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風物函

규슈 구마모또현(九州 熊本縣)

bsk5865 2011. 2. 21. 08:46

 

(九州 熊本縣) 스이젠지(水前寺)/모로코 탐방 ***| ♧ ★ 旅行 (동남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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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규슈 구마모또현(九州 熊本縣) 스이젠지(水前寺)모로코-문화탐방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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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욱-旅窓筆滴-2010년 규슈 편.

 
 
7. 규슈 구마모또껭(九州 熊本縣) 스이젠지(水前寺)
2010.1. 空慧

본 이름은 스이젠지 죠쥬엔(水前寺成趣園: 수전사 성취원: Suizenji Gardens)이며 구마모또 뿐 아니라 일본의 대표적인 정원이다. 성취원(成趣園)이라는 이름은 당나라 시성(詩聖)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전원(田園)을 찬미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1636년 이곳 한슈(藩主: 번주)였던 호소가와(細川)가문에서 3대 80년 간에 걸쳐 차를 마시며 즐기는 별장으로 지었다. 시작은 에도 도꾸가와바꾸후(江戶 德川幕府: 1603~1868) 초기에 다이묘(大名)로서 훈젱고꾸라항(豊前小倉蕃) 재2대 번주와 히고노 구마모또한(肥後熊本蕃) 초대 번주로서 54만석(萬石)의 호소가와이에 (細川家) 제3대의 다다도시(忠利:1585~1641)가 처음 모모야마 (桃山)양식으로 꾸미기 시작하였다. 그가 이곳을 차(茶)를 즐기는 별장으로 택한 이유는 물맛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장수(長壽)의 물 또는 백액(百藥)의 물이라고 찬양한다.

 
↑ 입구 상가
 
↑ 호소가와 동상

입구를 지나면 자연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깨끗하고 잘 조경된 연못과 부석(浮石), 그리고 잔디와 인공으로 쌓은 쓰끼야마(築山)와 소나무 등 73,000평방미터가 한 눈에 들어온다. 정원 북쪽에 잔디로 뒤덮여 있는 작은 언덕인 시바야마(芝山)는 도쿄(東京)에서 교토(京都)를 연결하던 간선도로인 도까이도(東海道: 495.5km)의 풍경을 본뜬 것이고, 교또(京都)의 비화호(琵琶湖)를 본떠 만든 연못에 있는 작은 섬인 쓰끼야마(築山)는 일본의 상징 후지산(富士山: 3.776m)을 만든 것이다.


 
↑ 비화호를 본 딴 연못
 
↑ 연못의 오리

 
↑ 연못의 잉어
 
↑ 쓰끼야마(築山)로 만든 후지산
 
↑ 일본혼이 깃든 전형적인 정원
 
 
 
↑ 프랑스 정원수?이 인공미만을 가한 일본 정원수

차를 즐기던 정자 취월정(?月亭)은 명치 10년(1877) 구주에서 사이고다까모리(西鄕隆盛: 1827~1877)가 막부(幕府)를 종결시켜 왕정복고(王政復古)를 꾀하려고 일으킨 무사반란인 세이낭센소 (西南戰爭)때 소실되었다. 구마모또연이 역대 영주(領主)들을 모시는 영장(靈場)인 이즈미진자 (出神水社)는 메이지시대에 영주의 가신(家臣)들에 의해서 지어진 것이고, 경내(境內)에는 찻집도 있다.

 
↑ 도리이(鳥居)
 
↑ 이즈미 신사(出水神社)
 
↑ 이즈미 신사(出水神社) 본전 신전
 
↑ 수전사 이나리(稻荷)신사 앞에서 내자
 
↑ 오미구지 무스비도꼬로
 
↑ 도리이(島居)

스이젠지(水前寺) 10경(景)이라지만 볼만 한 곳은 위에 소개한 것외에 한두가지가 더 있을뿐이다. 고낀덴슈노마(古今傳受の間: 고금전수의 집): 호소가와 다다도시(忠利: 1585~1641)의 조부 호소가와 후지다까[細川藤孝: 전국시대의 무장 (武將)이며 가인(歌人)]이 천황 고요제이덴노(後陽成天皇:1571~1617)의 동생 하찌죠노미아도시히도신노(八條宮智仁親王: 1579~1628)로부터 고낀와까슈(古今和歌集: 고급화가집)의 오의(奧儀)라는 일본 전통 노래를 전수받던 곳이다. 노라꾸뗑(能樂殿: 능악전)은 이즈미 진자(出水神社)와 함께 건립된 것으로 봄 축제 때 신사(神社)에 봉납(奉納)하는 진자노(神社能)이라는 가면극인 노(能のう)를 공연하는 곳이다.(※노(能のう)에 관한 것은 다음 유후인(湯布院)편에 소개한다.

