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歲月 가난과 함께
내가 成長한 그 때는 國民所得 60弗도 안되는 貧困한 때이므로 모두가 가난을 겪었던 때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챙피스러운 일이기도하나 내 몫의 成長過程이었으므로 所重하게 記憶하고 싶어 이 글을 적어 보련다
어릴때의 기억은 별로 없으며 젖이 모자라 일찍부터 암죽으로 컸다고 한다. 암죽 끄리기가 얼마나 성가신 일이었을까! 그런 後天的인 要因이 있어 筋骨이 薄弱하고 맺힌데 없이 키만 훌쩍 커버린 것일까?......日帝때 中學生은 아랫종아리에 게도루(脚絆)을 감고 다녔으므로 그 아랫도리가 볼모양이 없어 恒常 부끄러웠다.
먹거리가 不足했던 때이기에 송구(松皮)는 자주 먹었고 어릴때 송구물(松皮와 木質사이에 있는 달콤하고 軟한 樹液)을 많이 먹어 吐하고 설사한 일이 있다고 들었다. 송구는 물이 오르면 벗겨 놓았다가 먹는 가난한 때의 요긴한 먹거리였다. 땔감도 山에서 解決했으니 後에 山林綠化 政策이 나온 것은 當然한 일!.....그 송구는 職場에 나가던 해도 凶年이 들어 먹었는데 쌀이 귀해 챙피스럽지만 어린 조카가 있어 缺食兒童救護米를 얻어 가방에 넣어 오기도 했다. 송구를 안치고 밥을 지으면 그 물이 베어 팥밥처럼 보이는데 점심때 동료들은 남의 속도 모르고 팥밥이라고 한술식 떠갔다. 그 송구는 떡도 만들어 먹었는데 뒷날 排便의 苦痛은 甘受해야 했다, 또 가을이면 꿀밤(도토라)을 주어 겨울에 장만하여 밥에도 넣고 또 잘게 부수어 콩가루를 섞어 먹기도 했는데 이것도 排便이 不便했다. 이른봄부터 쑥도 많이 먹었다. 지금은 健康食으로 脚光을 받지만 그 때는 지겨웠다.
農村에서 祭祀밥의 追憶은 모두 갖고 있으리라.....신짓밥을 야밤에 돌리는 風俗이 있어 그런 밤에는 깊은 잠을 잘수 없었다. 農村이라 農事일이 제일 큰일이다. 그 때 장만하는 음식들을 얻어먹은 밥맛은 말로는 다할 수 없었다. 벼농사를 中心으로 이른봄 가래질(논둑 다듬는일), 모심기, 논메기, 벼베기, 타작하는날.......일꾼들의 밥상에는 생선토막도 오르는데 그것은 안먹고 뒤로 집으로 보내져 뒤에 아버지 밥상에 오른다.....시장이 반찬이란 말은 그 때 우리네 가난에서 비롯된 말이 아닌가 싶다
學校다날때는 점심시간이 苦役, 도시락 두껑을 세워 앞을 가리고 대강 먹고 치운다, 별로 자랑할 밥도 반찬도 아니니까,,,
中學校入學試驗때는 쌀을 가지고 榮州 再從姑母夫댁에 아버지와 같이 가서 며칠 寄宿했다. 醴泉實修學校試驗때도 쌀을 주고 어느 旅館에 같은 受驗生과 同宿했고 그 날 저녁이 죽인데 잔개미가 까맣게 섞인 개미죽도 맛있게 모두 다 먹었다. 中學校때는 配給米를 탔는데 옥수수가 5되, 쌀이 4되 였고 옥수수밥은 다음날 그대로 배설됐다. 짜장면 맛은 就職하고 奉化校옆 어느 중국음식점에서 校長先生님과 食事한 것이 처음이라고 하면 믿어 줄까?....,,가난의 굴레를 못벗어 먹거리의 기근은 늘 우리를 슬프게한 歲月이 길고도 길었다. 어릴때 입은 옷은 모르겠으나 國民學校入學을 爲해 바지저고리를 새로 해입고 入學試驗을 치루었다. 試驗問題는 100까지 세어보라, 이름을 써보아라, 그리고 쉬운 加減算도 시켰다. 새옷 입고 시험을 치루었던 날! 이 날은 참 기뻤던 날이었을 것이다.
農村에서 입는 문제는 목화(木綿)에 依存했고 삼(麻)을 재배하여 여름 옷감을 만들었으니 그 苦生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목화는 綿作指導員의 監視때문에 自由롭지 못했다. 卒業때 까지 洋服 한번 입지 못하고 무명에 染色을 집에서 했으니 검지도 희지도 않는 그런 색갈의 바지저고리를 입고 지냈다. 受驗用 寫眞은 남의 洋服上衣를 빌렀다. 여름옷은 홋바지에 윗옷은 적삼도 아니고 노타이도 아니고 반팔에 가슴에 주머니를 단 옷을 여름 내내 노는날에 빨래하며 입고 지냈다.
