回顧輯草案 108

14世諱 焃 碑文

14世諱 焃 碑文 이 碑文은 1964, 9, 榮州 伊山通 雨勿來谷에 所在한 14世諱 焃 先祖墓 伐草를 爲해 後孫 棟陽, 勝文, 勝麟 3人이 갔던 機會에 寫本한 것이다. 그 後 1990年에 先祖墓는 潤洞後谷 入鄕祖墓域으로 緬奉하고 碑는 2001年에 세째兄 (勝旭)이 寫本한 原文대로 改竪했다 嘉善大夫 潘南朴公 焃(豊連)之墓 諱 焃 初名豊連 字震源 生萬曆三十一年癸卯 四月十五日 享年七十三歲 一男一女 乙卯正月 六日 配光山金氏 禮判德雨女 生癸卯 五月十日 享年七十六歲 康熙十七年戊午十月六日 子莫乃 壻 縣令安東人金道圭 墓在 榮川距三里雨勿來谷 雙墳甲坐庚向 考諱愛得 字佑永 官參議 生穆宗一年丁卯四月 十六日 享年八十五歲 永明五年辛卯八月十日 妣 丹陽禹氏 察訪錫鎬女 生辛未六月 十七日 享年八十二歲 永明六年壬辰九月十五日 墓在奉化 鳳城..

回顧輯草案 2008.05.14

13世諱 枝茂以下世系와墓碑改竪

13世諱 枝茂以下世系와墓碑改竪 2次編譜 癸亥譜(1683) 當時 關係者들의 錯誤로 14世를 愛得으로 誤記된채로 이런 傍註가 揭載되어 내려왔다. 舊譜 14世 愛得 傍註를 풀어보면 대강 이런 內容이다 乙酉譜(1825)에서 말하기를 丙戌譜(1766)를 살펴보니 愛得에 一子가 있다고 했고 또 癸亥譜(1683)도 같다. 乙酉譜(1825) 新單 에 子孫이 5代까지 내려갔기에 그 宗中에 물어보니 朴春祐(註; 18世諱 師德)가 玄孫이라고 하며 戶籍單子를 주기에 살펴 보니 朴枝完(註; 16世諱 文植) 나이 61세 貫鄕은 羅州(관향이 全南 羅州이기에 羅州朴氏라고도 했고 後에 潘南으로 統一했다) 父 莫奈 (註; 15世諱 世基) 祖 豊連(註; 14世諱 혁) 曾祖 愛得 (註; 13世諱 枝茂)로 되어 있다. 莫奈와 望來는 音이 相..

回顧輯草案 2008.05.02

判官公派譜編纂에 參與

判官公派譜編纂에 參與 1980(庚申譜) 中央譜所에 對한 不信의 壁을 높이 쌓고 지내던중 1998年에 우리 判官公派만의 派譜刊行의 일이 생겼다. 우리 門中에서는 여러번 큰兄님(勝德)이 門長으로서 이 일을 맡아 왔지만 이제 老齡에 큰 負擔을 드릴 수 없고 또 推進體構成員이 같은 年輩, 親知들이며 그리고 우리 門中에 마지막 奉仕의 機會가 될듯하여 마음을 바꾸어 이 일에 敎授公집을 代表한 修單員을 맡기로 했다. 榮州譜所를 大邱에서 자주 往來하면서 이에 對한 情報도 얻고 親密한 信賴關係도 쌓아 갔다. 또 이 機會에 지난날 콧대 높았던 中央譜所에서 못했던 族譜上의 誤謬도 비록 派譜이기는하지만 匡正하는 絶好의 機會로 삼기로 한것도 參與理由라 하겠다. 11世 敎授公집은 季派7兄弟中 맞집이며 以下世系가 좀 複雜하다. 1..

