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긋난 人生길
勿失好機!(물실호기) 좋은 기회는 잃지 말라고 했는데 뒤돌아 본 내인생은 失機(실기)로 점철된 바보스럽고참으로 한심한 "삶"인가 보다.
인생이란 선택과 결행의 연속이며 후회란 먼저 생기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종착역이 가까와지니 가진者(자) 덜 가진者, 배운者. 덜 배운者.....이런것들은 늙어갈수록 별 의미가 없어지는듯 하여 自慰(자위)해 본다.
20대에 첫직장 얻어 사회인으로 世波(세파)에 뛰어든지 1년뒤에 막막하고 처참했던 6,25가 일어나 그 혼란했던 때를 겪었다. 수복후에도 복구를 위한 국민의 고통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1960년에 들어와서 3,15부정선거가 불씨가 되어 4,19 혁명으로 이어지고 이대통령하야 사태까지 몰고 왔다. 그 후 새정부는 內閣責任制(내각책임제)로 헌법을 고치고 張勉政權(장면정권)이 들어셨다. 그러나 사회혼란은 가시지않고 데모로 날이 세고 데모로 해가 지는 나라가 되어 혼란만 거듭하더니 1961년 5월16일 새벽 군사혁명이 일어나 혁명정부가 탄생했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나라를 새로 새우자는 재건구호와 함께 국민의 마음을 한곳으로 모아 "잘 살아보자"는 꿈을 가슴에 심어주었다.
이렇게 세태의 급변과 함께 일신상의 변화도 왔다. 병역미필자 일제입영령에 따라 1년 단기복무의 혜택을 주기에 論山(논산)까지 가서 入營身檢(입영신검)을 받았다. 의외로 결과는 폐결핵 판정이 나와 집으로 돌아와 장기간 요양생활을 했다.
그 때 동생은 단기병역을 마치고 복직했고 미혼때이므로 같이 지내고 있었다. 내가 폐결핵으로 돌아 왔기에 몸 보신 부터 해야 된다고 큰집에 가더니 개를 한마리 구해 장만해 왔기에 그걸로 보신도 하면서 치료했다. 고맙고 큰 힘이 됐던 가상한 지난 일이다.
또 기억해야할 일은 중학교 친구이며 같이 봉화교에 근무했던 金先生이 충주에서 약방을 하고 있었기에 오랫동안 결핵약을 조제하여 우송해 주었다. 아직 그 은공도 못했는데 일찍 타계했기에 지금도 그 친구 그리운 생각을 가끔한다.
몇달 몸을 추스리고 일을 시작한 것이 油印物(프린트)을 만드는 일이었고 그런대로 생계유지가 됐다. 젊을때였으므로 공무원과의 교분을 넓히기 좋았고 또 신문도 취급하여 광고도 받고 사회활동도 하면서 지역사회의 신임도를 높혀갔다. 그 때 신문들의 위세? 때문에 특히 인근지역에서 봉화 출입이 많아 그 방패역을 맡아 우리 고장을 지켜가는데 힘썼다.
인생역전의 기회는 이 때 한번 왔다. 교육계에 도서, 교구등을 납품하던 C씨로 부터 서민금고(지금의 새마을금고, 신협같은 초창기)를 시작하자고 제의해 왔다. 만약 그 일이 성사되어 대구생활을 시작했다면 46년쯤 전의 일이므로 지금쯤 어떤 모습으로 대구사람이 되어 있을까? 하고 허공을 향해 물어봤다.
그리고 또 하나 교육청에서 복직하라고 권해 왔으나 그 때의 생활이 절박한 것이 없고 또 자유롭게 살고싶어서 안했다. 지금 주위에 퇴임교장들을 자주 만나 어울리는데 그 때 복직했드라면 같은 퇴임교장으로 더 친숙할것이라고 생각해 봤다. 지나고 보니 이렇다할 관직을 갖지못한것은 대인관계에 있어 득(得) 보다 실(失}이된다는 것을 느꼈다.
