回顧輯草案

族譜, 庚申譜(1980)編譜때 겪은일

bsk5865 2008. 5. 1. 14:48

族譜, 庚申譜(1980)編譜때 겪은일

        

族譜(족보))란 한 族屬(족속)의 世系(세계)를 적은 책이지만 우리에겐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이에 집착한 世代(세대)로 살아왔다. 방대한 양의 족보

  全帙(전질)을 경제적 부담을 감수하면서 소장하고 있기는하나 그것을 펴보는 일은 극히 드물고 평소엔 잊고 지낸다. 그러면서도 대개  30년을 주기로 새 족보를 또 만든다고 많은 인력과 재력을 소모하고 있음이 현실이다.

        

우리도 7차로 1980년에  庚申譜(경신보)를 새로 발간했고 아직 30년도 안된 지금 또 8차로 족보를 만든다고 하고 있으나 그 이전에 우리는 판관공 파포를 2000년 (庚辰)에 발간한 후이므로 이에 대한 관심이 저조하여 추진에 시간이 많이 걸리지나 않을까 걱정이된다.

 

          우리 小宗中(소종중)은 2차인 癸亥譜(1683)편찬때 入譜(입보)한듯하나 당시 영주서 봉화 세거지로 이거한 후 종택의 화재로 소장했던 종가의 여러 문헌이 모두 소실되어 내방한 수단원에게 文蹟(문적)을 제시 못한데다가 와전된것도 많아 수단작성에 오류가 생긴채로 여러 대를 내려 왔다. 이를 바로 잡으려고 여러번 노력한 흔적은 있으나 한번 잘못 등재되면 정정하기가 무척 힘들었다고 들었다.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  (지금이야 改憲도 하는 世上인데,,,,,,,)

           

庚申譜(1980)를 만들때 中央譜所(중앙보소)에 가서 겪은 일을 잊을 수 없어 여기 적어 본다. 우리 恥部(치부)를 들어내는듯 해서 망서렸지만 이런 일이 더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순수한 뜻으로 ..........

     

 이 때 우리 宗中修單員(종중수단원)으로 큰 兄님 (勝德)이 수고를 하셨고 편보할 때에 고칠 곳을 현지확인서와 호적단자 (당시 현감이 발행한 호적관계문서)를 첨부하여 중앙보소에 보내고난 어느날 중앙보소에서 상경하라는 기별이 왔다고 나에게 가보라고 했었다. 굳이 시골 사람을 불러올릴 용건도 아닌듯 한데.....

         

1980.1.23 서울에 계신 사종형 勝薰(승훈)씨와 함께 마포에 있는 中央譜所(대종중)로 빈손으로 갈 수 없어 담배 2보루와 경우에 따라서는 점심도 대접할 작정으로  찾아갔다.

 

우리를 오라고 한 사람은 같은 판관공파 사람이었다. 책상위에 우리가 올린 문서가 있어 보니 문서접수자가 우리가 낸 보정신청서에  "訂正(정정)이 可(가)하다"는 의견을 달아 올린 문서였다.. 또한 落南(낙남)한 同派(동파)라 반갑고 더 친근감이 갔음이 그 때까지의 솔직한 고백이다.

 

인사를 나눈 후에 그는 우리를 상경케한 용건은 말하지 않고 他姓(타성)들의 편보시 漏譜(누보)나 訂正(정정)등의 처리는 이렇게 저렇게 했다는 사례를 오전중 지겹도록 하더니 점심때가 되자 자기들끼리 나갔다.

후에 생각하니 상황따라 능동적으로 이에 상응하는 대처를 못한  잘못이 우리에게도 많이 있었다.

  

식사후에 들어와서는 큰 문제라도 봐주는투로 "破養件(파양건)은 인정하고 생가로 돌아가도록 하겠다"고 했다. 양자로 간 집에서 生子(생자)했기에 兩家破養確認(양가파양확인서)를 添付(첨부)했으면 還生家(환생가)하는것은 누구 허락받고 고치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며 생색낼 일은 아니다.  그러더니 오전에 하던 이야기를 또 하기에 그 이야기를 가로 막고  우리를 부른 용건이 뭐냐고 했더니 불쾌한  어조로  X 緖에게 우리를 인계했다.

 

그 사람도 역시 같은 심정이 되어 감정적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촌놈따위로 얕잡아봤는지 戊戌譜(무술보 1958)를 가지고 曰可曰否(왈가왈부)로 說往設來(설왕설래)하다가 서로 격해 음성이 높아졌다. "구보의 오기 누락부분의 정정을 요구했는데 왜 구보

를 놓고 사리에 안맞는 말들을 하느냐?" 고 했더니 연장자요 또 中央譜所의 권위때문인지 불쾌한 대좌가 극에 달했고 더 있을 필요가 없기에 일어서 나오니 차마 입에 담아서는 안될 욕설을 뒤에서 우리에게 퍼부었다. 그 사무실엔 이러한 사태를 객관적으로 살피고 말려보려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당사자는 고인이 됐지만 혹자는 中央譜所에 있다. 백대지친이라고 입으로만 외우는 표리부동의 행위가미웠고......그대들은 잊고 있는지 모르지만 당한 우리 두사람은 평생 잊지 못할 수모였다. 世系(세계)를 바로 이으려고 찾아구비한 당시 현감이 발행한 호적단자도 中央譜所의  故意(고의)로 보이는 불신과 오만으로 무위로 끝났다.  

