風列車-新沼謙治 作詞 幸田りえ 作曲 徳久広司
一 故郷の空は 夜明け前 ま白い山に 冬銀河 男の心を ふりしぼり 自由になれよと 背を向けた 何処にも行かずに 海を見て ひとり暮らして いるという 汽笛よ届け 列車よ走れ 迎えに来たよと 風よ哭け 汽笛よ届け 列車よ走れ 離れはしないと 星よ降れ
二 波打つ胸を 熱くする 想い出だけが また浮かぶ 一度も涙を見せないで 笑って送って くれたやつ 今夜も寂しく 眠ったか 同じ夜空を 見ているか 汽笛よ届け 列車よ走れ 迎えに来たよと 風よ哭け 汽笛よ届け 列車よ走れ 夢見て眠れと 星よ降れ
汽笛よ届け 列車よ走れ 迎えに来たよと 風よ哭け 汽笛よ届け 列車よ走れ 離れはしないと 星よ降れ
日本最初の実測地図を作った、伊能忠敬 이번에 紹介하는 人物은 江戸時代 後期(18世紀 末)의 測量 學者인 伊能忠敬(いのうただたか)입니다. 韓國人에게는 조금 낯선 이름일지도 모르지만 交通이 不便할뿐더러 航空寫眞도 없었던 時代에 처음으로 正確한 日本 地圖를 만든 人物입니다. 지금의 「源氏物語의 作家 紫式部(むらさきしきぶ)나 戦国時代의 有名한 武將 織田信長(おだのぶなが)처럼 華麗한 存在는 아니지만 그 業績은 무척 대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地球の大きさが分かりたい! 伊能忠敬는 1745年, 지금의 千葉県의 太平洋 沿岸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18歲에 지바현 香取市(かとりし) 佐原(さはら)에서 釀造場을 하고 있는 伊能家門의 데릴사위가 되었습니다. 當時 赤字에 허덕이고 있던 妻家의 家業을 되살렸다고 하니 商人으로서도 훌륭한 才能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50勢가 되었을 때 長男에게 家業을 물려 주고 어린 時節부터 關心을 가지고 있었던 天文學을 工夫하기 始作합니다. 平均 壽命이 90歲에 이르는 요즘과 달리‘人生 50年’이라고 했던 時代에 50歲부터 새로운 分野에 挑戰하려고 했던 熱情이 무척 대단해 보입니다.
지금의 東京인 江戸로 上京한 忠敬는 天文學의 일인자였던 高橋至時 다카하시 요시토키(たかはしよしとき)의 弟子로 들어갔습니다. 當時 스승인 至時는 32歲,弟子인 忠敬는 51歲였는데요. 나이에 拘碍 받지 않는 깨인 思考方式의 所有者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忠敬는 늦은 工夫를 挽回하려는 듯 스승인 至時가 ‘曆學(物體의 運動에 關한 法則을 硏究하는 學問) 선생님’이라고 부를 程度로 熱心히 工夫했습니다.
當時 天文學者들의 最大 關心事는 ‘地球의 直徑’이었는데요. 이미 地球가 둥글다는 事實은 알고 있었지만 그 크기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至時는“北極星의 높이를 두 地点에서 觀測하고 올려다보는 角度를 比較해 緯度의 差異를 알 수 있다면 地球는 둥그니까 바깥둘레를 計算할 수 있다. 이 두 地点의 距離는 멀수록 誤差가 작아질 테니 江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蝦夷地(えぞうじ). 지금의 北海道까지의 距離를 測定하면 어떻겠는가?"라는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蝦夷地에 가기 爲해서는 幕府의 許可를 받아야만 했는데요. 그래서 스승 至時는 ‘地圖를 만든다’라는 名目을 생각해 냈습니다. 當時 幕府에는 國防에 必要한 正確한 地圖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幕府는 蝦夷地는 勿論 東日本 全域의 測量 許可를 내주었지만 金錢的인 援助는 없었기 때문에 忠敬는 30年間 家業을 通해 모은 財産을 모두 쏟아 부어 餘生을 건 大 作業을 始作했습니다.