지방에서 군수. 서장, 교육장, 농협장........이런분들의 역할이 지방의 안녕에 직결되던 시절, 관무사,민태평(官無事,民泰平)이란 말도 있듯이.....그래서 지방의 각 기관장과 유지들을 아우르는 모임인 木曜會(목요회)란 친목 조직을 만들고 월 1회 모임을 주선했었다. 여기서 지방헌안도 다루고 건의도 하고 협조도 구하는 기관과 주민과의 소통의 場(장)으로 활용됐었다.
때로는 야외에서 모임을 열어 교분도 쌓고, 전근으로 봉화를 떠날때엔 기념품과 송별모임도 가졌으며, 상호이해증진의 유익한 값진 봉사를 장기간 했다. 봉화를 떠난 회원으로 부터 재임중 신뢰와 정을 나눈 목요회를 오래도록 기억한다는 찬사도 받았었다. 그 시기에 동생 결혼식도 군수주례로 치루었고 목요회원들의 축하도 받았였다.
그러는 사이에 또 인생역전의 기회가 있었다. 농협장으로 부터 농협에서 같이 일할 수 없느냐고 권유를 받았지만 나의 단견으로 호의가 무산됐다, 농협에 갔드라면 대구쯤에 와서 정년을 마쳤고 그 고생은 없었을것임에 그 호기를 못잡은 후회와 함께 부질없는 생각을 또 해봤다.
이렇게 세월이 흘러 1969年에 국회의원 선거구가 영주,봉화 합구였지만 분리되어 단독선거구가 됐다.
앞으로 생길 地區黨(지구당)의 국장은 내정됐고 조직부장자리를 놓고 설왕설래(說往說來)가 있더니 내가 내정되어 기별이 왔다. 그 때 지구당위원장 내정자와 만났고 이것도 호기인듯하여 실기하지 않으려고 승락했다.
후에 생각해 보니 나를 추천한것은 기관장과 지방유지일 것이고 결국 목요회원이란 것을 헤아려봤다.
이로 부터 地區黨創黨(지구당창당)과 基幹組織(기간조직)등 분주한 시간을 보내다가 중앙당 연수원에 2주간의 사무국요원교육과 일반청년당원교육까지 마치고 政黨(정당)이 무엇이고 政治(정치)가 무엇인지 그 때 겨우 눈을 떴다.
71년에 제8대 대통령과 국회의원선거가 있기 때문에 지구당관리에 전념했다. 지구당 단위로, 면 단위로, 투표구단위로, 까지 조직점검과 교육을 실시했고, 조직계통을 따라 접수된 민원은 관계기관과 협의하여 최대한 그 해결에 노력했다. 목요회를 만들어 활동했던 인연이 많은 도움이 됐다.
71년 4월 제 8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봉화까지 朴正熙대통령후보가 왔다. 봉화중고교정에서 열린 선거遊說(유세)에 많은 주민이 운집했고 그 때 군중들의 함성은 잊을수 없는 감격적인 장면이었다. 당시 육성을 녹음한 테프가 있었는데 대구로 올때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그 해 5월25일 제8대 국회의원선거가 있기에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바로 다음 선거준비에 눈코 뜰새 없는 바쁜 시간을 보냈다. 선거결과는 압승으로 끝났지만 이는 與支持(여지지)의 산촌투표성향도 있지만 신설 지구당이고 또 봉화 단독으로 국회의원을 뽑는다는 기대감이 압도적 다수표로 이어졌다.
당선 인사차 각 관리구단위로 다녔는데 환대해 주는 선거구민과 오랫동안 그 감격을 나눈 행복했던 때였다.
취직이 어려웠던 시절 많은 민원이 있었지만 그 때 영주연초제조창, 도로공사등에 약간명, 군청,면사무소에 약간명. 생사공장에는 많은 인력을 받아 주어 고마왔다.
회고하면 지구당 조직부장 시절이 일한 보람도 있었고 사람대접도 받았으니 내 생애 최고의 좋은 때였다. 남의 어려움을 도와주고 베풀고 살았던 때었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좀 더 베풀고 지낼것을...하고 늬우쳤다.