여기서 受驗準備때 이야기를 적어 봐야겠다.6學年때 家庭形便上 大田師範學校를 (대구는 지원자가 너무 많아서) 생각했고 擔任도 그렇게 알았으며 거기에 對한 練習問題도 注文해서 공부했다. 특차원서를 내야 하는데 寫眞이 늦어 독촉을 받아 내가 직접 奉化에 갔는데 사진 현상이 늦어 저물었다. 형님두분이 사그막골 까지 와계셔서 같이 와 擔任께 갔더니 누구와 술을 마시며 거기 두고 가란다.....
후에 담임은 願書를 안썼다. 내 實力이 모자라 그런지 아니면 미워서 그런지 64년이 지난 지금도 영영 모르겠다.
中學校入學試驗때는 무명으로 국방색으로 染色한 천으로 국민복을 洋服店에서 만들었고 단추도 戰時라 대나무로 만든것을 달았으며 처음 입은 내 양복이었고 學校에서 校服이 나올때 까지 그 옷에 큼직한 명찰을 달고 다녔다. 제일 절박한 것은 內衣였다. 어머니가 어느 해 道心 친정에 가셨다가 內衣 한불울 얻어 입고 오신것이 있었는데 그것을 내가 떨어지면 다른 천으로 수선해서 알뜰히 입었고, 또 무명으로 내의 비슷하게 만들어 겨울에 어머니의 그 내의와 함께 입고 지냈다. 그러다가 무명실로 內衣를 짜서(編物)입기도 했는데 편물기술을 가진분이 가까운 곳에 있어(蔡仙女,,仁求의母,曾祖母가 그 蔡씨 집에서 오셨다) 手苦해 주었고 그 編物을 染色해서 입었으나 볼모양은 별로 없고 추위는 견딜만 했다.
國民學校때의 신발은 고무신, 여름은 게다라고 하는 나무신, 그것도 아끼려고 바닥에 고무창을 박아 신었다. 와신또 라고 부르던 운동화는 정말 귀해서 갈때는 맨발로 校門에서 신고 들어 갔다. 戰時에는 짚신도 신었다. 中學校에 가서는 '지까다비'라고 하는 천으로 발등까지 덮는 신을 신었고 解放되고는 軍靴에 검은 약을 칠해 신었다. 세째兄님이 日本軍으로 召集되어 日本 "宇都の宮"에 있다가 解放되고 歸還했는데 그 때의 軍服, 內衣類는 내가 찾이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염치 없는 일이다.
우리집엔 내 밑으로 동갑내기 叔姪이 같이 컸는데 이들도 衣, 食이 나와 같았고 安師도 같이 留學했는데 그 形便도 내가 겪은 것과 別로 다를게 없었을 것이고,. 苦生苦生하며 學校를 마쳤으니 그것도 至毒한 苦學이었을 것이다.
나는 就職해서 出勤할 때 上衣가 없어 相當期間 빌러 입고 지냈으며, 叔姪도 내가 입던 上衣를 입고 첫 出勤햇다고 記憶 한다.
農村이 다 그랬듯이 변변한 寢具가 없었다. 고작 큰 이불 한 채면 그 방에 여럿이 덮고 정답게 잤다. 中學校에 가서는 下宿을 하니까 가져갈 寢具가 없었다. 어느해 큰兄嫂가 집에서 기르던 개를 팔아서 아버지 요를 만들어 드렸는데 그 요를 가져가 깔고 同宿한 同級生의 이불을 같이 덮고 지냈다. 解放이 되고는 美軍用 담요가 寢具도 되고 外套옷감으로도 쓰였고 "독구리"라는羊毛上內衣는 고급스러웠지만 一般化되기는 오랜 훗날 이루어졌다.
요사이는 황토집이 健康에 좋다고 황토방이란 곳을 자주 찾아간다. 우리는 일찍부터 황토로 빚은 토담집에서 살았으니 좋은 집에서 살았다는 것은 틀림 없다. 그렇지만 草家토담집이 협소해서 生活의 大部分은 큰집 사랑방에서 지냈다. 衣, 食, 住가 모두 가난의 굴레를 벗지못하고 살아서인지 물건의 아까움과 아껴 쓰는 버릇은 體質化되고 마음씀이나 行動이 넉넉하지 못한 것은 이런 生活歷의 影響인지 모르겠다.
"가난의 代물림" 이것 만은 안하려고 나라에서는 훌륭한 영도자를 모시고 나라 富强의 새싹을 키워 라인江의 奇蹟처럼 漢江에서도 奇蹟을 이루어 祝福받는 市民이 되었다. 家庭에서는 二世敎育에 誰何를 莫論하고 渾身의 努力을 다했지만 지금 父母의 고마움을 알고 孝道하겠다는 아들 딸이 얼마나 될까...........
흔이들 ''가난은 罪가 아니고 不便할 뿐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大凡하게 그렇게 말할 자신이 없다. 만족함을 알면 貧賤도 즐겁고 만족함을 모르면 富貴해도 근심한다. (知足者 貧賤亦樂 不知足者 富貴亦憂)고 하지만 그 現實에 足할줄 모르고 그 時代의 긴 터널을 거쳐 온 薄福한 世代였다. 정말 이젠 "知足可樂"이요 "務貪卽憂"라는 말대로 욕심 버리고 知足의 餘生을 보내야겠다. ..........2008,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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