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の背景函

長崎の鐘-藤山一郞///永井敎授の冥福を祈ります

bsk5865 2013. 2. 26. 08:56

보낸사람: 소담 엔카 운영자 13.02.26 07:02

 

長崎の鐘-藤山一郞///永井敎授の冥福を祈ります(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2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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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崎の鐘-藤山一郎

作詞 サトウハチロー 作曲 古関裕而


こよなく晴れた青空を
悲しと思うせつなさよ
うねりの波の人の世に
はかなく生きる野の花よ
なぐさめ はげまし 長崎の
ああ 長崎の鐘が鳴る


召されて妻は天国へ
別れてひとり旅立ちぬ
かたみに残るロザリオの
鎖に白きわが涙
なぐさめ はげまし 長崎の
ああ 長崎の鐘が鳴る


つぶやく雨のミサの音
たたえる風の神の歌
耀く胸の十字架に
ほほえむ海の雲の色
なぐさめ はげまし 長崎の
ああ 長崎の鐘が鳴る


こころの罪をうちあけて
更け行く夜の月すみぬ
貧しき家の柱にも
気高く白きマリア様
なぐさめ はげまし 長崎の
ああ 長崎の鐘が鳴る


永井敎授の冥福を祈ります。

自身도 原爆을 맞고 献身的으로 被害者를 救護하다가 病床에 쓰러지면서도 平和를 希求하는 많은 著書를 남긴 長崎医大教授 永井隆(ながい たかし)博士에 對한 노래입니다.

永井隆敎授는 島根県 松江市에서 태어나 幼年期를 長崎県 三刀屋(みとや)町(現・雲南市)에서 보냈습니다 長崎医大를 卒業 後 同医大의 助敎가 되고 대단한 秀才로 周邊 사람들은 그가 医学的 業績을 歴史에 길이 남길 것이라는 큰 期待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助敎 때에 兵役을 畢하고 다시 助敎로 復帰한 1934年 카토릭 信者가 되었습니다 그 뒤 크리스트(Christ) 教徒로서 博愛精神이 그를 特徵的 人物로 만든 것 같습니다.

1940年 同医大 助教授가 되고 将来가 嘱望되었지만 博士學位를 取得한 1944年 그의 運命은 突然 暗鬱해집니다 物理的療法(放射線)科의 部長으로 研究 中 大量의 放射線에 露出되어 白血病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다음해에 3年밖에 못산다는 死刑宣告와 같은 診断을 받습니다만 그는 挫折하지 않고 그대로 研究에 熱中하며 自己의 自分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1945年8月9日 午前11時2分 長崎에 原爆이 投下되고 被爆 地에서 700m 밖에 안 되는 長崎医大의 診察室에서 被爆된 永井教授는 飛散된 유리窓 破片에 頭部 右側의 動脈이 切断됩니다만 簡単한 應急措置만 하고 살아남은 医師 看護婦들과 被爆者의 救護에 나섭니다.

永井教授는 暫時後 大量出血로 失神하고 맙니다만 다시 精神을 차라고 救護活動을 繼續하고 歸家한 것을 다음날이었습니다.

自宅은 痕跡조차 없이 부서지고 부엌이었던 근처에 거무스름한 덩어리가 보였습니다 바로 그 옆에 아내가 언제나 몸에 지니고 있던 로자리오(rosary) 로마 카톨릭교(Roman Catholicism) 教徒가 使用하는 念珠와 같은 것)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 덩어리는 타다 남은 아내의 骨盤과 腰椎였습니다.

多幸하 두 명의 아이는 待避하여 無事했으며 아내를 葬禮한 後 永井教授는 다시 医療班을 組織하여 繼續해 救護活動에 精進합니다만 9月20日 出血이 甚하여 昏睡状態에 빠져 하는 수없이 医療 班을 解散하고 맙니다.

다음해인 1946年1月에 教授가 되고 研究와 医療에 従事하나 7月 長崎駅 앞에서 쓰러져 以後 病床에 눕게 되고 말았습니다.

괴로운 闘病生活을 보내며 永井教授는 다시 活発하게 執筆活動을 展開합니다 같은 해 “長崎の鐘” 다음해 1948年 1月”びぬものを” 3月”ロザリオの鎖” 4月”この子を残して” 8月”生命の河” 1949年3月 “花咲く丘” 10月”いとし子よ” 等을 発表하고 그 많은 著書 모두가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프로 著述家도 이루지 못할 페이스로 그에게 執筆을 이르게 한 것은 우선 平和를 希求하는 마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伝하려는 뜻이며 그리고 자기가 죽은 뒤 두 아이의 살아가야 할 터를 마련해 주고 싶은 뜻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이 되네요.

