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の背景函

後追い三味線-島津亜矢////江戸幕府を建てた,徳川家康

bsk5865 2012. 6. 22. 08:59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2.06.22 06:52

 

後追い三味線-島津亜矢////江戸幕府を建てた,徳川家康(D)|★....演歌掲示板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950 


後追い三味線-島津亜矢


後追い三味線-島津亜矢

作詞 吉川静夫 作曲 吉田 正


後を追うなと 薄情がらす
闇にひと声 月夜に三声
すがりつかせぬ 道中合羽
糸も切れそな 三味線抱いて
泣いてまた越す おんな坂


末はこうよと 承知のはずが
惚れた弱みの この未練酒
酔えば恋しさ 悲しさつのる
可愛いがられた むかしはむかし
いまは涙の 流れ鳥


帯も結ばず 黒髪とかず
逢えぬ日数を 指折るばかり
神も仏も この夜になけりゃ
合わしますまい この両の手を
三味も知らない おんな旅


江戸幕府を建てた,徳川家康

織田信長(おだのぶなが),豊臣秀吉(とよとみひでよし)에 이어 戦国을 制覇하고 江戸幕府)를 세운 徳川家康(とくがわいえやす)를 紹介합니다.

徳川家康の生涯

家康의 生涯는 크게 세 段階로 나눌 수 있습니다.

 人質で東海地方最大の豪族で

家康(幼名は竹千代)는 1542年 지금의 愛知県(あいちけん) 에 該當하는 三河の国(みかわのくに)의 豪族, 松平家의 長男으로 태어났습니다.

當時에는 各 地方의 領主들이 熾烈한 領土 다툼을 벌이고 있던 탓에 日本 列島의 가운데에 位置한 三河の国는 東西 양쪽의 强한 勢力 사이에서 滅亡할 危機에 處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家康는 人質로 잡혀 지금의 静岡市(しずおかし)에 該當하는 駿府(すんぷ)에서 幼年時節을 보냈습니다.

1560年,自身을 人質로 잡았던 今川氏(いまがわうじ)가 信長의 攻擊을 받자 家康는 信長와 同盟을 맺고 故鄕으로 돌아와 勢力을 키웠는데. 그 過程에서 姓을 徳川로 바꿨습니다.


 江戸幕府設立

1582年,家康는 信長가 죽은 後 戦国統一을 推進하는 秀吉와 對立하기 始作합니다. 하지만 秀吉의 女同生과 結婚하며 協力하게 되고 結局 主從關係를 맺어 統一 戰爭에 參與하게 됩니다.

그러나 1590年,秀吉는 家康에게 三河の国를 떠나 지금의 東京인 江戸로 移住하라는 命令을 내립니다.

領地의 規模는 커졌지만 徳川 家門의 本據地를 잃고 政治의 邊方이나 다름없는 関東로 가게 된 家康는 江戸城을 中心으로 各 地方에 믿을만한 家臣을 派遣하고 人才를 登用해 勢力을 키워갔습니다.

1598年,家康는 秀吉의 아들 秀賴(ひでより)의 後見人이 되고 秀吉가 죽은 後 ‘関ヶ原の戦い(せきがはらのたたかい)’에서 勝利하면서 政治의 實權을 掌握합니다. 그리고 1603年,征夷大将軍(せいいたいしょうぐん)에 오르며 江戸幕府를 열었습니다.


 戦国統一

2年 뒤 家康는 아들 秀忠(ひでただ)에게 讓位 한 뒤 幼年時節을 보낸 駿府(すんぷ)에 城을 짓고 隱居 生活을 始作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實質的으로 西쪽을 支配하고 있는 豊臣 家門에 對한 걱정이 있었습니다.

1614年 11月,家康는 秀賴가 지은 절의 梵鐘에 徳川家門을 詛呪하는 글이 있다는 口實로 20万 大軍을 이끌고 大阪城을 包圍합니다. 겁에 질린 秀賴는 孩子(城 周圍에 판 防禦用 연못) 를 메우고 城壁을 부수는 條件으로 和親을 맺지만 結局 1615年 여름,두 家門은 다시 衝突했고 豊臣 家門은 滅亡하고 맙니다.

모든 일을 끝냈다는 安堵感 때문이었을까요? 그는 이듬해 75稅의 나이로 世上을 떠났습니다. 그의 무덤이 있는 栃木県 日光(にっこう)의 東照宮(とうしょうぐう)는 아름다운 自然과 建築物을 認定받아 유네스코의 世界 文化遺産으로 指定되어 있습니다.


 家康の歴史的評価

江戸時代(1600年頃~1867年)에는 幕府의 創始者이자 神으로 모셔지고 있는 家康를 감히 批判할 수 없었기 때문에 公定한 評價를 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江戸幕府를 무너뜨린 明治政府는 家康에 對해 決코 좋은 評價를 내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第2次 世界大戰 以後에야 家康에 對한 本格的인 評價가 내려지기 試作했습니다.

그 代表的인 契機는 1950年 作家 山岡荘八(やまおかそうはち)가 發表한 小說 『徳川家康』 인데. 이 作品에서는 忍耐心이 强하고 儉素한 人品과 265年에 이르는 長期 政權의 基礎를 만든 그의 功績을 높게 評價했고 이것이 家康에 對한 評價 基準이 되었습니다.


 人間,家康

‘タヌキ親父(능구렁이 영감)’이라는 別名에서 알 수 있듯 狡猾한 이미지가 强한 家康지만 實際로 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戦国時代 日本人의 平均 身長은 約 160cm였다고 하는데,家康는 159cm로 平均適인 體形이었습니다. 또 남아 있는 肖像畵를 보면 눈이 크고 印象이 부드럽습니다. 趣味는 어릴 的부터 좋아했던 매사냥과 바둑이고 새로운 物件에 對한 好奇心이 많아 遺品 中에는 西洋에서 製作된 時計가 남아 있습니다.

戰爭에 參與했던 武士답게 劍術,馬術,砲術 等에 能했으며 健康에 關心이 많아 食事에도 꽤 神經을 썼다고 하는데. 家康의 死因 中 도미 튀김을 먹고 食中毒에 걸렸다는 說이 있지만,平素의 모습으로 보았을 때 信憑性은 別로 없고 胃癌이었을 것 이라는 說이 가장 많은 支持를 받고 있습니다.

家康는 學問을 좋아해 『論語』『中庸』 等 中國 古典을 비롯해 많은 冊을 읽었습니다. 그가 末年을 보낸 駿府城에는 約 1万 卷의 藏書를 保有한 巨大한 書庫가 있었다고 합니다.

家康가 남긴 말 中 가장 有名한 것은 “人の一生は、重い荷物を背負って遠い道を行くようなものだ。急いではいけない(사람 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서두르면 안 된다)입니다. 險難한 어린 時節을 거쳐 信長, 秀吉라는 라이벌과 싸우면서 最高의 자리에 오른 家康의 人生哲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마지막으로 家康의 思想이 잘 드러나 있는 有名한 말을 紹介합니다.

* 鳴かぬなら殺してしまえホトトギス (울지 않는다면 죽여 버려라 두견새) - 織田信長

* 鳴かぬなら鳴かしてしまえホトトギス (울지 않는다면 울게 만들어라 두견새) - 豊臣秀吉

* 鳴かぬなら鳴くまで待とうホトトギス (울지 않는다면 울 때까지 기다려라 두견새) - 徳川家康

같은 狀況을 表現하는 세 사람의 말에서 各自의 個性이 느껴집니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