그 동안 북한과의 관계는 무장게릴라를 남파. 간첩의 침투등 여러 사건들이 있었지만 1972년에 7,4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성명이 있었고, 이로 부터 북한과는 선의의 경쟁시대가 열렸다. 그 때는 순진하게 그것을 믿었고 앞으로 도발행위는 안할 것으로 생각했었다 .
이 경쟁에서 이기려면 국력의 효률적 운영이 절실하기에 그 해 10월에 維新(유신)이 선포되었다.이에 따라 정치적 낭비를 줄이기 위해 국회의원수도 지구당수도 줄였다. 그 여파로 선거구가 봉화는 다시 영주와 합구가 되었으니 사무국요원도 줄어야했다.
정리지침에는 영주에는 국장이 봉화에는 조직부장이 남게 되어 있어 나는 신분상 변동은 없게 된다. 그렇지만 인간사란 언제나 변수는 있는것, 지침과는 정반대로 봉화는 내가 영주는 국장이 물러가게 만들었는데 거기엔 지침을 어기고 까지 이렇게 해야할 말못할 위원장의 고민이 컸을 것이라고 믿고 체념해 버렸다.
危機(위기)가 好機(호기)란 말과 같이 나를 일선 면장으로 전출시키기로 되어 일부 당직자사이에는 임지까지 나돌고 있었고 위원장도 관계 임명권자와 협의를 끝내고 내게 알려주었다.
이것 역시 지구당 인사의 불만과 그 간의 조직생활의 미련때문에 또 내가 가면 누군가가 그 자리를 비워야 하고 이와 관련된 좋지못한 소문이 돌고 있는것도 부담스러워 결국 그것도 그만 두었다.
만약 그 때 눈 딱 감고 면장으로 나갔다면 약속대로 봉화읍으로 나오고 정년까지 있었을 것이고 생활고도 덜었을 것이지만 아직까지 봉화사람으로 살고 있었을는지 모른다.
시간이 흘러 마음을 정리하고 놀고 있을 수 없어 뛰어든 것이 갱목 생산업계였고 이 때 부터 장장 10년세월을 고생으로 허송했고 견디다 못해 대구로 이향했었다. 그 10년간에도 대구로 오기전 군단위 기관장자리에 추천될 기회는 있었으나 그 자리를 노리고 있는 경쟁자의 훼방으로 또 추천자에게 누가 될듯하여 내 스스로 마음을 접었다.
내가 어려움에 지쳐있을 때와 현재를 비교하면 지금은 넉넉하지는 못하나 살아가기에 큰 불편이 없고 그리고 노후의 취미생활도 즐기고 있으니 낙원에 머물고 있는듯 하다. 다만 내 주변의 문제들이 나를 괴롭히는 일만 없다면......
내 고생하고 있을때 남의 논을 빌러 농사 지어 식량을 대주던 큰집 조카, 아이들 공납금을 대신 내주던 안사람의 친구, 내 생활의 어려움을 알고 찾아와 위로와 금품을 놓고 간 제자들, 쌀 한가마를 보내준 제자의 어머니, 일찍부터 물심양면으로 힘이 되어 준 맞사위 손서방.......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고마움을 주고간이들에게 그 고마움을 갑지 못한 죄스러운 생각에 지금도 얼굴이 붉어진다.
인생80에 이르고 보니 부질없는 생각이지만 역전의 기회가 될수도 있었던 그 기회들을 잡지 못한것은 결국 용기와 과단성의 결여로 현실안주의 나약한 기질에 기인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사족을 하나 더 달자면 그 때는 그 길이 옳게만 여겨져 벗어나지 못했다.
또 아쉬운 것은 진지하게 이런 일들을 자기일처럼 생각하고 조언을 해주는 좋은 친구를
갖지 못했음이 내 생애의 큰 손실이고 불행이라고 크게 후회도 해봤다. 그랬으면 이렇게 내 인생길이 어긋나지는 안했을것을........... .2009, 6, 10,.......들길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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