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の背景函

吉良の仁吉-五木ひろし/// 吉良の仁吉

bsk5865 2012. 10. 27. 09:04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2.10.27 06:23

 

吉良の仁吉-五木ひろし/// 吉良の仁吉(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1937 




吉良の仁吉-五木ひろし

作詞 萩原四朗 作曲 山下五郞


海道名物 数あれど
三河音頭に 打ち太鼓
ちょいと 太田の 仁吉どん
後ろ姿の 粋なこと


吉良の 港は おぼろ月
泣けば 乱れる 黒髪の
赤い てがらも 痛ましや
お菊十八 恋女房


引くに 引かれぬ 意地の道
止めて 呉れるな 名がすたる
いやな 渡世の 一本刀
辛い 別れが なぜできぬ


嫁と呼ばれて 未だ三月
ほんに儚い 夢のあと
行かせ ともなや 荒神山へ
行けば 血の雨 涙雨


吉良の仁吉

本名 太田仁吉 (二吉로도 씁니다)

1839年 幕末 三州吉良横須賀(지금의 愛知県幡豆郡吉良町)에서 没落하는 武士 家門의 侠客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寡默하면서도 腕力과 相撲(すもう)가 強하여、相撲 위에서의 싸움으로 侠客의 頭目인 寺津の間之助에 진 것이 契機가 되어 18歳부터 3年間을 次郎長의 밑에서 지냅니다. 次郎長과는 兄弟로서의 술 잔까지 주고 받는 切親한 사이가 된 後 故鄕인 吉良로 돌아와 吉良一家를 일으킵니다.

侠客인 穴太の徳次郎(通称 穴太徳(あのうとく)。가 次郎長 一家에 身世를 진 伊勢의 吉五郎 의 勢力圈이 였던 伊勢荒神山(いせこうじんやま) 을 빼앗고 徳次郎의 手下인 岡っ引(おかっぴき=江戶時代에 犯人의 搜索,逮捕 等을 하던 사람)들의 仲介도 拒絶하고 世上에서 말하는「荒神山の喧嘩(血闘)」끼어듭니다。이 싸움으로 吉五郎側이 勝利를 거듭니다만 仁吉는 鉄砲(てっぽう)를 맞고 死亡합니다。享年28歲.

義理와 人情에 두텁고 젊게 살다 義理에 쓰러진 仁吉는 後世에 人情物의 武勇談이나 浪花節(浪曲) 그리고 演劇이나 数많은 映画 歌謡曲 等의 題材로 採擇되는 素材가 되었습니다。”荒神山の喧嘩”에 吉五郎側으로 参加한 한 사람으로 後에 旅講釈師가 된 松廼家太琉가 講談師의 三代目神田伯山의 記事거리로 当時의 模樣을 伝하고 거기에 伯山의 講談을 浪曲師의 二代目広沢虎造(ひろさわとらぞう)가 採擇되어 浪花節로서도 널리 알려지는 契機가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因해 歷史的 事實과 만들어낸 이야기가 混在하여 伝해지고 있어 演劇이나 映画에서는 仁吉는 徳次郎의 女同生인 “お菊”를 妻로 맞이하였지만 吉五郎와의 復讐를 爲해 “お菊”를 버리는 것으로 됩니다. 그러나 仁吉는 結婚 經歷 없는 것으로 後에 創作한 것으로 일컬어집니다.

무덤은 그의 一周忌에 次郎長가 太田家의 遺族과 함께 새운 것인데 지금도 태어난 吉良町의 源徳寺(真言宗)에 남아 있습니다.高神山観音寺(真言宗)에 남아 있는 “吉良仁吉之碑”는 後世에 二代目広沢虎造가 建立한 것으로 지금의 高神山(こうじんさん) 이란 산 이름이 仁吉의 싸움이 伝해지는 사이에 荒神山(こうじんやま)으로 變하고 지금의 吉良町에서는 吉良三人衆(他に尾崎士郎、吉良上野介義央)의 한 사람으로 毎年6月에 墓祭를 兼하여 「仁吉まつり」가 行하여 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佐藤惚之助作詞 古賀政男作曲의 人生劇場 三節에
時世時節は 変わろとままよ 吉良の仁吉は 男じゃないか
おれも生きたや 仁吉のように 義理と人情の この世界라는 詩節이 있습니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