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漢詩函

[寫眞隨筆] 외할머니 이야기

bsk5865 2013. 1. 21. 21:06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3.01.21 11:18

 

[寫眞隨筆] 외할머니 이야기|★....일반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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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 이야기...김상영

엎어지면 코 닿을 듯 가까운 물 건너 작은 동네에 외갓집이 있습니다. 처갓집이나 뒷간은 멀어야 좋다는데 이에 아랑곳하지 않으신 아버지 덕입니다. 사방 삼십 리를 벗어나기가 수월찮았던 옛날이라 해도, 지척에서 정분이 난 건 입방아를 찧어댈 사건이지요. 나 태어난 상황이 이러한데다 외할머니와 생일까지 같으니 더없이 각별할 수밖에요.

“상영이 우리 집에 보내라 카든데요.”

섣달 스무날 이른 아침, 깡깡 추운 사립문 밖에서 동갑내기 외사촌 형이 시린 발 동동걸음으로 외칩니다. 겸연쩍어 못 올 것을 짐작하신 외할머니의 성화에, 하기 싫은 심부름으로 해마다 고생한 형입니다. 생솔가지 지펴가며 이른 아침부터 생일상 준비를 서둘렀을 외숙모 눈치도 보입니다. 모락모락 하얀 이밥에 생선구이하며 미역국이 그득 차려진 소반에 외할머니와 겸상을 받은 기억 뿐, 기념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우리 집에서 생일상 받아 본 적이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설날입니다. 설빔 옷은 헐렁거려서 소매는 걷고 바짓단은 접어 올립니다. 문수 넉넉한 신발이라 나일론 양말을 겹으로 신었어도 발은 통통 시리고, 산토끼 가죽 귀마개는 털이 숭숭 빠집니다. 갓 쓰고 도포차림인 조부님을 따라 나선 큰 집 제사 십리 길은, 동틀 무렵 예리한 추위에 고난의 종종걸음입니다. 이름 있는 종손은 아니어도 나 또한 김해 김 씨의 어린 장손, 유약할 수 없습니다. 문풍지 쪼가리로 땜질했을 성한 낡은 병풍이 펼쳐진 뒤에는 시렁에 걸려 꾸들꾸들 말라가는 메주가 쾌쾌한 냄새를 피웁니다. 솜바지저고리 서걱대는 소리와 함께 풍년초에 절어 풀풀 나던 어른냄새와 향내 속에 구수한 탕국냄새가 범벅된 제사분위기가 아련합니다. 넙죽 절은 해보지만 조상은 묵묵부답이요, 어른들은 덕담 한 두 마디뿐 세뱃돈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썰렁하지 않은 건, 내게는 햇볕 가득한 외갓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외할머니 고의춤 쌈지는 붉은 비단, 십 원 지폐에 백동전 한 닢 내려주시며 고사리 얼음장 손을 잡은 당신 모습에 친손자들의 눈총이 느껴집니다.

 

 집집마다 살아가는 환경이 같을 순 없다 해도 외갓집과는 어찌 그리 다를까요. 우리 집 도끼는 자루가 빠지거나 부러진 체 나뒹굴 때가 자주 있습니다. 조부님이 줄로 쓴 톱은 잘 썰어지지 않고 둥치에 끼어 휘청휘청 진을 뺍니다. 외삼촌이 손질해 놓은 낫은 언제나 정돈되어 있고, 예리하여 풀베기에 좋습니다. 시골살이에 땔나무를 해야 하는 건 숙명처럼 지워진 굴레여서, 연장 좋은 외갓집을 들락거린 건 당연합니다.

“할매, 톱 쫌 가주가께.”

꼬부랑 외할머니가 외삼촌 볼 새라 얼른 쥐여 주시고선 측은한 눈길로 쓰다듬으십니다. 외할머니 사랑은 유별나기도 합니다. 해방된 해 일본에서 돌아오신 조부님이 산 우리 집은 기와집이긴 합니다. 얼렁뚱땅 지어 팔고서 서둘러 이사한 양반의 집을 덜렁 산 터라, 서향에다 벽이 얇아서 자리끼가 어는 게 탈이지요. 양지바른 남향에 담이 두터운 외갓집은 따스합니다. 외풍에 길들여진 나를 뜨끈뜨끈 아랫목에 끌어 앉히는 외할머니 성화에 못 이겨 진땀을 흘려야합니다. 당신 밥을 덜어 얹으시며 더 안 먹나하고 눈을 치뜨시기 때문에 꾸역꾸역 부른 배에 숨이 가프기도 합니다.

“니는 부자 될 끼라.”

앞니 두 개가 솟을대문처럼 큰 내게 내리신 덕담은, 주문呪文처럼 내 삶을 지탱해 주는 버팀목이 되었지요.

 

 어느 해 어스름한 저녁쯤이었을까. 외할머니는 피 한 대야를 토하시며 그만 세상을 뜨셨습니다. 동네어른들이 하얗게 모인 좁은 방안은 발 들여놓기가 어렵습니다. 애들이 법석대면 정신이 시끄러운 법, 그래도 임종할 수 있었던 건 외할머니였기 때문이지요.

 입 하나 덜 요량으로 일찌감치 치운 딸이라 더욱더 눈물겨웠을 겁니다. 그래도 그저, 잘 살아주면 고마우련만 고단한 게 삶이라 하였나요. 올망졸망 시누이동생 다섯에다 시어른은 괴팍하여 사네 못 사네 사흘이 멀다 하니 애 탄 속은 차라리 숯검정이 되셨을 테지요. 그런 터에 당신 닮은 새끼 하나 오며가며 눈에 밟히니, 딸자식 향한 미안한 마음을 온통 내게 쏟으시고 한 많은 세상을 하직하신 게 틀림없습니다.

 

 세월은 속절없이 흘렀습니다. 방학을 맞아 중국에서 외손자 녀석 둘이 왔습니다. 외할머니와 왕자 풀로 붙여서 함께 살겠다는 작은 녀석은 마누라를 온통 차지하고 말았습니다. 집안이야 분잡해도 다 큰 자식보다는 손자가 애틋한 법이며 내 죽으면 두건 쓸 녀석이라 뭘 해도 예쁜 걸보니 나도 이젠 나이가 들었나 봅니다. 하지만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가운 게 객이라 하였나요.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법, 적당히 진을 뺀 녀석들이 제 집으로 가는 날입니다. 그 놈 참 별난 녀석, 먹은 걸 토해놓으며 격한 감정으로 이별을 못 견뎌합니다. 초상집 분위기에 안사돈 보기가 민망하여 짐짓 외면해 보지만 울적한 심사를 감출 수 없습니다. 저희나 나나 외할머니는 그립고도 따뜻한 분, 이 삭막한 겨울날에 춘삼월 기다리듯 나 어릴 적 외할머니를 떠올리며 회상에 젖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