 

같은 해 질녀혼사가 있어  4월13일 상경기회에 큰兄님이 미련이 있어 그 譜所(보소)를 다시 방문했는데 역시 같은 이야기를 듣고 오셨다.  그 후 그 서류는 동파종원의  방해로 반려되었고...그로 부터 나는 족보, 중앙보소.....이런곳엔 기본도 못갖춘 사람도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가 없었다. 지금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얼마나 변했는지 모르지만...........

 

          그 때 고치고자 했던것은 戶籍單子의 記錄대로 17世諱 訥(嘉善) 18世諱 師德(嘉善) 20世諱 宗益(通政)의 品階와  18世諱 師德은 17世諱 訥이 生父이므로 따라서 17世諱 訥의 傍註를 削除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奉化縣監 發行의 戶籍單子를 보면 三尺童子라도 確認할 수 있는것인데 이의 補正을 구실로 다른 생각을 품었던 것으로 推測케한 아주 고약하고 남이 알까 부끄러운 일이었다.,,,,,,,,,,끝

 (그 이후로 대종중이란 곳은  겉으로는 백대지친을 외면서 속은 남보다 못한... 조상을 빙자한 단체라고 멀리하게 됐었다.)  ........2008.5.1.. 들길 벗

 

後記

그런일이 있었던 후로 무심한 세월은 속절없이 많이도 흘렀었다. 1980,1,23, 대종중에서 일했던 종원들도 세월탓으로 대부분 고인이 되었으리라....

 

대종중 사무실까지 동행했던 4종형 勝薰씨의 장남 敬緖는 육군장성으로 예편된후에 대종중에 출입하게 되었고 대종회에서 주관하는 각종종사에도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2017년 시조 호장공 시제에서 아헌관이 되고 평도공을 비롯 여러 선조들의 시제와 교양강좌등 대종회에서의 활동범위가 점차로 넓혀졌다.

이러한 활동을 통하여 지도자적 자질을 갖춘 인물로서의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곧 화제의 인물이 됐었다.

 

2018,3,29, 제63회 정기 대종회를 맞아 저변으로 부터 새로운 바람이 일었다. 대종회의 실무를 통할하고 종중을 대표하는 도유사 선거에 우리 판관공파의 적극적인 후원과 대종회의 지지층의 추천애 힘입어 입후보했었고 이에 수반하는 활동도 했었다.

그러나 선거방법이 선거권자의 투표방식보다도 "도유사를 비롯한 임원선출이 전형위원회(銓衡委員會)선출방식이 불문률(不文律)처럼 관습으로확립"(定期대종회 前 都有司 贊旭 開會인사말 중에서)된 불리한 선출방식 탓으로 좌절되었었다.

 

옛것을 전통으로 미화하고 지켜가는것도 좋지만 그 보다도 변해가는 시류를 외면하면 발전은 없을 수도 있는것이다.

현대화된 조직과 관리, 경영수법으로 대종회의 면모가 일신될 수 있는 호기(好機)를 잃은것이 아닌가 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지난 일을 다시 돌아보면 1980,1,23,  4종형과 대종회를 찾아갔던 그 일을 기억하고 있는 나로서는 통쾌하기 그지없다. 그 때 그 인물들의 면면은 세월 탓으로 흐려졌지만 거기엔 우리와 가장 가까운 동파의 얼굴이 있어 섭섭하고 슬펐었다.

그로 부터 38년이 지난 지금 바로 우리집안에서 대종회를 이끌고도 남을 저력을 지닌 출중한 인재가 배출되어 거기에 우뚝서 있게된 장한 모습으로 바뀌었으니 자랑스럽고 통쾌하고 든든한 일이다.  이래서 세상은 살아 볼만한것이라 하는것일까?

거목의 그늘은 짙고 그 주변엔 많은 사람이 따르는법이다..............2018, 9,  1,   들길벗

'回顧輯草案' 카테고리의 다른 글

13世諱 枝茂以下世系와墓碑改竪  (0) 2008.05.02
判官公派譜編纂에 參與  (0) 2008.05.01
긴歲月 가난과 함께  (0) 2008.04.09
就職하고 터진 6,25  (0) 2008.04.06
팔려간 故鄕 마지막 追憶  (0) 2008.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