国家事業になった忠敬の測量 1800年,55歲의 忠敬는 蝦夷地를 向해 出發했습니다. 그가 利用한 測量 方法은 步幅을 一定하게 維持하면서 同行한 사람들의 걸음 수를 平均 내어 距離를 計算하는 것이었는데요. 길이 없는 곳이나 危險한 海岸線도 直接 걸으면서 調査를 進行했습니다.
忠敬는 낮에는 測量,밤에는 天體를 觀測하면서 이 두 가지 結果를 比較해 誤差를 修正해 나갔습니다. 스승인 至時는“온 世上의 學者는 當身의 地圖가 完成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曆學의 盛衰 는 當身에게 달려 있습니다. (天下の学者はあなたの地図の完成を待ち望んでいます。暦学の盛衰はあちずかんせいまのぞれきがくせいすいなたの双肩にかかっているのです).”라는 便紙를 써 忠敬를 激勵했습니다.
3年에 걸쳐 東日本을 測量한 忠敬는 元來 自身의 目的이기도 했던 地球의 크기를 計算했는데요. 그 數値는 科學的으로 밝혀진 地球의 크기와 不過 1/1000밖에 差異가 나지 않습니다.
한便 東日本 地圖의 精密함을 보고 놀란 幕府는 忠敬에게 九州,四国를 包含한 西 日本의 地圖를 만들도록 命令했습니다. 自身의 오래된 所望을 이루기 爲해 始作된 그의 測量이 國家事業이 된 것입니다.
4万キロメートルを踏破! 1805年,다시 江戸를 出發한 忠敬의 나이는 60歲였습니다. 老人이 된 그에게 西 日本의 測量은 무척 힘든 일이었는데요. 그것을 알 수 있는 逸話가 伝해집니다. 겨우 九州 地方에 들어간 忠敬는 딸에게“이빨이 다 빠지고 하나만 남아서 이제 좋아하는 菜蔬 절임도 먹을 수 없게 되었구나"라는 便紙를 씁니다. 그만큼 힘든 작업이었던 것이죠.
1815年,忠敬는 모든 地方의 測量을 마쳤습니다. 그가 約 15年에 걸쳐 걸은 거리는 約 4万 킬로미터. 地球 한 바퀴와 같습니다. 그에게 남은 作業은 各地의 地圖를 한 장으로 整理하는 것뿐이었지만 갑자기 健康이 나빠져 1818年,73歲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맙니다. 그러나 스승 至時의 아들인 影保(かげやす)와 弟子들은 그 地圖를‘伊能忠敬가 만든 것으로 하기 爲해 그의 죽음을 숨기고 地圖를 完成했습니다.
1821年 江戸城에서 그가 만든 日本 最初의 實測 地圖‘大日本沿海輿地전도’가 公開되었습니다. 1/36,000의 大地圖 214장,1/216,000의 中地圖 8장,1/432,000의 小地圖 3장. 그 規模에는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忠敬가 죽은 지 43年이 지난 1861年,英國의 測量 艦隊가 日本 沿岸을 測量했는데요. 幕府의 公務員이 가지고 있던 忠敬의 地圖를 본 船長은 깜짝 놀라 이 地圖는 西洋의 道具나 技術을 使用하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正確하게 製作되었다. 우리가 다시 測量할 必要는 없다"라며 測量을 中止 했다고 합니다.
忠敬는 “내가 地圖를 完成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스승님 德分이니 부디 스승님 곁에 묻어 다오" 라는 遺言을 남겼는데요 所願대로 그는 上野의 源空寺(げんくじ)에 있는 스승 至時와 그의 아들 影保의 무덤 옆에 잠들어 있습니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