回顧輯草案 2008.05.01

族譜, 庚申譜(1980)編譜때 겪은일

族譜, 庚申譜(1980)編譜때 겪은일 族譜(족보))란 한 族屬(족속)의 世系(세계)를 적은 책이지만 우리에겐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이에 집착한 世代(세대)로 살아왔다. 방대한 양의 족보 全帙(전질)을 경제적 부담을 감수하면서 소장하고 있기는하나 그것을 펴보는 일은 극히 드물고 평소엔 잊고 지낸다. 그러면서도 대개 30년을 주기로 새 족보를 또 만든다고 많은 인력과 재력을 소모하고 있음이 현실이다. 우리도 7차로 1980년에 庚申譜(경신보)를 새로 발간했고 아직 30년도 안된 지금 또 8차로 족보를 만든다고 하고 있으나 그 이전에 우리는 판관공 파포를 2000년 (庚辰)에 발간한 후이므로 이에 대한 관심이 저조하여 추진에 시간이 많이 걸리지나 않을까 걱정이된다. 우리 小宗中(소종중)은 2차인 癸亥譜(1..

回顧輯草案 2008.05.01

긴歲月 가난과 함께

긴歲月 가난과 함께 내가 成長한 그 때는 國民所得 60弗도 안되는 貧困한 때이므로 모두가 가난을 겪었던 때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챙피스러운 일이기도하나 내 몫의 成長過程이었으므로 所重하게 記憶하고 싶어 이 글을 적어 보련다 어릴때의 기억은 별로 없으며 젖이 모자라 일찍부터 암죽으로 컸다고 한다. 암죽 끄리기가 얼마나 성가신 일이었을까! 그런 後天的인 要因이 있어 筋骨이 薄弱하고 맺힌데 없이 키만 훌쩍 커버린 것일까?......日帝때 中學生은 아랫종아리에 게도루(脚絆)을 감고 다녔으므로 그 아랫도리가 볼모양이 없어 恒常 부끄러웠다. 먹거리가 不足했던 때이기에 송구(松皮)는 자주 먹었고 어릴때 송구물(松皮와 木質사이에 있는 달콤하고 軟한 樹液)을 많이 먹어 吐하고 설사한 일이 있다고 들었다. 송구는 물이 오..

回顧輯草案 2008.04.09

就職하고 터진 6,25

就職하고 터진 6,25 就職이 어려웠던 時代에 아버지의 努力으로 當時 鳳城面長인 邊ㅇㅇ氏에게 오랜 請託끝에 얻은 자리가 鳳城面農業統計士였다. 人事書類 내고 出勤키로 했는데 다음날 出勤하니 擔當者가 하는 말 "그 자리는 取消됐다고,,,,,,"황당했으나 그대로 돌아왔다. 後에 所聞에 依하면 면사무소에 勤務하던 某氏가 그 자리로 옮겼다는 것이고 이 촌놈은 한마디 抗議도 못하고 없었던 일이 되었다. 그러다가 敎員任用試驗이 있음을 알고 應試 合格하여 敎生實習을 거쳐 1949,6,20에 鳳城國民學校로 發令이 났다 好事多魔라 했던가 슬픈일도 함께 찾아왔으니 그 해 겨울 58歲를 못채우시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내 就職을 기뻐하시고 장날이면 窓밖에서 내 授業하는 모습을 지켜 보시기도 했는데,,,,,장국밥 막걸리 한잔에..

回顧輯草案 2008.04.06

팔려간 故鄕 마지막 追憶

팔려간 故鄕 마지막 追憶 부랭이! 태어나서 자란 故鄕이고 先塋(선영)께서 잠들고 계신 고을이다. 九代祖(諱 世基)께서 300餘年前 開拓(개척)하신 고을이기에 矜持(긍지)와 主人意識(주인의식)을 가지고 살아왔다. 潘南朴氏 判官公(판관공) 季派(계파) 七兄弟中(칠형제중) 맞집 敎授公(교수공) 子孫(자손)으로 榮州서 그대로 살것이지 왜 이런 고을로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이렇게 조용한 寒村(한촌)이었지만 지금은 智慧(지혜)롭고 깨어난 뜻있는 子孫이 있어 쌀農事는勿論(물론) 果樹栽培(과수재배), 고추栽培에 育牛(육우)도 겯들어 收支(수지) 맞는 農事(농사)를 해왔고 제법 살기 좋은 고을로 탈바꿈이 됐는데,,,,,, 官(관)에서 人口流入策(인구유입책)으로 田園(전원)마을을 造成(조성)하는데 이 곳이 計劃地域(계획..

回顧輯草案 2008.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