回顧輯草案

팔려간 故鄕 마지막 追憶

bsk5865 2008. 3. 20. 15:10

팔려간 故鄕 마지막 追憶  

   부랭이!       태어나서 자란 故鄕이고 先塋(선영)께서 잠들고 계신 고을이다.    九代祖(諱 世基)께서 300餘年前 開拓(개척)하신 고을이기에 矜持(긍지)와 主人意識(주인의식)을 가지고 살아왔다.   潘南朴氏 判官公(판관공) 季派(계파) 七兄弟中(칠형제중) 맞집 敎授公(교수공) 子孫(자손)으로 榮州서 그대로 살것이지 왜 이런 고을로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이렇게 조용한 寒村(한촌)이었지만 지금은 智慧(지혜)롭고 깨어난 뜻있는 子孫이 있어 쌀農事는勿論(물론) 果樹栽培(과수재배), 고추栽培에 育牛(육우)도 겯들어 收支(수지) 맞는 農事(농사)를 해왔고 제법 살기 좋은 고을로 탈바꿈이 됐는데,,,,,,

 

    官(관)에서 人口流入策(인구유입책)으로 田園(전원)마을을 造成(조성)하는데 이 곳이 計劃地域(계획지역)으로 指定(지정)되어 이 고을이 팔려나갔다.앞으로는 官主導(관주도)로 田園文化小都市(전원문화소도시)로 다시 태어날 것임에  눈 감으면 떠오르는 고향의 모습은 없어지고 追憶(추억)만 남게 되었다.

     世上어느누구도 故鄕에 對한  所重(소중)한 추억들을 고이 간직하고 살아간다. 그리고 늙어서는 고향으로 돌아가길 꿈꾼다. 이런것도 歸巢本能(귀소본능)일까?  

     나도 2001年 아버지 墓所를 단장하던 그 해, 작은 兄이 살던 곳에 龜緖의 協助를 얻고 安東 큰조카 집에 寄宿하면서  房 두칸에 居室이 있고 廚房과 浴室이 있는 작은 집을 마련했다.  그 곳에 餘生의 꿈에 부풀어 있었고  하나씩 그 꿈을 심기 시작했다. 有實樹도 심고, 造景樹도 심고, 한 때 野生花에 心醉되어 山野를 헤메고 남의 庭園도 기웃거려 봤다. 금낭화, 매발톱, 초롱꽃등의 이름도 알게 됐다.

 

  내 精誠이 奏效했는지 이런것들이 잘 잘아주어서 周圍環境이 제법 운치를 더 해 갔고, 梅實, 대추가 열리고 , 단감도 열리고, 복숭아가 탐스럽게 익어서 이를 收穫하는 기쁨도 맛 보았다.

 

     그 동안 故鄕 小屋에 살면서 기쁘고, 반갑고, 믿어웠던 여러 일을 겪었다. 社會的으론 내 成長과 젊음을 奉化에서 보냈기에 知人들과 만나 옛이야기도 나누었고,  안으로는 우리 五兄弟를 中心으로 名節은 勿論  忌祭에도 같이 參席하고  좋은 일에는 같이 모여서 가장 가까운 家族의 情을 敦篤케도 했다. 또 行列(항렬)이나 年齡을 不問하고 生活이 自由로운 家族끼리는 親睦契를 만들어 月例行事처럼  山으로 바다로 名所를 찾아 즐겼다.

 

    우리 五兄弟를 묶은 一族이 물 좋고 空氣좋은 小川面古善 溪谷에서 여름 野營도 했는데 그 準備도 잘 했고 며느리 딸들이 내일 처럼  팔을 걷고 나서는 모습이 보기 좋아 잊지 못할것 같다.  어느 해 초여름 玉房에서 敎室을 빌러 一泊하고 바다로 나가 海産物 맛보고  風致 좋은 곳마다 쉬면서 웃고 먹고 마시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었지.  물고기는 먹는것 보다 잡는 재미가 더 있어 川獵에 여러번 따라 갔으나 잡는것 구경하는것 만으로도 재미가 있었다. 남대리에 가서는 一泊하면서 큰산나물을 뜯었는데 종류도 많았고 향긋한 山菜의  맛은 잊을 수 없었다. 李서방 回甲日에는 東海岸에서 多德까지 오면서 먹고 흥겹게 놀았던 하루,  李서방 買入家屋에서 二泊三日,,祥雲 崔서방 집에서도 一泊,古善명산렌드, 김삿갓墓, 드라마撮影場, 어느 콘도에서의 宿泊, 선비촌, 祝祭 道民體大,노래방, 等等,,,,,,,,

