전하게 느껴진다.
(2011,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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