 
↑ 고낀덴슈노마(古今傳受の間 고금전수의 집) 입구
 
 
 
 
↑ 거낀덴슈노마(古今傳受の間 고금전수의 집)
 
↑ 노라꾸덴(能樂殿: 능악전)

일본의 다이묘(大名)와 서양 귀족영주(貴族領主) 호소가와 다다도시(細川忠利)같이 54만석(萬石)꾼인 번주(藩主)가 시사하듯 일본에는 막부시대(幕府時代)에 1만석 이상의 다이묘( 大名)들이 270명이나 있었고 서양식 봉건제도(封建制度: feudalism)가 있었고 서양의 기사(騎士: knight)와 마찬가지로 사무라이(武士)가 있어 노블레스-오블리주(nobless oblige)를 지닌 무사정신이 있었다. 그러나 중국에는 주(周)나라 때부터 제후(諸侯)제도를 만들어 봉토와 벼슬을 주었지만 백성들이 탁신(託身)을 하지 않았으니 진정한 봉건이 아니고 토호(土豪)에 지나지 않았으며, 춘추전국 시대이후부터는 없다고 본다. 우리나라 역시 사농공상의 신분제도와 지주와 농노는 있었지만 봉건은 없었다. 전쟁이 나면 영부(領主)들이 먼저 나가 농노들을 보호하는 노블레스-오블리주가 서양과 일본은 있었지만 중국과 우리나라 선비들은 먼저 도망가고 그들을 전쟁의 앞잡이로 내몰았다. 또한 우리나라는 사농공상의 신분제도가 조선조에 있어서 중국을 모방한 사대부(士大夫)가 있었으며 다른 나라들같이 민의가 절차를 거쳐 군주에게 전해진 것이 아니고 상소(上訴)로서 직소(直訴) 하였고 요즘도 민의는 시위(示威)로 하고 있고 의정(議政)은 유명 무실 국고만 축내는 불한당(不汗黨)으로 국민들이 바라보고 있으니 서양의 민주(民主)제도가 얼마나 더 있어야 정착될까?.......

 
↑ 사무라이(武士)
 
 
 
↑ 사무라이(武士)와 옥상(奧樣)

Ps: -다이묘(大名): 사무라이(武士) 출신인 무로마찌(實町)시대 이후 도꾸가와 바꾸후(德川幕府)시대까지 령국(領國) 즉 봉지(封地)의 수호직이며 영주(領主)로서 중국의 제후(諸侯)와 유사하다.
♪:배경음악은 스이젠지(水前寺)라는 성을 가진 교꼬(水前寺淸子)의 노래 나미다오 이다이다 와다리도리(눈물먹은 철새)이다

 
 
 
 
 
 
