就職하고 터진 6,25
就職이 어려웠던 時代에 아버지의 努力으로 當時 鳳城面長인 邊ㅇㅇ氏에게 오랜 請託끝에 얻은 자리가 鳳城面農業統計士였다. 人事書類 내고 出勤키로 했는데 다음날 出勤하니 擔當者가 하는 말 "그 자리는 取消됐다고,,,,,,"황당했으나 그대로 돌아왔다. 後에 所聞에 依하면 면사무소에 勤務하던 某氏가 그 자리로 옮겼다는 것이고 이 촌놈은 한마디 抗議도 못하고 없었던 일이 되었다.
그러다가 敎員任用試驗이 있음을 알고 應試 合格하여 敎生實習을 거쳐 1949,6,20에 鳳城國民學校로 發令이 났다
好事多魔라 했던가 슬픈일도 함께 찾아왔으니 그 해 겨울 58歲를 못채우시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내 就職을 기뻐하시고 장날이면 窓밖에서 내 授業하는 모습을 지켜 보시기도 했는데,,,,,장국밥 막걸리 한잔에 滿足하신 아버지,,, 거기에 담배 '長壽煙' 몇봉 사드리면 그렇게도 흐뭇해하시던 모습,,,,,그것도 몇번 못해드렸는데,,,,,생각하면 가슴 아픈 일이다. 영영 가시는길에 좋은 棺을 쓰기 위해 法田 姑從兄이 準備해 놓은 것을 가져다 썼다. 그 代金 附隨費用을 自擔하면서 마지막 孝道라고 혼자 생각했다. 樹欲靜而風不止,子欲養而親不待란 말에 共感한 슬픈 追憶이다.
却說하고 發令狀에 4,500환을 給함이라고 했으니 그 때 쌀 한가마 값이다. 1년이면 쌀이 12가마 이것은 논 3 마지기의 쌀 生産量과 맞먹는 것이니 그게 어디냐고 自慰했지만 실은 외상 갚으면 그날로 빈손인 적자인생을 살던 시절인데 6,25가 터졌으니 나라도 國民도 나 自身도 雪上加霜의 신세가 됐다.
그 때 USIS (미문화공보원)에서 僻地學校라고 라디오 1대를 寄贈받았는데 그 라디오가 奇襲攻擊을 받고 갈피를 못찾던 當時 狀況을 時時刻刻으로 잘 알려 주었다.우리는 宿直室 벽에 큰 地圖를 걸어 놓고 북한군이 들어온 地点을 첵크하면서 걱정으로 밤낮을 보냈고 學校는 休校했다. 疎開令이 내리면 南쪽으로 피난길을 떠나야 하는데 어느날 여기도 떠나라는 기별을 받고 우선 學校와 떨어져 있는 校監先生(後에 校長.敎育監)집으로 몰려갔다. 거기서 같이 一泊하고 來日 떠나기로 酬議했다. 저녁밥은 양배추 생저리에 콩나물과 고추장을 놓고 비벼먹은 그 밥맛은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다음날 간단한 피난봇짐을 지고 祥雲을 거쳐 예고개를 지나 甕泉을 向하는데 되돌아오는 사람이 많아 그 사연을 물은즉 軍警이 合同으로 길을 막고 안가도 되니 安心하고 되돌아가라고 하기에 오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 一行도 되돌아와 學校에서 合宿하면서 라디오를 通해 戰況을 살폈다. 이렇게 떠나라고 해서 가다가 되돌아 오는 일이 두번쯤 있었고 決定的으로 떠날때는 連絡이 서로 닫지 못해 一部는 가고 나머지는 殘留했는데 이것이 收復後의 處身에 많은 喜悲가 갈렸다.
殘留한 나는 同僚 1사람과 安東쪽엔 人民軍이 들어왔다고 하기에 山中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첫날은 어느 墓앞에서 자고 아침밥은 어느 學父兄댁을 찾아가 해결했다. 다음날 밤에 道路를 건너야 하는데 숨어서 보니 軍用車가 往來하는 것을 보고 魂飛魄散하여 논 가운데 숨어 얼굴에 논흙을 발라 僞裝하고 그 길을 건너 쏜살같이 달려 바위틈에 숨어 콩닥거리는 가슴을 달랬다.
