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행보(行步)의 변화<송이의 추억>
"오십이 지천명(五十而知天命), 논어(論語)에 나오는 말이지만 나이 50 이면 천명(天命)
을 아는 나이라고 한다.
지천명(知天命)의 연륜(年輪)을 쌓고 보니 성숙한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바뀌고......
옛 부터 "나이란 속일 수 없다"고 했듯이 아들의 행보(行步)에도 변화가 보였다.
엄마와의 안부 전화도 정례화(定例化)됐다.
바쁘고 잘 나가던 시절? 에는 전화도 뜸 했었다.
어쨌던 좋은 현상이고 고무적(鼓舞的)인 변화다.
아들의 존재가 이제 내 곁으로 돌아와서 기쁘기 그지 없다.
세속을 풍자하는 말 가운데 "빚진 아들은 내 아들" 이란다. 잘 나가는 아들은 남의 이들
이란 뜻이겠지.....
벌써 아들은 50대(代), 나는 80대 라는 연령층에 와 있으니 시간도 급하고 서글픈 생각도
든다. 그 촉박한 시간에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새로 시작한 사업들이 규모는 작지만 차츰 안착이 되고 넓혀가고 있는듯 하여 마음이
놓인다. 큰회사에 있을때 터득힌 그 경영능력을 십분 발휘하라. 액운이 모두 물러 갔으니
좋은 일만 찾아 올 것이다.
바쁜 가운데서도 부모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은 반갑고 흐뭇한 일이다.
건강을 염려하여 몸에 좋다는 것을 접하면 구해 보내주고, 외출할때 입을 겨울 걷옷도
마련해 주었었다. 일싱 셍활용품도 가끔 보내 주고 있다.
노경(老境)에 반려(伴侶)같은 컴퓨터 본체도 구해 주어서 잘 쓰고 있고, 스마트폰도 가져
보도록 해주어 시대와 같이 가는 자부심도 심어 주었다.
모두 감사한 일이다. 아침에 눈 뜨면 감사한 마음 부터 새긴다.
<송이의 추억>
2015, 10, 19, 예고 없이 배달된 택배....열어 보니 아들이 보내 준 송이!.........
가슴이 뭉클했다. 올핸 송이맛 꼭 보자고 염매시장에 갔다가 맛볼 정도의 양(量)은
안판다고 하기에 그냥 돌아 온 일이 있었다.
그 전에는 해마다 손서방이 구해다 주는 것으로 송이 맛을 이어 봤었다.
"송이"....어릴때의 추억이 각인(刻印)된 고향 계절 식품이다.
고향 앞산 똥그란봉(우리 산)에 옛부터 송이가 많이 났다. 그래서 가을이 되면 "송이"와
친숙해 졌고 그 후에 송이의 그 맛과 향은 늘 향수에 젖게 했었다.
지난 10년전 2005,10월 (1,2,3,연휴이용) "울진 송이 축제"에 손서방 내외와 함께간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덕구 온천에서 1박 했는데 그 날은 가을비가 조금식 내리기도 했었다. 밤이 되자 온천 숙소
로비에 금방 따온 싱싱한 송이가 왔었다. 보기에도 탐스러운 일등품이었다. 호기심도 발동
했었고 소유욕도 생겨 부끄럽기도.......
손서방이 이 송이를 구입했다. 비싼 값을 지불하고.....표현은 못했지만 반갑고 고마왔었다.
이튿날 귀로에 울진 어시장에서 생물 "대구" 한마리 사서 돌아 왔었다.
부랭이 새집에서 송이가 들어간 별미 대구탕이 만들어졌다. 그 맛은 아마 평생 잊을수 없는
것이 됐다. 지금도 송이 철이 되면 그 별미 대구탕 이야기를 나누며 군침을 삼킨다.
그로 부터 10년후 2015, 10, 19, 택배로 아들이 보내준 송이....쇠고기와 함께 맛보면서
돌아온 아들의 체취를 느끼듯 흐뭇 했었다. 그리고 설에 탕국에 그 송이를 넣어 가족과
함께 그 맛을 즐기기 위해 냉동 보관해 두었었다.
차츰 혈육으로서의 제 자리를 찾아 변해 가는 아들의 행보를 보면서 박씨 집안의 전통의
한 단면이 살아 바르게 흐르고 있음을 봤다.
___말로는 사랑 합니다, 존경 합니다, 못해도 행동으로 보여 주는것____
___이것이 우리집의 단점이기도 장점이기도 미덕이기도한 전통일 것이다.
(2015, 10, 2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후기(後記)
그로 부터 세월이 많이 흘렀다. 세상도 많이 변했지만, 우리집도 바람직한 많은 변화가
왔다.
#,애비의 사업도 불경기가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점차 성장은 이어가고 있어 반가운 일이다.
#,무엇보다 식구의 건강이 회복되어 가정이 원래의 제모습으로 돌아오고,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다. 참으로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엄마의 기도 덕분이다.
#,손자 찬제가 결혼하여 따로 나가 살고 있다. 대학 졸업후 이제까지 걸어 온 길이 스스로
모두를 이루었으니 부모의 걱정을 덜어 준 큰 효도를 했다.
애비와 같은 외동 아들이다. 마음만은 항상 부모의 곁을 떠나지 말라.
#,대구와의 거리도 좁혀졌고, 소통하고 지내고 있으니 서로의 생활 모습도 투명해 졌다.
#,고물가(高物價), 고가(高價) 의 주거 공간, 높은 세금 내는 강남에 살고 있으니 어려움도
많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실을 바탕으로 지혜롭게 살아 가길 바란다.
#,내 나이 92살!.....
우리 늙은이의 건강이 여일치 못해 걱정이고 날마다 무너져 가는 느낌이다.
또한 견디기 힘든것은 외로움이요, 보고 싶은 것은 자식들 뿐이다. _____(2021,10, 20)
'回顧輯草案' 카테고리의 다른 글
4, 신변을 돌아 보며 (0) | 2021.11.01 |
---|---|
순탄(順坦)했던 막내의 초년(初年) (0) | 2021.10.27 |
사돈의 사맘, 그 충격 (0) | 2021.10.25 |
중년(中年)에 시련(試練)을 배태(胚胎) (0) | 2021.10.25 |
믿어 보고, 꿈도 품고 (0) | 2021.1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