 
모로코-문화탐방기-1. 개요
 


임종욱-旅窓筆滴-모로코 편.
모로코 문화탐방기 1.모로코-개요(槪要: Morocco outline)
2009.8. 空慧
↑ 모로코 국기
 
↑ 카사브랑카 핫산2 사원

모로코는 그들의 언어로 라는 의미란다. 정식 국명은 영어로 Kingdom of Morocco이지만 영어보다는 프랑스어를 잘 쓰며 불어로 Royaume de Maroc이다. 아프리카 북서부에 있는 모로코왕국(al-Mamlaka al-Maghrib?ya)은 면적 44만 6550㎢. 인구 3168만 9265명(2003). 지브롤터해협(海峽: Gibraltar strait)을 끼고 에스파냐의 대안(對岸: opposite bank)에 위치한다. 동부와 남동부는 알제리(Algeria.), 남서부는 서사하라(Western Sahara)와 접해 있다. 수도는 라바트(Rabat). 지리(地理) 북아프리카를 동서로 달리는 아틀라스산맥(Atlas Mts.)은 서고동저 (西高東低)로 모로코에서 가장 높고, 중부에 있는 최고봉인 투브칼산 (Mount Toubkal)은 높이 4165m이다. 북쪽에 리프산맥(Rif Mts)은 서남부로 이어지고 아몬드 나무(扁桃: almond)와 삼나무(杉木)가 많이 자란다. 남쪽에 안티아트라스산맥(Anti Atlas Mts)은 점차 낮아져 사하라 사막(Sahara Des)의 모래로 변한다. 사하라 사막은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며 오아시스가 있는 곳엔 베르베르인(Berber)들이 살고 있는 경우가 많다. 내륙에는 강이 흘러 관개가 잘된 농경지역이 있고, 높은 산에 눈, 깨끗한 모래사장을 갖춘 바다와 해변. 일 년 내내 온화한 기후 등 천혜(天惠)의 조건을 가춘 나라이다. 기후(氣候) 일반적으로 북쪽은 지중해성기후라서 여름은 건조하지만 겨울에 비가 내린다. 반대로 남쪽은 연강수량 200㎜이하의 건조기후로 스텝기후(steppe climate)에서 갑자기 사막기후가 된다. 해안쪽의 기온은 겨울에 온화하고 여름은 비교적 지내기 쉬우며 특히 남부해안은 한류(寒流)로 변하는 카나리아해류(Canary Current])때문에 여름에도 시원하다. 내륙은 기온차가 심하여 겨울에 눈이 오는가하면 여름은 고온 건조하고 덥다. 최고기온은 8월에 18~28℃. 역사(歷史) 예로부터 주민의 대부분이 베르베르인(Berber)이었는데 BC 11세기 부터 AD 7세기까지 페니키아(Phoenicia)의 지배, BC.8~2까지 도시국가인 카르타고(Carthage)의 지배를 받았으며 BC.1~5까지 그리스(Greece)로마(Rome)의 지배와. AD.5~6까지 반달족(族: Vandals)의 지배. 그 후 비잔틴(Byzantine)등 지중해 북쪽의 이민족의 지배를 받았다.