永井教授가 闘病生活을 始作하면서 이웃 사람과 教会의 同僚들이 힘을 합쳐 被爆地 가까이에 있는 上野町에 洋鐵板(iron sheet) 오두막집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不過 2畳1間의 집으로 뒤에는 돌담으로 막은 데로 使用하고 있었습니다.

“돌담은 종이 조각 등으로 들어가기는 便利했으나 비 오는 날엔 크게 不便했으며 學校 弟子들이 오는 날이면 집이라 하지 않고 그저 箱子라고 했다”라고 그는 随筆에 쓰기도 했습니다.

1948年3月에 完成된 그 집을 永井教授는 如己堂(にょこどう)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집을 지어준 사람들의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고 自身도 고마운 마움에 살자고 聖書의「己の如く人を愛せよ=自身이 미치는 사람을 사랑해라」의 말에서 찾아낸 말이라고 합니다.

그는 그곳에 두 자녀를 避難地에서 대려다 얼마 남지 않은 나날은 闘病과 執筆로 보냈답니다.

苦難에도 氣가 죽지 않고 平和와 사랑을 繼續 呼訴하는 그 모습은 国内만이 아니고 海外에서도 갚은 感動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1948年10月에는 訪日中인 헬렌•켈러가 問安으로 訪問하고 다음해 1949년5月에는, 巡幸中인 昭和天皇의 問安을 받았습니다.

또 1949年5月과 1950年5月 두 차래 걸쳐 로마教皇庁에서 特使를 派遣하였습니다.

그밖에 長崎名誉市民의 号称이 贈與되고 政府의 表彰을 받는 等 数많은 栄誉가 그에게 주워졌습니다.

그러나 運命은 避해 가지 않고 1951年5月1日 長崎医大病院에서 43歳의 젊은 나이에 逝去하였습니다.

그런데 “長崎の鐘”이라고 하는 노래와는 어떤 關係가 있을까요 永井隆教授와 親交가 있었던 医学博士 式場隆三郎가 1949年에 コロンビアレコード에 提議해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余談입니다만 式場隆三郎는 “放浪の貼り絵画家” 山下清의 才能을 発見하고 世上에 그를 紹介한 사람으로 알려 저 있습니다.

コロンビア에서 作詞의 依頼을 받은 サトウハチロー는 처음에는 베스트셀러 에 便乗한 一時的 流行 商品 程度로만 생각이 되어 拒絶하였답니다.

그러나 그 後 永井教授에게서 贈呈 받은 著書를 읽고 크게 感動하여 「これは神さまがおれに書けといっているのだ=이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쓰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確信하고 마음 전부를 받쳐 作詞하였다고 합니다.

그것은 作曲의 古関裕而도 같았습니다 그 메로디가 훌륭한 것은 短調로 始作한 曲이 「なぐさめ、はげまし……」의 곳에서 밝은 長調로 돌아서는 点입니다. 이것으로 인해 슬픔으로 이어지지 않고 未来의 希望을 가지자고 하는 메시지가 強力하게 増幅되어 있다고 伝해저 옵니다.

サトウハチロー도 古関裕而도 数많은 히트曲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굳이 이 한 曲이 世上에 안겨줄 感動이 얼마나 클까 하는 点에서 이 曲을 最高傑作으로 만들었다고 하여도 좋을 것이 아닐까요 하는 評입니다.

以後 藤山一郎은 아코디언을 가지고 永井教授를 病問安하고 그의 벼갯머리에서” 이 ”長崎の鐘”을 불렀답니다. 永井教授는 그 礼로서 다음의 短歌를 贈呈하였습니다.

“新しき朝の光のさしそむる荒野にひびけ長崎の鐘”

藤山는 거기에 멜로디를 붙이고 自身이 “長崎の鐘”을 부를 때는 자주 反歌(長歌の末尾に添える短歌)와 같이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1950年 “長崎の鐘”은 新藤兼人등의 脚本에 依해 松竹에서 映画化되었습니다.

지금도 이 글과 노래를 들으면 永井敎授의 影像이 떠 오르며 눈물부터 납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우리에게 많은 敎訓을 안겨줍니다.

作成者 黃圭源