그렇게 해서 들어간 곳이 西碧쪽으로 넘어가는 가붓재 산기슭에 있는 獨家村이다. 염치불고하고 얼마안되는 쌀을 털어주고 그 집 먹는대로 감자.보리, 때로는 죽으로 같이 連命했다. 잠은 풀을 베어 엮어 깔고 덮고 잤으나 때는 여름이지만 큰산골의 밤은 추웠다. 잠이 안오는 밤엔 높은 곳에 올라가 보면 멀리 四方에서 砲소리와 함께 불줄기가 보였다 살아지고 ,,,,,,世上이 넓다고 한들 이 몸하나 依持할곳 없는것 같아 막막했다.
그렇게 무료하게 여러날을 지냈는데 들리는 소문은 8,15까지 집나간사람 안돌아오면 處罰한다고 했다. 그렇게 또며칠이 지난 어느날 어떻게 消息을 들었는지 세째兄님이 간단한 炊事準備를 해가지고 찾아
오셨다. 그 때의 반가움이란 어찌 말로 다하랴! 그 동안의 消息을 들으니 學校에 나오라고 하고 동내도 달라진것이 없다고 했다.
기왕 오셨으니 산나물 뜯어 삶고 더덕, 도라지케서 고추장 발라 굽고 된장 지지고 비록 소찬이지만 山中에서 허기진 터에 맛본 그 때의 밥맛은 어디다 비하랴!
兄과 만나 3日을 지나고 더 지탱할 수 없을것 같아 下山하기로 했고 同僚와도 헤어졌다.집에서 며칠을 보내다가 學校에서 後退못한 同僚들이 出勤하고 있다기에 며칠을 더 망서리다가 나도 나가 보기로 했다. 이튿날 出勤길에 작고개길에서 마주 오는 長銃을 멘 人民軍을 처음 봤고 겁이 나서 숨을까도 생각하다가 제 갈길을 갔다.
學校에 와보니 수업은 없고 여러 行事를 돕기도 하고 後方 공작대가 주관하는 敎育에도 참가하는등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 날 부터 나는 주로 붓글씨로 各種 宣傳文句를 써주는 일을 했다.
郡단위로 인민위원회가 구성되고 敎育機關의 장학사가 생겨 職員整備의 一環인지 奉化酉谷 어느 큰 建物로 모이라는 通知를 받고 도시락 싸고 걸어서 정한 시간까지 갔다. 가보니 별것없고 처음 들어보는 자서전(出生부터 이제까지의 이력소개)이란 것을 써내고 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平凡하게 農村에서 가난하게 살았고 첫職場에 나간지 1년쯤 됐다고 써냈다. 되돌아 가려고 酉谷變電所앞 큰길까지 나왔는데 갑짜기 飛行機소리가 나더니 연이어 총알이 큰길 路面을 一直線으로 나가면서 튀었고 本能的으로 엎드려서인지 不幸한 일은 없었지만 많이 놀랐다.
人民軍治下의 歲月도 흘러 코스모스가 한창이던 어느날 人民軍 負傷者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校內로 들어오니 모두 모여 수근거리는 소리는 國軍이 올라오고 있다는 消息! 道路쪽을 보니 後退하는 人民軍行列이 이어지고 서슬 퍼렇든 당간부들도 떠날 準備를 서두르고 있다고 했다. 그 때 나는 내가 할 일을 생각했다. 우선 내가 써준 宣傳用글들을 撤去하고 가져간 備品을 回收해야겠다고,,,,,,지금 생각하면 그 亂世에 내가 무슨 忠臣이라고 寒心하기 짝이 없는 일들이다. 어찌됐던간에 청부와 같이 어지러운 宣傳物들을 撤去하여 敎室마루바닥 밑에 숨기고 이튿날 아침에 外部에 나가있던 校長책상과 의자를 回收하여 제자리에 놓았다.