 
↑ 선사시대 북아프리카 베르베르인 호가종족의 암벽화

7세기에 침입한 아랍인(Arab)은 아랍어와 이슬람교를 가지고 들어와 베르베르인 속에 침투하여 토착화시켰다. 이러한 시기에 베르베르인 국가가 탄생하고 8세기에는 페스(Fes)를 수도로 모로코와 서-알제리 (western Algeria)를 판도로 한 물레이 이드리스의 이슬람 왕조 (Mausoleum of Moulay Idriss: 789~926)가 시작되었다. 그 후 베르베르인(人)이 세운 최초의 이슬람왕조인 무라비드왕조 (al- Mur?bit dynasty: 1056∼1147)가 있었고, 이슬람인의 알모리비드1062~1147(Almoravid: 1062~1147)왕조가 있었다. 11~13세기에 걸쳐 흥성한 무라비트조와 무와히드조(Merinid:1130 ~1269)는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Tunisia.)에서 이베리아반도까지를 지배하에 둔 마그레브(Maghreb)통일국가를 세웠다. 13세기부터 15세기 초 모로코의 이슬람왕조 마린조(Mar?nid dynasty: 1196~1465)/ 1195∼1470)는 세력범위가 현재 모로코의 영토로 거의 차지하더니, 와타스조가 통치한 15세기 말,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북아프리카로 침공 하여 모로코에서는 아가디르(Agadir), 사피(Safi)를 점령당하였다. 1510년 페스에서 세워진 사드조(Saadiens: 1549~1659/ 1525~ 1659)는 에스파냐-포르투갈을 격퇴하였으며, 구 불령 북아프리카 제국인 마그레브제국(Maghreb Empire)의 다른 나라들과 달리 오스만제국(Ottoman Empire)의 지배 하에도 들어가지 않고 모로코의 독립을 유지하였다. 그리고 16세기에는 현재의 모리타니(Mauritania)를 포함한 서- 수단의 송가이왕국(Kingdom of Songhai: 15세기 중반~16세기)을 공략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대(大)모로코주의(主義)의 근거가 되었다. 1660년 이후에는 알라위왕조(알라위트: Alaouite: 1631~현재)가 정권을 잡고 이 왕조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모로코왕조를 요약히면 ; 1. 이드리스(Idris) 왕조: 788~1055, 수도: 페스(Fes), 2. 알모라비드(Almoravide) 왕조 :1055~1147, tm도: 마라케쉬 (1062 창건) 3. 알모하드(Almohade) 왕조: 1147~1269, 4. 메리니드(Merinide) 왕조: 1269~1465, 수도 페스 엘 제디드 (신 페스) 5. 와타시드(Ouatasside) 왕조: 1465~1549, 6. 사드(Saadien) 왕조: 1525~1659, 수도: 마라케쉬 7. 알라위트(Alaouite) 왕조: 1659~현재, 메크네스, 현 수도 라바트. (※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Haile Selassie)황제도 전제군주 측에 속한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19세기가 되어 유럽국가들의 제국주의적 압력이 강해지자 모로코는 1845년 탕헤르시(市: Tanger)만을 개항하는 쇄국체제(鎖國體制)로 대응하였으나 곧 무너지고 영국, 에스파냐, 프랑스와 연이어 불평등한 통상조약을 맺게 되었다. 국내에서는 근대화, 산업개발 등이 진행되었는데 이것은 재정위기와 내란을 초래하여 최종적으로 모로코는 프랑스와 에스파냐에게 지배 되었다. 1912년의 페스조약(條約: Treaty of Fes)으로 국토의 대부분이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으며, 프랑스-에스파냐조약(France-Spain Treaty)으로 북부의 리프(Rif)지방은 에스파냐령이 되었다. 그리고 많은 외교상의 분쟁으로 탕헤르는 1923년 국제관리(管理)의 자유항(自由港)이 되었다. 식민지화에 대한 저항은 극렬한 양이(攘夷: exclusion; anti-alien)의 형태가 되었으며 모로코 독립운동인 리프전쟁(Rif War: 1921~1926) 이 보호령이 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부터는 술탄(Sultan)을 위시한 독립운동이 활발해졌으나 프랑스의 제재(制裁)에도 불구하고 운동은 더욱 격렬 해져서 1956년 3월 독립협정이 맺어지고 보호령조약은 폐기 되었으며 같은 해 4월에는 에스파냐지구, 10월에는 탕헤르지구도 주권을 회복하였다. 독립한 이듬해 술탄은 칭호를 국왕(말리크:말리쿤: malik: ???)으로 바꾸고 이름을 S. 무하마드 5세(Muhammad V)라고 정하였으며, 나라 이름도 모로코왕국(al-Mamlaka al-Maghrib?ya)으로 바꾸었다. 1961년 왕이 사망하자 황태자 M. 하산 2세(Hassan II)가 뒤를 이었으며 1962년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 constitutional monarchy) 헌법을 제정하였다. 무하마드 5세는 민족독립의 아버지로서 카리스마적인 존재였으나 하산 2세 때는 학생과 노동자의 시위가 자주 발생하였으며, 1971~ 1972년 연이어 왕을 암살하려는 사건이 일어났으나 미수에 그쳤다. 이런 가운데 하산 2세는 1975년 35만 명을 동원하여 에스파냐령 서사하라로 사하라대행진(green march)을 감행하였다. 서사하라는 세계적인 인광석 산지라는 점과 대(大)모로코주의를 취해왔다는 점 때문에 오랫동안 모로코 영토임을 주장했던 곳이다. 대행진 결과 마드리드협정(Madrid Agreement)이 체결되어 에스파냐군(軍)의 철수와 모리타니와의 분할·합병이 결정되었다. 또한 1979년 모리타니가 영유권을 포기하자 모로코가 전역을 지배 하게 되었다. 1988년 유엔사무총장의 평화안(독립 혹은 모로코와 합병을 주민- 투표로 결정)에 서부 사하라의 폴리사리오(Polisario)와 모로코는 원칙적으로 합의하였으나 주민투표는 오랫동안 지연되었다. 모로코는 1989년 2월 알제리, 튀니지, 모리타니야, 리비아와 함께 결성한 아랍마그레브연합(AMU; Arab Maghreb Union)에 가입 하는 등 대(大)마그레브 구상에 적극적이었다. 1996년 9월 국민투표를 통해 국회를 종래 일원제에서 이원제로 고쳤다. 1999년 하산2세 국왕이 사망하자, 장남 시디 모하메드가 모하메드 6세로 왕위를 물려받았다. 2002년 9월 실시된 하원 선거에서 유수피(Ysuf)총리가 이끄는 사회주의인민연합(USFP)이 325개 의석 중 50석을 얻어 1위를 기록하는 등 좌파 주도 연합 세력이 과반수를 차지하여 재집권에 성공하였다. 상원은 정원 270명·임기 9년, 하원은 정원 325명·임기 5년이다. 정치(政治) 정치에는 본래 관심이 없어 생략한다. 남-북한 동시수교국이다. 다만 외교는 친미, 친서유럽으로 프랑스의 영향이 강하고, 미국과 기지협정을 맺고 있으며 러시아와도 문화협정 등으로 관계를 유지 하고 있다. 이스라엘을 둘러싼 중동문제에서는 온건파로서 사우디아라비아 등과 친밀하다. 알제리와는 서사하라 문제와 국경분쟁으로 대립관계에 있으며, 리비아와는 1984년 연방화 협정을 맺었으나 1986년 이스라엘 총리의 내방으로 파기되었다. 또한 서사하라 영유로 아프리카 통일기구를 탈퇴하여 제3세계에서는 고립되어 있다. 군대는 아프리카 최강을 자랑하며, 총병력은 국왕친위대를 비롯하여, 정규군 198,500명으로 육균 17,5만, 해군 1만, 공군 1.3만 미라주 F·F 등 119기, 헬리콥터 100기를 보유하고 있다. 징병제이며 병역- 기간은 18개월, 군사비는 GDP의 5,1%, 16,9억$이다.