  家族들과 어울려 즐겁게 보냈던 그 時節이 좋았고 이젠 나이 탓도 있겠지만 다시는 없을것 같아 쓸쓸한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내 小屋 뒷山에 死後準備도 해 두었었다.龜緖가 主動하여 兄들의 山에 우리 內外무덤자리를 만들었으니 이름하여 假墓인 것이다.

  여기에 좋아하는 木蓮, 나무 백일홍도 심고 앞에는 진달래를 뒷편에는 꽃잔디를 심었고 雜草를 除去하면서 잔디도 잘 가꾸었다. 때  맞추어 伐草도 했고 假墓까지 가는 길도 周邊나무를 除去하여 넓혔고 繁殖力이 强한 아까시아도 藥을 칠해 枯死시키기도 했는데,,,

 

  이젠 내 緣故가 모두 살아졌고 이 고을은 팔려서 남의 손으로 넘어갔는데 가꾸어 놓은 假墓도 用途廢棄해야 겠다. 죽어서 그 무덤으로 간다고 해도 管理할 사람도 緣故도 없어졌다.

    

    故鄕에 있을때 故鄕의 土壤에서 자란 먹거리가 한없이 고마왔다.  어린 뼈와 살이 여기서 얻은 것이기에,,,,큰조카가 고향쌀이라고  실어 주던 쌀, 甲緖가 실어다 준 고향쌀, 고추, 사과, 옥수수, 감자,,,,,골밭에 심어본 山菜, 더덕, 도라지, 고구마, 호박, 콩,   빈터에  심은 상추, 파,,,,,,,이런 것들도 이젠 영원히 함께 할 수 없겠다.  이웃 우천아지매가 햇쌀이라고 주고, 색다른 음식하면 갖다주고,고추장,옥수수, 호박,,,,,이런것 나누던 이웃집, 같이 모시고 갔던 봉화장날의 풍경들......돌아가신 1주기에 祝文을 읽으면서 그 情이 그리워 목이 메었었다. 아랫마을 하눌아지매가 손수 밀어 만들어 주신 손칼국수는 두고두고 삶아 먹으면서 단박한 고향인심에 젖어 幸福 했다.

       

     어릴 때 내 四柱를 본 일이 있는데 그의 한句節 "祖基不利 移鄕八字" 가 있었다. 이젠 이 句節이 맞다고 해야겠지,,,,,故鄕도 팔려 나갔고 故鄕사람도 八方으로 흩어질 것이니 나도 故鄕에 對한 마음을 접어야할 때가 됐는가보다. 그 많은 追憶들만 가슴 가득히 안고,,,,,,,,,300餘年前 入鄕祖의 子孫으로서 主人意識도 버리고 歷史도 斷絶시킨 우리 世代가 果然 잘한 일인지,,,,,,,,,,,,,그래도 이 고을을   開拓한 歷史는 이제 우리와는 相關없이 連綿히 흐르면서 發展하겠지,,,,,,,,,,,,,,,,,,,,,2008, 3,  20     들길 벗

  x-text/html" style="width: 0px; height: 0px;" autostart="true" x-x-allowscriptaccess="never" volume="0" loop="-1">


 

'回顧輯草案' 카테고리의 다른 글

判官公派譜編纂에 參與  (0) 2008.05.01
族譜, 庚申譜(1980)編譜때 겪은일  (0) 2008.05.01
긴歲月 가난과 함께  (0) 2008.04.09
就職하고 터진 6,25  (0) 2008.04.06
永慕碑 碑文  (0) 2008.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