그리고 집에 가서 쥐죽은듯이 며칠을 보내다가 後退했던 警察官, 靑年團員, 우리 同僚들이 돌아았다는 消息듣고 나가 보았다.
모두 苦生했지만 後退못한 우리와는 다른 領域의 사람이었고 後退, 非後退의 差別이 甚했다. 後退한 사람은 밀린給料와 手當까지 받았지만 우리는 못받았다. 그리고 非後退者는 休職狀態로 있었지만 얼마 안가서 大部分 풀리고 復職했다.그 동안 附逆한 罪는不問에 붙히고는 "사 부역죄"란 고무인이 身分證에 찍혔고 ,,,,, 以後 正常出勤했는데 또 일이 터졌다.
敎室마루바닥 밑에 숨겼던 人民軍宣傳物들이 누구의 密告로 警察支署에서 押收해 갔고 나는 呼出당했다. 警察官이 하는 말은 '이런 불순물이 있으면 申告해야 하고 또 왜 써주었느냐"고 追窮당했다. 그에 앞서 警察支署에도 불려가 거리에 揭示할 宣傳文句를 많이 써주었었다. 나는 남모르게 없애버릴 생각이었고 申告안한것은 잘못했다고 謝過했다.그 후 이일로 더 追窮은 안당했지만 그 놈의 붓글씨의 才能 ?이 禍根이었다.
收復後 混亂한 民心을 收拾하기 爲하여 時局收拾對策委員會가 限時的으로 構成되고 우리는 民心收拾에 同參하기 爲해 學藝發表를 兼해 素人劇과 大衆歌謠를 곁들인 住民慰安行事를 準備했다. 收復後 警察官의 威勢가 대단했던 시절 支署의 主任이 敎育界出身이라 陰陽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 慰安行事는 學校에서 2번 桐陽에서 1번 公演했고 또 隣近 法田面의 要請으로 多德國民學校에서도 公演했고 가는 곳마다 好評을 받아 苦生한 보람이 있었다.,,볼거리가 없었던 시절이었기에 可能했던 일이다.
어수선하던 民心도 잡히고 우리軍은 北進을 繼續하여 鴨綠江까지 갔으나 中共軍의 介入으로 다시 後退했다. 1,4後退라고 부르는 戰勢로 많은 避難民들이 南下하기 시작했고 이번에는 以北에서 넘어오는 避難民도 많아 더욱 民生苦가 甚했다.
鳳城學校에도 避難民이 밀려와 敎室을 提供했고 特히 江原道에서 온 사람이 많았다. 같이 後退한 江原道警察官은 各洞里에 分散配置시켜 마을 警備의 任務를 주었고 이는 宿食提供의 어려움울 解決하는 苦肉之策이기도 했다.
嚴冬雪寒에 어린것들을 업고 먼길 걸어서 여기까지 굶주리고 추위에 떨면서 왔으니 그 慘狀은 目不忍見이었다. 더구나 어린이 감기가 肺炎으로 惡化되어 죽는 生命이 많았고 敎室바닥에 여러사람이 起居하기에 쾌쾌한 냄세와 아이들 울음소리, 같이 손잡고 울고 있는 할머니, 먹을 것을 구하려고 돈 될만한 것을 들고 나가고 있으나 그것도 不如意하고 冬節期 農村에서 所藏한 限定된 먹거리에 地方人心도 덩달아 메말라 갔다.
58年前의 일이라 或者는 6,25를 이렇구 저렇구 말하고 있으나 아무런 準備가 없던次에 當한 奇襲이고 이를 國際社會에 呼訴해 收拾한 指導者는 누구인가? 戰爭을 일으킨 사람은 누구인가? 日本에 對해서는 大統領이 바뀔때마다 사죄를 받으면서 6, 25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 말이 없다.
우리 世代의 戰爭의 아픈 經驗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이 땅에 戰爭은 없어야 한다.,,,2008, 4, 6 -끝- 들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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