 
↑ 광대들

사회(社會) 주민은 주로 아랍인(65%)과 베르베르인(35%)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밖에 흑인계와 12만의 유럽인이 있다. 흑인계는 1백만 이상의 인구를 언어적(言語的)으로 5개 종족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모로코계 아랍인과 ⓑ4개의 베르베르인(버버족: Berber)인 ㉠리피, (Riffians), ㉡제발라(Jebaia), ㉢이마지겐(Imazighen), ㉣아쉴하인 등이라고 한다. 그러지만 현재 의학적으로 DNA에 의한 인종분류 중에 있고, 인종적으로는 전 지역에 공통으로 투아레(Tuareg,) 제나타(Zenata)족이 분포되어있고, 알제리(Algeria)에는 차오우이 (Chaoui), 카빌레(Kabyle), 모짜비트(Mozabite)족이, 그리고 모로코에는 치에우(Chieuh), 리피(Riffians), 제발라(Jebaia)족이 분포되어있는 것으로 집계되어있다. 모로코는 철저한 대가족제이고 가부장제(家父長制)이며, 이슬람 풍습으로 일부다처(一夫多妻: Polyandry)이지만 많이 개화되어 2000년부터는 후실을 얻을 때는 반듯이 본처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공용어는 아라비아어이지만 프랑스어도 널리 통용되며 북부에서는 에스파냐어도 사용된다. 인구는 2008년 집계로 3,434만 명, 국민의 대부분은 정통파인 수니파 이슬람교도이며, 평균수명은 2004년 남자 69세, 여자 72세이다. 도시에는 의료시설이 갖추어져 있지만 지방은 아직 충분하지 못 하다. 초등교육은 9학년까지 의무교육이지만 시굴에서는 학교가 사원 (모스크)에 있고 멀어서 감으로 문맹(55!69%)이 많다. 일반적으로 무슬림(Muslim)의 라마단(Ramadan)은 2개월간이지만, 모로코의 라마단은 만 1개월간이다. 새벽 4시부터 저견 6시까지 해가 있는 동안 금식하여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함께 체험하는 의의를 지닌다. 음식뿐 아니라 물 그리고 그들이 제이 좋아하는 기호품인 담배 까지도 금한다. 이 기간 동안에는 대추야자 등을 많이 먹는다고 한다. 빈부의 격차가 심하고 부자들의 자녀들은 프랑스학교에 다니며 불어를 쓴다. GDP(PPP)는 1999년 어림값이 전체: $1080억(54위), 1인당: $4,444 (110위)일 정도이다.모로코의 통화는 디람 Dirham, 디람=100 쌍팀(centime), 모로코에서만 통용되는 원화의 환율은 1디람=125원 정도(2007년 기준)이고, 10디람=1Eu(유로)이다.
Ps: -베르베르인人: Berber): 북아프리카의 사하라 지역에 사는 21개 종족 약 1천망명이 산재하여 살고 있으며, 베르베르라는 이름은 라틴어에서 야만인을 뜻하는 Barbar에서 유래하였다. 토착 베르베르인들은 오아시스에서 농사와 목축으로 균형있게 살고 있으며, 다양한 공예 기술로 유명하다. 스스로를 귀족 혈통의 사람이라는 뜻의 이마지겐(Imazighen)이라 부른다. 언어는 햄-셈어계에 속하며 베레베르어(Amazigh language).. 이들이 사회는 공동체, 지역, 부족이라는 3가지 기본단위로 운영 되고 있고 일부 부족은 현재도 족내혼(族內婚)의 전통을 지킨다.

 
 
 
 
 
모로코-2.탕헤르(Tanger)


임종욱-旅窓筆滴-모로코 편.
모로코 문화탐방기 2.모로코 탕헤르(Morocco Tanger)
2009.8. 空慧

아프리카 대륙의 북서단 지브롤터 해협(海峽: Gibraltar strait)에 면한 항구도시이다.

 
↑ 지브롤터 해협

탕헤르는 모로코(Morocco)의 관문(關門과도 같은 곳이다. 모로코에 오기 위해 지브롤터 해안의 에스파냐 최남단의 항구도시 따리파(puerto de Tarifa)를 떠나 대형 유로 페리(Euro-Ferry)편 으로 40분 만에 입항(入港)하였다. 바다는 호수같이 잔잔하고 하늘과 바다는 쪽빛으로 아름답고 갑판(甲板: deck)에는 내려 쪼이는 햇볕에도 불구하고 시원하였다. 따리파항에서 승선수속과 스페인 출국신고를 하고 승선하며, 모로코 입국수속은 페리보트 선실 안에서 작은 창구 한 곳에서 한다. 하여 모로코에 입항하고도 수속을 미처 끝내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 따리파 항구 시가지
 ↑ 따리파 항구 출항(出港)
 
↑ 따리파 항구 성채
 
↑ 따리파 항구 부두
 
↑ 따리파 항구 부두 승선장

 
↑ 지중해 페리보트
 
↑ 따리파 항구 원경
 
↑ 페리보트 갑판풍경


-♡- 탕헤르 항구는 현재 국제 관리(管理) 하에 있는 자유항(自由港) 으로서 수출입 화물이나 선박에 대해 모두 관세가 없이 출입이 자유롭지만 일단 도착하면 노천에서 세관검사를 받는다. 우리 일행은 특별대우를 받아 세관 검사가 면제다.

 
↑ 탕헤르 항구 출입국 수속장
 
↑ 탕헤르 항구의 노상 세관 검색광경 (스페인 관광버스를 탄 우리 일행은 검색없이
무사통과)

이 항구는 천연의 양항에 근대적인 항만시설을 건설하였으며 예로부터 전략상의 요충지로서 강국의 쟁탈의 표적이 되었으며, 7세기 말에 아랍의 지배를 받았고, 15세기부터는 포르투갈, 에스파냐, 영국 등의 지배를 받았다. 1648년 모로코령(領)이 되었으나 19세기에 다시 열강의 쟁탈의 표적이 되어 1902년 에스파냐-프랑스 조약((France-Spain Treaty) 에서 국제도시로서의 지위를 선언하였으나 독일의 야심 때문에 분쟁이 일어났다가 1912년 프랑스와 에스파냐가 모로코를 분할할 때 국제적인 위원회(委員會: committee/board)를 설치하여 1914년 국제도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WW I.) 후인 1922년 그 지위가 재확인되어 1925년 6월 영세중립(永世中立: permanent neutrality)의 국제도시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WW II.) 중 잠시 에스파냐에 점령되었으나 1945년 8월 그 지위를 회복하고 국제관리기관이 설치되었다. 1956년 독립한 모로코에 반환되고 자유무역항으로서의 지위가 폐기 되었으나, 경제적 쇠퇴가 현저하였기 때문에 1962년 항구의 일부를 자유무역구로 지정하였다. 어업이 활발하며, 조선, 섬유, 타이어 공업이 성하다. 사원 등이 있는 구시가와 신시가가 있으며, 철도와 육로로 라바트( Rabat), 우지다주(州: Oujda)등과 이어진다. 신시가지에 있는 이슬람식 건축물인 알렌 호텔(Ahlenl Hotel) 안의 분위기 있는 식당에서 모로코 전통 음식인 꾸스꾸스(Couscous)로 점심을 먹고 남쪽으로 이동하여 수도인 라바트(Rabat)로 행하였다. (※꾸스꾸스 등 모로코의 음식문화는 후편에 상술한다) 모로코인들은 대개 애연가(愛煙家)들이다. 넓은 들판은 반사막지대인데 선인장(仙人掌)과에 속하는 캑터스 (Cactus)와 담배들이 많이 재배되고 있었다. 항구에서 모로코 현지 안내원 무하마드(Muhamad)를 만났는데 50대이지만 작은 키에 흰머리가 많아 60대 중반 쯤으로 보인다. 그의 말에 의하면. 모로코에서는 담배와 질 좋은 소금이 유일한 수출품이라고 하며, 젊은 군왕은 개혁정신이 투철하지만 경제와 산업은 발달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 탕헤르 시가
 
↑ 탕헤르 시내 3륜 화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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